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91화 (91/191)

91화 의외의 상황

가족들을 해외로 대피시켰다면 협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거다.

이제 자기 안위만 챙기면 된다는 얘긴데.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이상현이 혼자 죽지는 않겠다고 물었는데 마침 조윤경의 급소를 노렸다.

조윤경이 지시한 정황이나 증거가 있다면 그걸 이상현이 쥐고서 검찰에 넘길 수도 있으니 이번 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 조사는 넘길 수 있다고 해도 조회장의 성품이나 기세를 볼 때 조윤경을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네요. 짐승한테 물린 기분이 어떠십니까?"

이상현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후벼파듯이 말했다.

"아니 네 놈이……."

분노에 사로잡힌 조윤경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현은 환한 웃음을 띠고는 차에 올라 비탈길을 내려갔다.

패색이 짙은 상황.

역습 카운터 펀치 한 방으로 상대방의 안면에 꽃아 KO승을 거둔 권투선수가 링에서 내려올 때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역시 누나 짓이었구만."

성환은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듯 히죽거리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회장님인데요."

조회장 전화라는 말에 본인의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듯 조윤경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받지 마."

전화기를 낚아채려는 듯 뻗은 조윤경의 손을 뿌리쳤다.

"늦었어. 이미 받았어."

희미한 웃음과 함께 전화기를 뺨에 갖다 댔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

"지금 안가에 누나랑 같이 있습니다."

"……."

"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성환은 조윤경을 돌아봤다.

"회장님께서 같이 들어오라고 하시네. 지금 당장."

조윤경 올 게 왔다고 생각했는지 체념한 듯 성환의 차에 올라탔다.

성환이 운전석에 들어서며 나를 쳐다봤다.

"대표님도 같이 가시죠."

"그래. 어차피 차도 없으니깐 같이 가자."

잘됐다.

조회장 앞에 불려간 조윤경의 무너지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겠다.

차 안에서 남매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거나 대학 시절 술 마시고 행패 부리다 경찰서에 끌려가던 개인적인 일탈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번 건은 무게감이 달랐다.

감히 회장의 비자금에 손을 대서 빼돌렸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힘을 합치지는 못할망정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운 거다.

조회장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성환이 회사 정문에 차를 세우고 조윤경과 함께 내리자 직원들이 바로 알아보고는 뛰쳐나와서 맞이했다.

평상시 조윤경이 하던 짓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무님 나오셨습니까?"

데스크에서 나온 직원이 로비에서 마스터키를 대고는 문을 열어놓았다.

일사불란한 응대였다.

역시 1층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니 한 번도 다른 층에 멈추지 않고 21층까지 바로 올라갔다.

지난번 세무조사 보고건 이후 정말 오랜만의 회장실 방문이었다.

구중궁궐처럼 겹겹이 싸고 있는 사무실들을 통과해 회장실 문 앞에 다다랐다.

부속실장이 일어나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업무로 오신 겁니까? 정말 오랜만에 두 분을 한꺼번에 뵙네요."

조성환은 상대방의 웃는 얼굴에도 아무 반응 없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네. 업무입니다. 회장님께 저희 왔다고 전해주시죠."

부속실장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위아래로 훑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누구?"

감히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한 거다.

"지금 내가 있는 회사 대표님이고 같이 들어가도 괜찮아요. 회장님도 몇 번 뵀고."

"아니. 그래도 여쭤는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성환과 부속실장은 편한 사이는 아닌 듯 보였다.

성환은 부속실장이 들어가려는 걸 막아 세웠다.

"됐어요. 그냥 내가 들어가서 여쭤볼게요."

성환이 조윤경과 함께 회장실로 들어갔다.

부속실장은 성환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귀를 기울이자 회장실 안에서의 대화가 들려왔다.

"회장님. 지난번 몇 번 뵀던 천태평 대표 밖에 와있는데 들어오라고 해도 될까요? 저희 집안일도 많이 도와주고 있으니깐요."

조회장 헛기침과 함께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지금 가족회의다. 넌 그자를 믿는 거냐?"

성환은 잠시 고민한 듯하다 답했다.

"완전히 믿는다기보단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할까요. 믿을 만하다 그 정도입니다."

"아랫사람 너무 믿는 거 아니다. 명심해."

"네."

조회장의 본래 성격이 저렇구나.

조윤경이 아무래도 조회장을 많이 닮았나 보다.

잠시 후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성환이 나왔다.

"대표님. 잠시 여기서 기다리셔야겠네요. 가족회의라고 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난 신경 쓰지 말고 얘기나 잘해."

괜찮다.

어차피 다 들린다.

다만 조윤경의 무너지는 표정을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부속실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회장실에서 나왔다.

최동욱이다.

조회장과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최동욱이 나를 발견하고는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조성환님하고 같이 오신 분이시죠?"

그러고 보니 이자도 걱정이라도 되어서 왔나.

회장실로 이상현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고 그렇다면 이상현이 조윤경의 짓임을 밝혔다는 얘기일 테니.

조윤경 성격상 절대 혼자 죽으려고 하지 않을 테니 당연히 예전 헷지펀드 건의 주도자가 자기라고 밝힐 것 같아 꽤 걱정되었을 거다.

"네. 그렇습니다만. 저희가 만난 적이 있나요?"

눈을 크게 뜨고는 그러는 넌 누구냐는 식으로 답했다.

최동욱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근나근하게 말했다.

"네. 지난번 안가에서 지나가듯 뵀었습니다."

속으론 불안함에 똥줄이 타들어 가는데도 이렇게 평온한 척 젠틀함을 잃지 않다니.

대단한 놈인 것은 분명하다.

"네. 그렇군요. 지금 성환군 가족회의 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 가족이 아니니깐요."

너도 가족 아니라 못 들어가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일부러 후벼파듯 말했다.

최동욱 미세한 눈가의 떨림 한번 없이 평온하게 답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천천히 기다리십시오."

겉으론 평온한 척하는 모습.

가족회의에 자기는 못 들어가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살짝 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자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해서 안에서의 얘기를 못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호통이나 다그침 같은 큰 소리가 났더라면 집중 안 해도 들렸을 텐데.

아직까지 제법 조용한 분위기였다.

한참 동안의 미묘한 정적 이후 조윤경의 쥐구멍에라도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니 회장님 죄송해요. 그게……."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못 믿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낙담한 듯 뱉었던 말을 주워 삼켰다.

"윤경아!"

조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자후를 뱉기 전에 숨을 고르려는 듯 쭉 내리깔은 침착한 목소리였다.

"네."

단 한마디였지만 두려움에 목소리는 부들부들 떠는 듯했다.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키웠니?"

"아니요."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가리켰니?"

"아니요."

혼낼 거 있으면 빨리 혼내지 빙빙 둘러대다 갑자기 내리꽂으려는 스타일인가보다.

피 말리는 스타일.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조윤경 생각지 못한 물음에 당황한 듯 답했다.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원하는 게 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쟁취하라고 내가 가르치지 않았나?"

뭐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다.

"윤경아! 판이 끝나서 화투장을 흐트러뜨려 섞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다. 그런데 넌 왜 벌써부터 다 진 것처럼 그런 거니? 끝나기 전까진 충분히 역전할 수도 있을뿐더러 설령 역전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나가리 판(고스톱에서 무승부 판으로서 다음 판은 두 배의 배율이 적용된다)이라도 만들어봐야지. 나가리 후엔 두 배판인 거 모르니?"

역시 고스톱의 대가다.

"네? 그게 무슨 말씀……."

화투를 모르는 조윤경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나 보다.

"정말 내가 모르는 줄 알았니? 괘씸한 건 괘씸한 거지만 그것보단 우리 딸이 이렇게 패배자처럼 축 늘어져 있는 걸 내가 용납할 수가 없구나."

평범한 집안의 대화는 아니다.

이것이 재벌들의 교육관이라도 되는 것인가.

"흑흑, 아빠 죄송해요."

조윤경이 훌쩍거렸다.

"주인이 기르는 개한테 물리면 어떡해야 하는지 아니? 복날에 제일 먼저 삶아 먹었어."

이상현을 개라고 칭하다니 조윤경은 조회장을 닮았다.

이상현이 속았다.

설마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 했을 텐데.

조회장이 조윤경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리고는 주인 물은 개를 잡으라고 몽둥이를 쥐여줄 것이다.

역시 공이 울릴 때까지는 절대 끝난 게 아니다.

이상현은 조윤경에게 역습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고 생각해 뒤돌아 두 손을 번쩍 들고 승리감에 도취 되어있었는데.

떡실신된 줄 알았던 조윤경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현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곧 뒤에서 묵직한 주먹이 날아오는 걸 그대로 맞을 거다.

조회장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를 눌렀는지 갑자기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조회장과 이상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이상현이 찾아왔을 때 조회장과의 대화가 녹음된 것을 튼 것이다.

"법무팀 이차장이라고 했나? 윤경이 일 많이 봐주고 있다고 들었네만. 윤경이를 통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회장님께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무언가를 보여주는 듯 말없이 나지막한 신음 소리만 들렸다.

한참 뒤 조회장이 입을 뗐다.

"나에게 이것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룹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 회장님께 알려드리는 겁니다. 조전무가 뒤에서 한 일들을 도저히 눈감고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이라면 내가 알아서 하네만. 이걸로 내가 자네한테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칭찬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상현이 한동안 침묵 후에 말을 이었다.

"어차피 조전무가 빼돌린 것도 원래는 회장님의 비자금 라인에서 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것도 못 본 척 눈감아드리겠다고 제안드리는 바입니다."

"자네가 주겠다는 게 그거구만. 그럼 내가 줘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제가 이제 곧 출국할 예정입니다. 섭섭지 않게 지원해주시면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음."

"어떠십니까, 회장님?"

"음……. 공정한 거 같구만. 방법을 생각해보고 곧 연락을 주지."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녹음기가 멈췄다.

조회장이 조윤경을 향해 호통쳤다.

"윤경아! 네가 데리고 있던 개가 감히 나를 걸고넘어졌다고……! 음……."

조윤경이 조금 꼬불친 거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어느 정도 규모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비자금을 걸고넘어진 것은 도저히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조회장은 아까 이상현 면전에서는 티 한번 안 냈었다.

자기의 감정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

이상현은 자기의 협박이 통했을 거라로 생각했을 텐데.

완전한 오산이다.

잘못 짚었다.

조회장이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정면 도전했으니 어떻게 될지 앞날이 선하다.

"아니 어떻게…… 이자가."

조윤경 역시 울분을 토하듯 소리쳤다.

분하다는 듯 표현했지만, 심정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든 화를 이상현에게 떠넘기고 살짝 비켜서는 거 같아 안심됐을 것이다.

교활한 년.

아무래도 복수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나도 해볼 만큼은 해봐야 한다.

이상현과 조윤경까지 둘 다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상현을 자극해서 혼자 죽지 말고 조윤경 뒷다리라도 잡고 꼬꾸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조회장이 고개 정도는 끄덕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방법이 있을까?

이상현이 증거자료 모두를 사본도 만들어놓지 않고 조회장에게 넘겼을 리는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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