93화 반격의 반격
은철이형 스타일로 볼 때 절대 특종을 묻으려 하지는 않을 테고 분명 빵 터트릴 거다.
이상현이 건넨 자료가 언론에 공개될 경우 펼쳐질 파장이 눈에 선했다.
조윤경은 아마도 외환관리법 위반에 조세포탈 혐의.
만약 조회장까지 불똥이 튄다면 단순히 조세포탈뿐만이 아니었다.
배임이나 횡령 혐의까지 중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물론 조회장의 힘이나 위기관리 능력을 볼 때 자기는 화를 면할 수 있겠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
만에 하나라도 어그러진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성환이한테 귀띔이라도 해줘야 하나.
아직 지분승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마당에 그룹 총수의 철창행은 그룹의 최고의 악재다.
이번 악재로 최동욱이 또 나설 수도 있다.
다시 헷지펀드와 함께 저가에 지분을 크게 늘려 먹튀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집어삼키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내 알 바는 아니다.
성환이가 쫓겨나더라도 천하태평의 2대 주주니깐.
나중에 천하태평이 아마존보다 훨씬 큰 회사가 된다면 천하제일 그룹 같은 건 그냥 지갑에서 수표 몇 장 꺼내서 쥐여주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미리 플랜 B를 마련해놓으라고 살짝 귀띔이라도 해줘야겠다.
다음 날.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성환이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아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야? 왜 아직 출근 안 해?"
"출근이라니. 오늘 할 일이라도 있었나요? 난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데."
"꼭 일이 있어야지만 출근하냐?"
"있어도 할까 말까 한 게 출근인데요?"
"닥치고 그냥 좀 오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아무튼 오늘 누가 회장님 찾아온다고 했나 봐요. 회장님께서 아침 식사하는데 같이 출근하자고 하셔서 지금 천하제일 왔어요. 할 말 있으면 그냥 지금 말하시죠."
"아니다. 내일 하지 뭐."
"내일도 못 갈 거 같은데? 당분간은 여기로 와야 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태 마무리될 때까지 가족들끼리 작전이라도 짜려는 모양이다.
"그래? 그럼 이 기회에 아예 천하제일로 출근하지 그러냐? 네 책상은 원모 줘버린다."
"하여간 성격 급한 건 알아준다니까. 내가 소액주주도 아니고 사실 자본금도 거의 대부분 내가 출자한 건데 이러시깁니까? 확 그냥 투자금 회수해 버릴까 보다."
"회수하다니? 유상감자는 주주총회 특별결의사항이라 의결권 2/3의 동의가 필요한 거 모르니? 50%를 가진 내가 동의 안 하면 못 한다는 얘기지."
"그렇게 나오시면 다른 분들 주식 제가 다 사서 그냥 5:5로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제 웬만한 데는 투자 못 하게 뒷다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걸요."
이 자식 맨날 놀기만 한 건 아닌 듯.
뭐 그렇다면 할 말 없다.
"알았어. 내가 지금 잠깐 그리로 갈게."
"네. 바로 오시든지요."
전화를 끊자마자 사무실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천하제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에 가니 오랜만에 출근하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 생각에 추억이 살짝 돋아나는 것 같았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출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그 단어가 살아 움직여서 가슴팍을 막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출근한 게 아냐. 그냥 약속 있어서 온 거야'라고 되뇌면서 가까스로 안정을 찾았다.
며칠 전엔 조성환 남매랑 같이 들어갔으니 프리패스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원증이 없어 난감한 표정으로 출입문에 서성이자 덩치가 산만 한 보안요원이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멘트와는 다르게 얼굴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전혀 도와주려는 거 같지 않았다.
그냥 일없으면 꺼지라고 겁주는 것만 같았다.
"누구 좀 만나러 왔는데요. 조성환님이라고 여기 회장님 자제……."
"데스크 가셔서 방문자 카드 작성하셔야 합니다."
무서워서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데스크로 향했다.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분도 상냥하게 똑같이 물어봤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누굴 좀 만나러 왔습니다. 조성환님이라고요."
성환이 이름을 말했는데도 리셉션 직원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조용히 종이 한 장만을 건넸다.
방문자 기록 카드로 한 장안에는 이름이나 전화번호는 물론 누구를 무슨 목적으로 만나러 왔는지 오만가지 정보를 다 기재하게 돼 있었다.
귀찮다.
나 좋으라고 온 게 아니라 순전히 성환이 놈 도와주려고 온 건데.
이 귀찮은 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짜증 나서 도저히 펜을 들 수가 없었다.
조용히 전화기를 들어 최근 통화버튼을 눌렀다.
"바로 온다더니 왜 아직 안 오십니까?"
"그러게. 내가 더 이상 여기 직원이 아니잖아. 출입 카드도 없을뿐더러 마침 네가 얘기도 안 해놨나 보더라구."
"아, 그럼 못 들어오세요?"
이 자식은 전 직원들이 얼굴을 알아보니 이렇게 귀찮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거다.
"됐고! 빨리 뛰어 내려와. 안 그럼 갈 테니깐."
"가시던지요? 누가 오라고 했나? 자기가 온다고 했으면서."
"알았어. 그럼 갈게. 내가 누구 좋으라고 온 건데 할 수 없지 뭐. 그리고 참고로 너희 집안일은 내가 이상현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잠깐만요. 네네. 갑니다, 가요."
"30초 준다."
"에헤이……."
뚜뚜뚜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났는데도 성환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려는 건지.
정말 뒤돌아서 가버릴까 하는데 마침 성환이 나타났다.
"안 갔네 뭐. 하여간 말만."
"30초 안 된 거 같은데?"
"3분도 넘었거든요."
"기어서 왔냐?"
"엘리베이터가 막히더라구요."
내가 회의 늦을 때마다 습관처럼 내뱉던 말인데 언제부턴가 이놈이 가져다 쓴다.
"암튼 됐고 먼저 들어가서 문이나 열어놔."
성환의 얼굴을 보자 험상궂던 보안요원이 급격히 인상을 풀고 달려왔다.
보안요원과 리셉션 직원 모두 날 보는 표정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난 분명히 말했는데.
하긴 하루에도 워낙 많은 사람들을 대할 테니 무슨 얘기한 지 잘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들었다 하더라도 특이한 이름도 아니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일 거라곤 생각 못했을 거다.
성환이 안내한 곳은 21층 부속실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이었다.
회의실이라기보단 휴게실에 가까운 듯 광화문 쪽 창을 향해 안마의자까지 놓여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지난번에 이상현이 회장님 찾아온 날 가족회의에서 무슨 얘기했을까 생각해봤는데."
"집안일입니다."
철벽이다.
며칠 전 조회장이 남매들을 불렀을 때 내가 따라 들어가지 못했으니 내용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올 때 너희 남매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대로 되지 않은 거 같아서 말이지."
성환이 뜨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별일 아닌데요."
"특히 조윤경 표정을 보아하니 회장님께서 한번 눈감아 주실 거 같은데. 그렇다면 이상현을 담그겠다는 얘기고."
"대표님이 어떻게 아셨죠? 첩자라도 있는 거야 뭐야? 아니…… 그럼 설마 누나랑?"
"미쳤냐? 내가 조윤경이랑? 그냥 네 꼬락서니를 보니 딱 답이 나오잖아."
성환은 더 이상 핑계가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체념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상현이 그냥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놈이 아니다."
"대표님이 어떻게 알죠?"
"이상현이 원래 제일 친한…… 아니지, 유일한 친구였잖아.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지금은 왜 친구가 아니죠?"
"나를 밀었지. 아니 직접 밀었다기보단 민 거나 다름없지."
나도 모르게 동작대교 얘기를 꺼낼 뻔했다.
회귀하기 전의 일이고 앞으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절로 분노가 끓어올랐다.
"밀었다뇨?"
"출세에 눈이 멀어 조윤경한테 붙어서는 나를 제치려고 했잖아."
"아니, 성공하려면 남도 짓밟고 하는 거지 겨우 그 정도 가지고 평생의 원수 대하듯이 합니까?"
조회장의 가정교육 수준을 알 것 같다.
어쩌면 재벌 2세란 과목의 교과서 첫 페이지에 쓰여 있는 말일 수도 있다.
"똑똑한 놈이니 너도 조심하란 거지."
"회장님이나 누나나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놈은 이상현이 언론에 까발린 걸 아직 모르니 이렇게 한가한 얘기를 늘어놓는 거다.
괜히 언론 얘기까지 꺼내면 내가 이상현과 커넥션이 있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냥 이 정도에서 귀띔은 끝내야겠다.
"알았다. 어련하시겠어. 오너 분들이 알아서 잘하시겠지. 난 간다."
"네. 들어가십쇼. 멀리 안 나갑니다."
회의실을 나와 부속실을 통해 나가려는데 부속실 소파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회장을 보러 온 손님인 모양이다.
인기척에 내 쪽을 쳐다보자 그 손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낯이 매우 익었다.
은철이형이었다.
오후에 조회장을 찾아온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K신문사의 이은철기자였다.
동아리 그만둔 이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마주쳤다.
이은철 이자도 내 얼굴을 알아본 듯 아는 척 말을 건넸다.
"어? 태평이 아니냐? 오랜만이다."
"네. 오랜만이네요. 은철이형."
"그래. 천하제일 다닌다는 얘긴 들었었는데. 이렇게 보는구나."
반가움 잔뜩 머금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내 눈엔 음흉함만 보였다.
몇 달을 연애 상담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도저히 반가운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요. 저도 형 신문사 들어갔다는 얘긴 들었는데 무슨 일이시죠?"
"어. 난 약속이 있어서. 취재차."
"네. 그럼 일 보십시오."
"그래, 나중에 술 한잔하자."
"그러죠 뭐."
나중에 네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 보며 한잔하기 전까진 네 놈하고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내 마음속 말이 들렸는지 이은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하철 타고 돌아오는 도중 생각해봤다.
이은철이 왜 나타났을까?
정말 확인차 취재라도 하려는 건가?
아무래도 이상현의 말과 자료만으로는 전적으로 믿긴 어려웠을 테니 확인 정도는 필요했을 거다.
저 인간은 살살 간 보며 약점을 발견하고는 그 약점만 물어뜯을 놈이다.
조회장 측에선 고생 좀 할 거다.
이틀이 지나고도,
꼼꼼한 이은철이 취재를 빡세게 하는지 기대했던 뉴스가 나오질 않았다.
"원모야!"
"네 대표님."
"오늘도냐?"
"천하제일 관련한 뉴스는 별거 없는데요?"
"계속 찾아봐라."
"그 정도 뉴스면 따로 안 찾아도 헤드라인으로 뜨지 않겠습니까?"
하긴 메가톤급 뉴스면 나오자마자 초록 창 메인에 떡하니 뜰 테니 원모 말이 맞았다.
"그래도 찾아. 너 특별히 할 일도 없잖아."
"네."
대답은 잘한다.
그러나 원모 자식은 자기 자리 뒤에 있는 책장 유리에 모니터 화면이 비치는 줄 모르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게 검색은커녕 주야장천 게임만 하고 있었다.
"초록색이 아닌데?"
원모 녀석 움찔거렸다.
불안한 마음에 Alt+Tab을 눌렀는지 화면이 바뀌었다.
하얀 바탕이었다.
"여전히 초록 창이 아닌데?"
원모 녀석 크게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난 몸을 일으켜 검지와 중지로 내 눈을 가리킨 후 원모를 향해 몇 번 찌르는 시늉을 했다.
원모 녀석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속삭였다.
"귀신이야 뭐야!"
"사람이다."
화들짝 놀란 원모는 고개를 들어 내 쪽을 쳐다봤다.
조용히 검지로 귀를 가리키는 시늉을 하자 컴퓨터로 시선을 급하게 돌렸다.
이제야 초록 창을 열었다.
후배들 통해 알아보라고 부탁했던 김철수이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천대표. 내가 K신문사 쪽에 좀 알아봤는데 아직 아무것도 나온 건 없는 거 같아."
"꼭 기획 기사 아니더라도 소문 같은 것도 없었나요?"
"아무 소식도 없는데."
"이상하네요. 조금 더 지켜보죠, 뭐."
"그래. 후배한테 얘기해놨으니깐 기사 나기 전에 먼저 알 수 있을 거야."
"네. 부탁드릴게요."
아무리 취재할 게 더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큰 특종 건을 며칠 동안 묵혀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다른 언론사에서 눈치채고 낚아챌지도 모르는데.
설마 이은철 그자가 그냥 짬 시키려는 건가 하는 불안감도 살짝 들었다.
일단 움직여야지 하는 마음에 무작정 K신문사를 찾아갔다.
이은철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우연히 만난 척이라도 해서 이상현 얘기나 슬쩍 떠봐야겠다.
로비 커피숍에 앉아 눈과 귀를 기울여 이은철이 점심 식사하러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11시 30분이나 되었을까.
점심시간까진 한참이나 남았지만 역시 기자들의 점심시간은 빠르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무리 중에 이은철이 보였다.
우연히 만난 척하려고 다가가는데 이은철을 먼저 찾아온 자가 있었다.
카드를 대고 출입구는 나오는 누군가 이은철에게 다가갔다.
이상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