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희생양
바로 따라붙을 수는 없어서 의심을 피하고자 우선 본채 안으로 들어가는 척했다.
조윤경은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귀를 기울였지만 거리가 멀어서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왜 집구경이 아니라 투어라고 했는지 납득이 갔다.
본채 뒤로 돌아서 차고지 근처로 살금살금 향했다.
그런데 이런 X댕!
뭔가가 있었다.
누런 이빨을 무섭게 세워 보이고는 헉헉대고 있는 셰퍼드였다.
이 녀석이 태오다.
한 번 물리면 살점이 떨어질 때까지 놓아줄 것 같지 않게 무섭게 생긴 놈이었다.
태오 앞에는 내가 먹던 접시 그대로 김밥이 놓여있었다.
이런 X바.
개밥인 것도 모자라 내가 먹던 그릇마저 개밥그릇이었다니.
어떤 마음가짐으로도 정신승리가 불가능할 정도의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그래도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었다.
다행히 태오는 내가 자기 밥을 뺏어 먹을까 봐 경계한 거지 나를 물것 같진 않아 보였다.
무는 얘였다면 목줄로 묶어놨을 것이다.
난 온 얼굴의 근육을 써서 '네 밥에 관심 없다.' '난 이미 배부르다.' '나도 아까 너랑 같은 거 먹었다'라고 말하듯이 쳐다보았다.
다행히 태오가 알아들었는지 이내 고개를 처박고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저놈도 파인애플 김밥에 환장한 듯.
입맛마저 나와 같다니.
몇십 미터나 되는 거리를 살금살금 다가가니 이제야 둘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늦지 않은 듯.
인사말 먼저 주고받았는지 이제야 본격적인 얘기를 막 꺼내고 있었다.
조윤경이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지?"
역시 젠틀한 최동욱은 비교적 정중한 말투로 답했다.
"전무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뭔데.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지 그래. 뱅뱅 돌리지 말고."
"홍콩 페이퍼 컴퍼니 그거 다 전무님 작품인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뭐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럼 나는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네가 헷지펀드랑 짜고 천하제일 공격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음……."
최동욱 나지막이 한숨을 쉬는 게 '역시 알고 있었군' 하고 깨달은 눈치였다.
조성환이 조윤경한테 고깃집에서 이상현과 이호창변호사와 함께 만났다고 얘기한 걸 모르니 당연히 이상현이 발설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이상현에 대한 믿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누님이라고 봐 드리길 원하십니까?"
유전자 검사 결과한 걸 안고 있다고 돌려서 얘기한 거다.
"누님이라니 이게 어디서! 네까짓 게. 넌 우리 엄마 아들이 아니야. 그냥 남이라고."
조윤경 역시 이상현이 이중스파인 걸 알고 있어서인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증거가 있습니까? 제가 그 헷지펀드랑 한패라는?"
"찾아야지.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니깐."
"세상에 비밀이 없다고 하시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홍콩 건도 곧 드러날 겁니다. 아무리 사인을 직접 안 하셨다고 해도 수하를 시켜서 한 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상현을 말한 거다.
아무리 직접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상현은 조윤경의 사람이니 조윤경 짓이나 다름없지 않냐라는 거다.
"너나 조심하지. 그놈은 내 수하가 아니라 네놈 수하인 거 같은데. 이호창변호사랑도 셋이 친한 거 다 알고 있어. 누가 먼저 까발릴 수 있을 거 같아?"
치킨게임이다.
둘 다 마주 달리기만 한다면 결국 부딪쳐서 둘 다 죽는다.
한 명이 포기하거나 해야 하는데 두 사람 모두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최동욱이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 일은 우리 둘 다한테 득 될 게 없을 거 같은데. 한 사람이 먼저 팠다고 한들 다른 사람이 포기할까요? 죽을 때 죽더라도 같이 죽자고 할 텐데."
최동욱이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치킨게임에서 서로 맞서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이쯤에서 휴전하시죠."
"뭐? 휴전?"
"네. 휴전. 이번 건들은 그냥 서로 묻자는 겁니다."
"이제 와서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이미 갈 데까지 간 거 같은데."
"아직 선을 넘진 않았습니다. 아직까진 가능합니다."
"어떻게?"
"페이퍼 컴퍼니 내부문서 사인 누가 했다고 했죠?"
"이상현이지. 설마 몰라서 묻는 거야? 그 박쥐 같은 자식이 얘기했을 거 아냐."
"그러니깐요. 전무님이 안 하셨잖아요. 이상현 차장이 한 거지."
희생양이다.
이상현을 희생양 삼자는 거다.
무서운 놈이다.
그래도 이상현이 가만히 있을까?
그냥 혼자 뒤집어쓸 놈이 절대 아닌데.
분명히 무슨 대비책이라도 마련해놨을 거다.
"이차장이 혼자 안고 갈 거 같아? 나도 그렇지만 너도 마냥 안심하지는 못할 텐데? 이상현 말고도 이호창변호사 입단속까지 해야 할 테니."
조윤경도 이상현이 그렇게 순순히 혼자 뒤집어쓰지는 않을 캐릭터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호창변호사는 걱정 없습니다. 비밀 유지 협약도 되어 있을뿐더러 어찌 됐든 간에 돈이면 해결되는 사람이니깐. 문제는 이상현 차장인데."
"이상현은 믿지 못할 놈이지. 절대 입 다물고 있지 않을 거야."
"그 입을 다물게 해야죠."
"다물게 하다니?"
"이상현 차장 가족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들이라고 했나 딸이라고 했나?"
어떻게 가족을, 그것도 자식을 입에 담을 수 있다니.
최동욱에게 배울 게 있다고 한 거 취소다.
저놈은 악랄한 게 조윤경 못지않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른다.
본성을 숨기고 저런 선한 인상과 젠틀한 매너로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니 정말로 저 인간을 조심해야겠다.
조윤경이 의미심장하게 맞장구쳤다.
"그렇지. 그게 있었지."
악랄한 연놈들이 이상현을 희생양 삼았다.
회귀하기 직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동작대교 위에서 뛰어내릴 때의 그 절망적인 기분이 떠오르니 다시금 몸서리가 쳐졌다.
아무리 이상현이 쳐죽일 놈이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놈 개인에 대한 감정이고 그의 가족 특히 어린 자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런데 가족까지 들먹이며 협박하려 하다니 이상현이 예전의 나라도 된 듯 안쓰러워지기까지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수는 원수이니 귀띔을 해준다거나 나서진 않아야겠다.
그냥 협박이겠지 설마 가족에게 정말 해를 입히진 않겠지.
"전무님은 이차장 관련한 자료 모아서 저한테 보내주세요. 검찰에 제출할 테니깐. 그자 입만 막아주시면 전무님까지 피해가 가진 않게 하겠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못 믿는다고 해도 별수 있습니까? 이번 일로 전무님께까지 피해가 가면 전무님이 가만있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내 자료도 결국 파낼 텐데. 같이 죽자는 거밖에 더 되겠습니까?"
최동욱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 조윤경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나도 곧 자료 만들어서 보낼게. 그런데 하나만 묻지. 네 정체는 알겠는데 목적이 뭐야?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접근한 건데?"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그 말이 대답을 다 했다.
내 귀에는 '너희가 가진 걸 모두 뺐을 거야.'라고 들렸다.
조윤경도 비슷하게 들었는지 더는 묻지 않고 다른 말로 답했다.
"쉽지는 않을 거야."
직접 보진 않았으나 두 사람의 눈빛에선 불꽃이 튀었을 게 분명하다.
잠시 후.
누군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여깄었네. 한참 찾았구만."
성환이었다.
다행히 차고와는 거리가 있어서 조윤경과 최동욱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바람이 좋아서 투어 좀 하느라고. 집 좋다 야."
"왜요. 밥 먹고 차까지 마시니까 아주 주무시기라도 할라고요?"
"그러면 더 좋고."
"아 쫌! 정말!"
이놈 진심 화났는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조용히 좀 하라고!"
재빨리 눈치도 줬으나 이해 못 한 듯 성환이 계속 구시렁댔다.
"나 할 거 많으니깐 제발 집에 좀 가시라고요. 네?"
방금 내지른 성환이 목소리가 컸는지 차고에까지 닿은 것 같았다.
최동욱이 걱정스런 말투로 조윤경에게 물었다.
"밖에 누가 있나 본데요?"
"잠깐."
조윤경이 차고 밖 정원 쪽으로 자박자박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난 다른 거 하는 중이었다고 일부러 들으란 듯 성환에게 크게 소리쳤다.
동시에 한 손으로는 멀리 태오 밥그릇을 가리켰다.
"야 이놈아! 손님한테 어떻게 저 개밥그릇으로 밥을 줄 수가 있냐?"
"저거 개밥그릇 아닌데."
"저렇게 강아지가 핥고 있는데 개밥그릇이 아니라니?"
"강아지가 사람 밥그릇으로 먹는 거지 사람이 개밥그릇으로 먹는 게 아니라니깐요."
논리적으로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묘하게 맞았다.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조윤경도 그냥 우리끼리 정원에 나와서 다투는 소리라고 알아들었는지 다시 차고로 들어갔다.
"별일 아니야. 성환이 천태평인지 하는 놈하고 마당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네."
"천태평이요? 그자가 왜 왔죠? 누가 불렀나요?"
역시 최동욱은 나를 알고 있었다.
그때 병원에서 스쳤을 때 한눈에 나를 알아본 것이 맞았다.
"몰라. 아까 성환이한테 물어보니깐 그냥 배고파서 왔다나 뭐라나 암튼 금방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배가 고프다고요?"
최동욱이 한숨을 내뱉는 걸 보니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닌 듯했다.
"그럼 그런 줄 알고 이만 가겠습니다."
"이번엔 넘겼다고 널 인정하겠다는 건 아니니깐 절대 착각하지 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번 공모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을 뿐 절대 손잡은 것은 아니라는 거다.
잠시 미룬 것일 뿐 진검승부는 다음에 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이내 자동차 시동이 걸리더니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성환이 한동안 멍때리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한마디 했다.
"뭐야? 왜 갑자기 또 기도를 하는 거지?"
"기도 아니다. 저게 개밥그릇인지 사람 밥그릇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네. 착각은 자유니깐 맘대로 생각하시죠. 그리고 또 개밥그릇이면 좀 어때요? 나도 저기다 먹는데. 개밥그릇이나 사람 밥그릇이 따로 있나?"
말문이 막혔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떠냐.
그릇 같은 겉치레, 형식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릇 안에 담고 있는 내용물이 중요하지.
이놈 일부러 철학적 화두를 던진 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이놈한테도 하나 배웠다.
* * *
며칠 뒤 오후.
출근 시간이야 따로 없긴 하지만 점심시간도 한참 지나서야 이상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휑하고는 탕비실로 직행했다.
무슨 일일까.
혹시 조윤경과 최동욱이 자기를 희생양 삼아 버리려고 하는 걸 벌써 눈치라도 챈 걸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옵저버를 투입해야겠다.
"원모야!"
"네, 대표님."
원모가 대답과 함께 몸을 빳빳이 세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은 잔 게 아니란 걸 온몸으로 증명하려고 한 것이다.
자는지 확인하려는 거 아닌데.
설령 잠을 자도 상관은 없는데, 오랜 직장생활 습관이 몸에 밴 듯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 오랜만에 보이차나 한잔할까?"
"타오라는 겁니까?"
"그렇지. 알아들었으면서 안 가고 뭐 해?"
"손님 오셨을 때만 타기로 한 거 아닌가요? 직장 내 갑질 문화 없앤다고 한 지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요?"
"오늘 내가 널 방문한 걸로 치면 안 될까? 내가 손님이라고."
"직접 타서 드시지 말입니다. 아니면 직원을 한 명 뽑던지요."
"에이 씨. 좀 한 번만 해주면 안 될까? 꼴 보기 싫은 자식 있어서 저기 들어가기 싫단 말이야."
정색하고 화를 내자 원모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터벅터벅 탕비실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노크도 없이 갑자기 뭐야?"
이상현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자 원모는 당황한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전 또 안 계신지 알고."
그러나 잠시 후 무슨 생각이라도 났는지 말을 이어갔다.
"말이 좀 짧으시네요. 그래도 엄연히 직급이라는 게 있는데."
자기는 여기 임원이고 넌 다른 회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일 뿐이라는 현실을 상기시켜준 것이다.
그러나 이상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답했다.
"알았으니까 볼일 봤으면 나가."
강렬한 눈빛에 얼어붙은 듯 원모가 조용히 탕비실을 나왔다.
"문 안 닫아?"
뒤돌아서 다시 탕비실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이상현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게 오늘 오전에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원모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찾았다.
"저기 대표님. 보이차는 쫌."
내가 들은 줄 모르니 설명해주려고 한 것이다.
"알았어. 차는 됐고 저놈 지금 뭐 하고 있디?"
"네?"
"탕비실 안에서 뭐 하고 있냐구?"
"모르겠습니다. 외장하드 꼽아놓은 거 보니까 무슨 재밌는 거라도 옮겨놓으나 보죠."
이상현이 무슨 낌새라도 챘는지 증거를 모아놓으려고 한 것일 거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