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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90화 (90/191)

90화 반격

온통 신경은 탕비실 안에만 꽂혀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상현이 누구한테 전화라도 걸었는지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현입니다. 며칠 전부터 전무님과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아침에 찾아뵀을 때도 급한 일 있으시다고 만나주시질 않으시더라구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는지 해서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럼 메모 부탁드리겠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조윤경이 이상현을 피하고 있다.

조윤경 측에서 작업 들어간 거다.

이상현이 어디론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이번엔 최동욱이다.

"……."

"잠깐이면 됩니다."

"……."

"조전무 측에서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요. 얼마 전에 홍콩 측에 다이렉트로 자료 요청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무슨 정보라도 들으신 게 있는지 여쭤보려고 전화드렸습니다."

"……."

"네. 저도 그렇게는 생각합니다만……. 네. 알겠습니다."

조윤경 측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최동욱한테 물어봤지만 분명 잘 모르겠다거나 별거 아닐 거라고 한 모양이다.

이상현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최동욱은 이미 이상현을 희생양 삼으려고 조윤경과 합의를 끝낸 상황이니.

이상현 완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본인도 그걸 깨달은 건지 통화를 끊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어 무슨 딱딱한 걸 걷어찼는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 속에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소리가 너무 커서 나뿐만이 아니라 사무실 내 모든 사람이 다 들었을 정도였다.

원모가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다.

"왜 저런 거냐 원모야?"

"저거요? 빈 생수통인지 알고 발로 찼나 보죠. 아침에 새 통 배달와서 제가 빈 통 다 치워버렸거든요."

"그럼 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그냥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탕비실 담당자가 자기 일을 미루다 보니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거 아니겠습니까?"

아까 탕비실 들어갔다가 괜히 욕 들어 먹은 게 조금은 풀렸나 보다.

"이차장님 예전 천하제일 있을 땐 젠틀하다고 소문났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보네요."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겉모습에 현혹되면 안 돼."

원모가 놀리듯 되물었다.

"설마 대표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겉모습은 이래도 속으로는 착하시다고요?"

"아니 난 겉과 속이 같잖아."

"네. 그렇죠. 한결같으시죠."

조소와 함께 끄덕대는 게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 * *

퇴근 후.

막 샤워를 마쳤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성환이다.

"뭐야? 이 밤에?"

"아까 태오 산책시키다가 우연히 봤는데 집 밖에 이상현 차장이 와있는 거 같은데요. 이상한 차 한 대 서있길래 봤는데 그 안에 있더라구요."

대저택들 사이로 평범한 차 한 대가 밖에 서 있으니 저절로 눈길이 갔을 것이다.

"그래? 그 자식이 왜?"

"모르겠어요. 설마 회장님 뵈러 온 건 아닐 테고 누나 기다리는 게 아닐까요?"

이상현은 조윤경과 연락이 닿질 않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느꼈는지 무턱대고 찾아왔나 보다.

설마 칼 들고 덤비려는 건 아닐 테고 협상이라도 하러 왔을 것이다.

"그래? 조윤경은 아직 안 들어왔고?"

"네. 이제 곧 들어올 거예요. 많이 늦진 않으니깐."

"알았어. 끊어."

"네?"

뚜뚜뚜뚜.

이상현이 뒤집어쓴다거나, 코너에 몰린 쥐새끼마냥 조윤경을 물어버릴 수도 있었다.

최소한 둘 중 하나는 날릴 수 있는 기회다.

일단 가서 들어봐야겠다.

택시를 타고 꼬불꼬불 골목길을 돌면서 산꼭대기로 향했다.

안가에 조금 못 미쳐 택시에서 내렸다.

역시 저 앞에는 이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차량이 한 대 서 있었다.

이상현이다.

다행히 아직 조윤경이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

아까 성환이와 통화할 땐 분명히 곧 들어온다고 했는데.

10분, 20분, 30분이 지나고 통화한 지 한 시간도 넘었는데 아직 조윤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급하게 나온다고 추리닝에 손에 잡히는 데로 긴 코트 한 벌 대충 걸친 바람에 추위에 미쳐 대비를 못 했다.

하필이면 산바람까지 쌩쌩 불어 살갗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차라리 이상현 차 안에 들어갈까라는 생각마저 들 때쯤 마침 대형 SUV 한 대가 산기슭을 올라오고 있었다.

조윤경이다.

이상현도 조윤경의 차를 발견한 듯 차에서 내려 안가 문 앞쪽에 섰다.

차에서 내린 조윤경은 기사를 보내고는 마지못한 듯 이상현 쪽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하는 짓이야!"

"전무님께서 피하시는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치가 없는 거야 뭐야?"

"홍콩에다가 자료 요청하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제가 뒤집어쓰길 원하시는 겁니까?"

"뒤집어쓰다니?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자기가 뒤집어썼다는 표현이 맞는 건가?"

적반하장!

역시 예상한 그대로다.

"설마 제가 모든 걸 다 안고 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뭐야? 지금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협박이라뇨. 협상하자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이상현 역시 예상한 그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조윤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더니 그 말이 맞네. 은혜를 원수로 갚을 놈!"

"은혜도 모르는 짐승은 전무님이죠."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눈에서는 마치 불꽃이 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조윤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꼭 이 말까지는 하기 싫었는데 이쯤 되니 어쩔 수 없군. 이차장 가족들 모두 안녕하시지? 내년도 그렇고 내후년에도 계속 안녕해야 할 텐데 말이지."

역시 가족들 협박을 했다.

조윤경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말투를 볼 때 쉽게 짐작할 수는 있었다.

한낱 깡패 정도의 협박이었다면 그냥 말로만 하는 거겠지 하고 넘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는 조윤경이다.

그녀의 성품과 능력을 감안할 때 절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물리적인 힘을 쓰겠다는 말도 되겠지만 그 방법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켜 버리겠다는 말도 될 수 있다.

이상현은 그런 협박을 할 줄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분한 듯 고개를 떨구고는 몸을 떨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사람이라니? 방금 나보고 짐승이라고 한 게 네놈 아니었나?"

"으!! 흐흐흑."

이상현은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흐느꼈다.

자기가 모시던 마님한테 결국 내팽개쳐진데다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같은 걸 한번 겪어봤던 나로서는 기분이 어떨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런 협박을 들었다면 우선 상대방에 대한 극렬한 분노가 생긴다.

그리고나서 아무 대응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는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상현은 한참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입을 뗐다.

"전무님 말씀대로 모두 제가 한 일이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역시 자포자기한 상태가 된 것이다.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사람이 잘못을 했으면 반성을 해야지. 피할 생각만 하면 쓰나."

"죄송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들어보고."

"이제 곧 구속될지도 모르니 그 전에 며칠만이라도 시간을 주십시오.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데 여행이라도 다녀오겠습니다."

"3일이야. 곧 검찰 쪽에 넘길 자료 취합이 끝나니깐 그 이상은 안 돼. 설마 딴맘 먹거나 하면 네놈한테 결코 좋지 않을 거야. 고발장 넣기 전에 먼저 자수라도 하는 게 나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이상현이 허탈한 듯 고개를 푹 숙인 후 자기 차에 올랐다.

차량이 안가를 떠나 비탈길을 내려왔다.

스치면서 슬쩍 본 이상현의 표정은 절망에 싸여있는 듯 어두워 보였다.

가족들 협박을 들은 마당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 *

며칠이 지나고 이상현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더니 정말 가족들과 여행이라도 다녀왔나 보다.

캐리어를 하나 끌면서 들어오더니 탕비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급하게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자수라도 할 셈인지 마지막으로 짐 챙기려고 왔나?

잠시 후.

이상현이 탕비실 문을 박차듯 나와서는 사무실 밖으로 휑하니 나갔다.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는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열등감이나 질투 때문이었을 거다.

내 처지를 곧 감옥에 갈 자기의 처지와 비교해서였는지 도저히 나와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았을 것이다.

원모는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원모에게 현실을 자각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원모야!"

"네, 대표님."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니?"

"아니요. 뭔 일 있습니까? 이상현 차장님 야반도주라도 한 겁니까?"

"지금이 밤이냐? 아무튼 비슷해.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요?"

"중요한 건 이제 네가 다시 탕비실 책임자가 됐다는 거지."

"네?"

"방금 저놈 파견 생활 정리한 거야. 이제 네가 다시 막내가 되었다는 뜻이지."

이제야 깨달은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원모야 어차피 저 자식 아무것도 안 했잖아. 달라질 건 없어."

"그래도……. 네."

원모는 체념한 듯 내뱉으려던 말을 주워 담았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건환이다.

업무 시간에 전화한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뭔가 특이사항이 발생한 거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대표님.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말해 봐."

"방금 전에 회장님께 이상현 차장이 찾아왔었습니다."

"뭐라고? 이상현이?"

"네. 캐리어도 들고 왔더라구요."

자수하러 간 게 아니었다.

가족들과 여행 다녀온 뒤 갑자기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조회장을 찾아 조윤경의 짓을 까발리러 갔나 보다.

"비서실에선 아무도 몰랐던 거야? 약속 있었는지?"

"네. 아무도 몰랐죠. 회장님께서 누가 왔는지 들으시더니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내 메일이라도 먼저 보내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 자식 아직 있어?"

"아뇨. 방금 전에 나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네 전혀요. 그런데 이상현차장 나올 때 표정이 썩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저한테도 한마디하고 가시던데요?"

"뭐라고?"

"그냥 뭐. 고생한다고요."

스파이로 심어놓은 자기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건환아. 더 들은 건 없어?"

"네. 나가면서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요. 성북동으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 고마워."

조윤경을 만나러 간 거다.

심경의 변화인지 아니면 다른 약점이라도 찾았는지 협상테이블로 다시 끌어들인 것이다.

마침 성환이 출근한 듯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성환아!"

"네?"

"퇴근해."

"방금 출근했는데요?"

"할 일도 없잖아. 그냥 퇴근해."

"에이 방금 왔다니깐."

"퇴근하라고 해도 뭐라하네. 그럼 그냥 나 좀 태워줘."

"왜요?"

"안가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 거 같은데. 이상현이 회장님 찾아갔었대. 그리고 지금 조윤경 만나러 간 거 같아."

"그래요? 무슨 일이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려고 하는 거지."

"네? 재밌겠는데요. 지금 가죠."

싸움 구경이 재밌는 것도 있지만 조윤경이 곤란해지면 자기한테는 이득이니 좋아서 저러는 거다.

성환의 차는 역시 돈값을 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바닥에 딱 달라붙은 듯 힘 한 번 안 들이고 가볍게 올라갔다.

안가에 도착하니 역시 며칠전에 본 이상현의 차가 서 있었다.

조윤경과 이상현이 마주 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와 성환이 다가갔는데도 두 사람은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냥 없는 사람 셈 치는 건지 아니면 더 이상 우리에게 숨길 게 없다는 건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말을 주고받았다.

조윤경이 흥분해서 날뛰듯 쏘아붙였다.

"네가 회장님 찾아뵙고도 무사할 거 같아? 너희 가족들이 안녕할 거 같냐고?"

"하하. 이게 모두 전무님 덕분입니다. 마침 조기유학 생각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딱 좋은 기회가 되었네요."

"뭐라고? 내뺐다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가족들을 바로 외국으로 보내버렸다는 얘기였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다.

가족으로 협박할 것이란 걸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플랜 B를 마련해놓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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