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안쓰럽다
잠시 후.
가족회의가 마무리되었는지 조윤경 남매가 무거운 표정으로 회장실을 나왔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두 사람 표정은 정반대였다.
기사회생한 조윤경은 화장실에라도 다녀온 듯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얼굴이 환하게 펴있었다.
반면, 성환은 다 된 밥에 재라도 뿌린 것처럼 똥 씹은 표정을 숨기질 않았다.
최동욱이 조윤경에게 다가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뭐야?"
"주소입니다."
"무슨 주소?"
최동욱이 나를 흘끔 보더니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라.
누구를 찾아가라는 말인가?
해결사라도 숨겨 놓은 건가?
어쨌든 이번 건은 조회장이 한번 넘어가 주기로 했다.
물론 딸의 애교에 모른 척 한번 넘어가겠다는 건 절대 아닐 테고.
판을 키웠다가 괜히 자기까지 불똥이 튈지 모르니 이 정도에서 덮으려고 한 것이긴 하지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은 이상현을 자극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조윤경을 걸고넘어져 같이 자빠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 언론에 터트리는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완전히 까발려진다면 마냥 덮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조회장이 꼬리 자르기 차원에서라도 조윤경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와 자기 가문의 성만은 반드시 지켜야 할 테니.
정말 오랜만에 이상현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직 번호는 바뀌지 않은 듯 통화연결음 소리가 울렸다.
일부러 안 받는 건지 번호를 모르는 건지.
신호가 여러 번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막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받는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선하다.
갑자기 내 번호가 뜨자 당황했을 거다.
무슨 일 때문에 전화한 건지 짱구를 굴려가며 경계했을 거다.
그러다 별거 아니겠지 일단 들어나 보자 하고 받았을 거다.
"네가 무슨 일이야?"
날이 뾰족하게 선 듯 날카로운 음성을 내뱉었다.
"회장님 찾아갔다는 얘긴 건환이한테 들었어."
"누구? 아! 네가 심어놓은 그놈?"
"맞아. 그 친구."
"그런데? 뭐 하러 전화했냐고? 내가 찾아갔다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거기서 나눈 얘기 때문이라면 상관있는 거냐?"
"말을 나누다니. 무슨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상현은 일단 잡아뗐다.
조회장과 자기가 한 얘기를 내가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조회장을 협박하고도 네가 무사할 거 같아?"
"……네가 그걸 어떻게?"
"그건 알 거 없고 우선 나와."
조회장 협박 얘기를 꺼내자 이상현이 순순히 나왔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상현과 함께 꼬박꼬박 들르던 커피숍에 도착했다.
회귀한 후 처음으로 여기서 이상현을 마주했다.
약속 시간 십 분 정도 지나 도착해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이상현이 먼저 나와 있었다.
그러나 앞 테이블에는 음료가 딸랑 한 잔만 놓여있었다.
내가 일평생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외 다른 건 한 번도 시켜본 적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기 것만 시켜놓은 거다.
회귀하기 전에는 난 항상 일이십 분씩 늦었고 이상현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젠 상황이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 한잔을 빤히 쳐다보자 이상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다.
"역시 또 늦는구만. 일부러 그러는 거냐?"
"지하철이 막히잖아. 그건 그렇고. 이제 두 잔 살 돈도 없는 거냐? 아님 그럴 마음이 없는 거냐?"
이상현은 몰라서 묻냐는 식으로 쳐다봤다.
표정은 그래도 말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적절히 둘러댔다.
"뭘 마실지 몰라서."
"모르다니? 난 무조건 뜨안데."
"뜨아라니?"
그렇지.
이 당시에는 줄임말이 일반적인 게 아니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몇 명이 나올지 몰라서."
바로 또 적절한 핑계를 댔다.
티격태격 몇 번에 예전 친구였던 시절이 잠시 떠오르는 듯했지만.
갑자기 동작대교 위에서의 장면이 겹치면서 옛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이놈은 적이다.
이놈과 조윤경을 한꺼번에 엮어서 보내버려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보다시피 혼자 왔다."
이쯤 되면 '알았다. 드러워서라도 내가 내려가서 뜨아 한 잔 사 온다.' 할 법도 하지만 이상현은 아니었다.
이 자식도 현타가 온 듯 가볍게 씹었다.
내가 내려가서 한잔 사 오기도 귀찮고 뻘쭘해서 그냥 마른침 한 번 꿀꺽 삼켰다.
"보자고 한 용건이 뭐야?"
다짜고짜 본론부터 물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이제는 만났을 때 안부 같은 걸 물어볼 만큼 친근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넌 조회장을 믿냐?"
내 말에 이상현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정말 내가 자기와 조회장 사이의 대화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조회장 성격에 아무리 자기 딸이라도 자기 뒤통수치고 딴 주머니 찼다는 걸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텐데. 거기다 그룹 위기 때 주식 가지고 장난했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자기 딸이 한 짓을 깊숙이 파헤치다 보면 결국 자기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게 밝혀질 수 있을 텐데 그걸 냅 두겠냐고? 더군다나 대놓고 그렇게 협박까지 하는데 끌려다니기만 할 사람이겠냐?"
"그래서 내가 눈감아줄 테니 거래하겠다는 거 아냐?"
"그걸 믿을 사람이냐고. 자기 목에 칼을 대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가만 냅 두겠냐? 넌 선을 넘었어. 조회장이 자기 치부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윤경을 감쌀 줄 알아? 어떻게든지 널 먼저 치려고 하겠지."
이상현도 이해가 가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나한테 훈수라도 두겠다는 거야? 무슨 꿍꿍이야!"
"널 돕겠다는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너도 싫지만, 조윤경이 더 싫은 거뿐이니까."
"어떻게 하라는 건데?"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쳐야지. 빼도 박도 못하게 언론을 이용하는 게 좋을 거야. 김철수이사가 예전 천하제일 IR파트장 할 때부터 아는 기자들이 엄청 많거든. 그분께 얘기하면 믿을 만한 분 소개해줄 거야."
"조회장까지 싸그리 넘기란 말야?"
"그건 조회장이 알아서 할 문제야.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적당한 수준에서 조윤경을 희생양 삼아 덮으려고 하겠지."
이상현은 눈알을 하늘로 치켜뜨며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김철수이사한테 얘기할 필요 없어. 나도 아는 사람 많아."
"나를 못 믿겠다는 거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이놈이 부정하지 않았다.
나 같아도 믿지는 못할 거다.
"알았어. 그런데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훈수 두는 거라고 여겼는지 즉각 반감을 드러냈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못 하겠다."
"나도 너한테 공치사 받겠다고 한 거 아냐."
이상현은 커피 한 모금을 홀짝거리며 말을 꺼냈다.
"뜨아라고 했나? 내가 커피 한잔은 살게."
내 조언이 커피 한잔의 값어치는 된다고 생각되었는지 이제야 일어섰다.
일 층으로 내려가서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 한 잔이요."
"사이즈는요?"
"제일 작은 거요."
내 조언이 500원어치 부족했었나 보다.
이어서 이상현이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커피는 핑계고 그저 나 몰래 살짝 통화하려고 내려간 거였다.
그럼 그렇지.
"네, 은철이형? 저예요 상현이."
은철이형이라면?
학내 언론사 동아리 선배.
지금 K신문사 기자로 있다는 그 선배다.
학교 다닐 때 운동권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형이었는데.
나중에 정통 보수계열의 언론사로 입사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난 학생들의 알 권리, 정보의 자유나 언론의 사명 뭐 이딴 건 일도 관심 없었다.
오로지 수정이 때문에 신문사로 들어간 거였다.
지금은 얼굴마저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수정이는 그 당시 창백한 얼굴에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던 전형적인 퀸카였다.
1학기 때 어디 가는지 뒤를 쫓다가 동아리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2학기 때 바로 그 동아리에 지원했다.
거기가 대학교 신문사였다.
수습기자 면접(신입 동아리 모집) 때 면접관이 그 당시 편집장이었던 은철이형이었다. 법대생 1학년 이상현이 바로 내 옆에서 같이 면접을 봤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가요?"
은철이형의 질문에 같이 면접을 보던 다섯 명 중 세 명은 주저리주저리 헛소리를 읊었고 이상현과 나만 대답했다.
이상현의 고전소설을 얘기했다.
나는 면접 보기 직전까지 만화방에서 라면 먹으면서 넘겨보던 만화책 제목을 말했다. 만화책도 책이니.
"20세기 소년입니다."
이때부터였나보다 나 스스로 임기응변이 좋다고 느끼게 된 게.
"아하. 그…… 소설이요?"
자기도 모르는 책이 있다는 걸 밝혀지는 게 싫었는지 은철이형은 아는 척을 했다.
"네."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한 소년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몇 권 보지 않아서 그냥 대충 둘러댔다.
물론 수년이 지나 완결본까지 보고 난 후의 느낌은 매우 달랐지만.
은철이형은 자기가 모르는 척하기 민망했는지 내 대답에 흡족한 척했다.
합격이었다.
그때부터 나와 이상현은 절친이 되었다.
물론 신문사에 들어오게 된 유일한 이유인 수정이와는 사귀지 못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동아리 방에서 잠깐 바람 쐬러 나간 수정이를 따라나섰다.
무슨 말을 했는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대강 이 정도였을 것이다.
"수정아. 우리 만나지 않을래?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쭉 좋아했어."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글거리는데 그땐 나름 심각했다.
몇 달 동안 전전긍긍하던 망설임.
말하면 차일지 모른다는 걱정.
그래도 고백 한번 못해보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용기를 내어 뱉어본 말이었다.
"미안해. 나 남자친구 있어."
끝이었다.
그래도 말하기 전엔 말하면 후회할 줄 알았는데 막상 얘기하고 나니깐 후회는 없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더 충격적이었다.
밤마다 술 취해서 수정이 고민을 늘어놨던 은철이형이랑 몰래 사귀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날 동아리방에서 그 둘이 모두를 불러놓고 사귀고 있다고 공표했다.
나를 쳐다보던 은철이형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한심하다는 듯 웃음기를 살짝 머금은 채 가소롭게 쳐다보던 그 눈빛.
군대 간다는 핑계로 동아리를 나오고 나서는 제대 이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걸음 하지 않았다.
이상현을 통해 간간이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대학 신문사에 있을 때는 한국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밤새 토론하는 걸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었다.
물론 나는 그런 건 일절 관심 없이 오직 수정이와 같은 테이블에 앉으려고 바둥바둥하기만 했었지만.
어쨌든 한국사회의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데 언론사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던 은철이형이 바로 그 언론사에 입사했다.
회귀하기 전까지는 꽤 잘나갔었던 걸로 기억한다.
정치계 입문하려고 기웃거리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었던 것 같다.
역시 이상현이 은철이형한테 기삿거리를 넘기려고 했다.
이상현 이 자식, 그렇게 같이 욕하더니 은철이형이랑도 아직까지도 친하게 지냈나 보다.
"형. 지금 경제부에 계시죠?"
"……."
"제가 좋은 소스 하나 넘겨드릴까 하는데……. 특종 한번 하셔야죠?"
"……."
"천하제일 그룹 건입니다. 지난번에 의혹사건 하나 나온 거 있잖아요. 그 건 관련된 건데, 훨씬 더 쎌 겁니다"
"지금 당장요? 지금 천태평이랑 있는데."
"……."
"그 새끼 있잖아요. 수정이 때문에 신문사 와서 집적대다가 차이고 바로 군대 갔잖아요."
개자식.
집적대다니.
"네. 이 자식 보내버리고 그리로 바로 갈게요."
잠시 후 이상현이 이 층으로 올라왔다.
어찌나 급했는지 손엔 커피도 들고 있지 않았다.
"커피는?"
이제야 커피 시키러 갔었다는 게 생각났는지 당황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아닌 척했다.
"아직 안 나왔어. 난 급한 일 있어서."
"지금 간다고? 갑자기 누가 부르기라도 했나 보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어떻게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알 거 없고. 어차피 더 할 얘기 없잖아. 둘이 마주 보며 커피나 홀짝거릴 사이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이상현은 뒤돌아서 쌩하고 가버렸다.
"잠깐."
불러봤으나 못 들었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커피는 어떻게 받으라고? 영수증이라도 줘야 할 거 아냐!'라고 소리쳐 묻고 싶었지만 이미 내려간 듯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