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밀담
배운 건 바로 써먹어야 한다.
뒤를 돌아보자 원모가 엎드린 듯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정수리 근처에 싱크홀이라도 생겼는지 휑한 가마가 한눈에 들어왔다.
뭔 놈의 스트레스를 그렇게 받는지 원모 머리가 하루하루 다르게 더욱 반짝이고 있다.
"원모야!"
안 자고 있었는지 바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네! 대표님."
대답과 함께 일어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렸다.
자고 있었다.
역시 오랜 눈칫밥 덕인지 자면서도 귀는 열어놓고 있는 경지에 오른 거다.
"아니다. 그냥 더 자라."
"안 잤는데요."
"그럼 주무셨냐? 침이나 닦으면서 거짓말을 하든지."
히죽거리며 침 묻은 뺨을 닦았다.
"춘곤증 때문에 저도 모르게 깜빡 졸았나 봅니다."
"지금 겨울이다."
저놈은 춘곤증의 '춘'자가 '봄춘'자인 걸 모르는 게 확실하다.
"히터를 틀어놔서 잠깐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앞으로 말 편하게 하라고."
"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제부터 말 편하게 하라고 임마."
"아 네."
원모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침을 꼴딱 삼켰다.
뭔가라도 다짐한 듯 어렵게 입을 뗐다.
"어이 천태평이! ……이렇게요?"
"야 이 자식아! 누가 야자타임 하재? 그냥 꼬박꼬박 대표님 대표님 하지 말고 호칭 편하게 부르라고. 뭐 그거 있잖아. 조폭 영화에서도 많이 나오고 하는 호칭 그런 거."
쪽팔린 마음에 차마 내 입으로 '형님'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 말했으면 어느 누구라도 알아들었을 거다.
원모 역시 번뜩 생각난 듯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면서 불렀다.
"대부님? ……이렇게요?"
황당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설마 못 알아들었나?
아니면 이놈 역시 형님이라고 부르기엔 뻘쭘했나 분간이 안 되었다.
"뭐야 내가 알파치노(영화 대부의 주인공)냐? 아니다. 됐다. 우리가 무슨 마피아냐?"
그냥 포기하자.
엎드려 절받기도 아니고.
설사 호칭을 바꾼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오히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보여주자.
그럼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될 것이니.
"네 대표님. 전 이게 젤 편한데요. 자연스럽기도 하고."
"그래. 편한 대로 맘대로 불러라."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또 건환이다.
이 자식, 아까는 튕기더니 밥때 되니까 갑자기 한우가 땡겼나 보다.
"여보세요! 형님도 아닌 천대표님 전화 받았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 한우 먹자고?"
"네? 맨날 먹는 한우가 뭐가 좋다고요.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전화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뭐라고? 맨날 먹는다고? 한우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특이사항이 있다니깐요."
"야! 한우를 맨날 먹는다는 게 중요하지, 딴 게 뭐이 중헌디?"
"전화 끊을까요?"
"아니야. 빨리 말해. 결론부터. 아니 결론만."
"방금 복도에서 최동욱차장님 통화하시는 걸 얼핏 들었는데요. 오늘 저녁때 안가에서 누구를 만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야! 그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야 얘기해?"
"네? 방금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대표님께서 한우가 중요하다고."
가만 생각해보니 건환이 말이 맞았다.
괜히 성급하게 지레짐작해서 윽박지른 건 바로 나였다.
이래서 건환이한텐 난 대표님이고 최동욱은 형님인가보다.
"알았어. 고마워. 끊어. 아까처럼 먼저 끊지 그래."
"하여간 대표님. 혹시 아까 제가 먼저 전화 끊은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야. 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야."
"넵. 그러면 수고하십시오."
뚜뚜뚜뚜.
이 자식.
정말 또 먼저 끊었다.
그래 후배가 수화기 먼저 내려놓으면 어쩌냐.
그게 뭐라고 꼰대처럼 툴툴거리고 있다니.
참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안가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데 나도 안가에 가야 한다.
거기서 최동욱이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봐야 한다.
안가에서 만난다면 대표이사나 부회장급 정도의 최고위층 사람일 텐데 누구랑 한패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마침 성환 역시 퇴근 준비하려고 가방을 챙기는 중이었다.
"성환아! 오늘 약속 있냐?"
"아니요. 집에 갈 건데."
일단 다행이다.
몰래 들어갈 수도 없고 이놈이랑 같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나랑 밥 먹자."
"뭔 일이지? 무슨 일 있어요? 밥 사라는 것도 아니고 밥 먹자니.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
"네가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지."
"뭔 소리래."
"너희 집에서 밥 먹자고."
"뭐지? 갑자기 왜 이러지?"
"갑자기 김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그러지."
"길바닥에 널린 게 김밥집인데 뭔 천국인지 지옥인지 하는 데나 가시지. 왜 하필이면 우리 집에서."
"거긴 파인애플 김밥 안 팔잖아."
"아하. 그러셨구나. 그 김밥이 드시고 싶으셨던 게야."
오른쪽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
예전 천하제일 재무팀에서 파인애플 김밥 싸 온 날 나랑 원모가 지가 남긴 거 몰래 먹었던 게 떠올랐나 보다.
그래.
차라리 쪽팔린 게 낫다.
괜히 최동욱 얘기라도 꺼냈다간 이놈한테 나의 소머즈 능력이 탄로 날지도 모르니.
* * *
성북동 안가.
몇 번 방문하다 보니 이제는 높다란 담벼락이 제법 친근해져 보이기까지 했다.
성환이 주인행세라도 하듯 말했다.
"몇 번 와봤으니깐 따로 안내 안 해드려도 되겠죠?"
"그전에도 구경은 안 시켜줬거든."
"아, 그럼 투어 먼저 시켜드릴까요?"
가정집 구경을 투어라 칭하다니.
눈에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듯 압도적인 규모를 짐작케 했다.
언젠간 나도 이런 집에서 살게 될 테니 궁금하긴 했지만, 구경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된다.
"아니다. 오늘은 여행 온 거 아니니깐."
"그럼 식당으로 바로 가시죠."
성환은 예전에 조회장과 된장찌개를 먹던 메인 식탁으로 안내했다.
식탁 위에는 형형색색 화려한 접시가 놓아져 있었고 그 위에는 김밥이 꽃잎처럼 가지런히 뉘어져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다행히 식사 준비해주시는 아주머니께서 바뀌지 않으셨나 보다.
그런데 이 시간에 메인 식탁이라니 설마 조인철회장하고 같이 김밥을 먹을 건가?
"회장님은?"
"오늘 저녁 약속 있다고 하시니 식사하고 오실 거예요. 그래서 아주머니께 따로 말씀드린 거죠."
아! 그래서 최동욱이 여기서 보자고 했구나.
오늘 조회장 외부 약속이 있으니 그 일정 끝나면 자연스럽게 운전해서 여기로 올 테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만난다는 거지?
"오늘 또 안가 방문하는 사람은 없어? 회사 임원들이나 다른 누군가?"
"글쎄요. 따로 누가 온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그건 왜 묻죠?"
성환이 미심쩍은 듯 쳐다봤다.
"아니. 김밥이 너무 많아서 혼자 다 못 먹을까 봐 그러지."
"많이 드세요. 많이 드시고 물려야 다신 먹자고 안 조를 거 아녜요."
먹고 죽으라는 건지 얼추 열 줄은 넘어 보였다.
"그런데 넌 왜 안 먹고 있냐?"
"전 저녁엔 김밥 같은 거 안 먹습니다. 제 건 따로 하고 있으니깐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김밥 같은 거라니?
게다가 같은 식탁에서 다른 메뉴를 먹겠다고?
살짝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난 지금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 먹고 있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시 뒤 주방 아주머니께서 그릇을 하나 들고 왔다.
"성환군 시간 됐습니다."
쑥 색깔의 멜라닌 그릇, 딱 봐도 레트로 감성 물씬 풍기는 중국집 배달 그릇이었다.
역시나 그릇 안엔 모락모락 김을 내뿜는 짜장면이 놓여있었다.
그것도 한참은 불어 터진 듯한.
"잘 빠졌네요."
성환은 만족한 듯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젓가락질을 했다.
"뭐야? 배달한 거야?"
"아뇨. 우리 집은 배달 절대 못 해요. 그래도 이 그릇만 있으면 집에서 만들어 먹어도 충분히 분위기 낼 수 있잖아요."
늦게 배운 도둑놈 날 새는지 모른다더니 딱 이놈이 그렇다.
김밥은 한 입 쏙 넣자마자 아삭아삭 탱글탱글한 속 재료들이 서로서로 아우성치듯 나서며 환상의 맛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어도 반 정도를 먹으니 더 이상 물려서 입에 델 수조차 없었다.
정말 오늘 김밥이 인생의 마지막 김밥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도저히 안 되겠다. 아까워서 어떡하지? 싸가도 내일이면 쉴 텐데."
"괜찮아요. 태오 거도 같이한 거니깐 상관없어요."
태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설마 조회장이 어디서 늦둥이라도 데려왔다는 건가?
"누구? 동생이라도 있는 거야?"
"음. 동생이죠. 아까 못 보셨나요?"
"못 봤는데. 누굴 봤다는 거지?"
"아까 셰퍼드 못 보셨구나. 마당에서 지내는데. 우리 태오."
"뭐라고 개새……, 아니 강아지를 말한 거야?"
성환이 정색하고 따지듯이 말했다.
"뭐야? 방금 우리 태오한테 개새 어쩌구 한 겁니까?"
"미안. 난 당연히 사람 이름인 줄 알았는데 놀라서 그만."
"네, 앞으로 말조심하시고. 암튼 나머진 태오 먹이면 되니깐 아까워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이놈이 개새끼다.
개밥이랑 내 밥을 같이 했다고 하다니.
'그래. 불어 터진 짜장은 철수네 똥개 바둑이도 안 먹는다.'
바둑이 밥보다 못한 걸 먹는 성환이보다는 낫다며 정신승리 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내왔다.
천천히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면서 마시는데 성환이가 대놓고 뭐라고 했다.
"대표님 이제 가시죠."
"뭐야? 보통 이럴 땐 살짝 눈치 주고 그러는 거 아냐? 안 가시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가라니. 손님 접대가 이게 뭐야?"
"초대를 받아야 손님이지. 무작정 밥 달라고 들어온 게 손님인가?"
"네가 뭘 모르는구나. 자고로 명망 있고 지체 높은 집안에선 대문 넘으면 무슨 이유인지 불문하고 다 손님 대접했어. 하다못해 도둑놈도 담 넘으면 밤손님이라고 불렀잖아."
성환이 창밖으로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쳐다봤다.
"그럼 대표님이 이 밤에 초대받지도 않고 들어온 손님이니까, 즉 도둑놈이란 얘기네."
억지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논리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놈'자는 좀 빼자."
"밤손님이든 도둑이든. 암튼 다 드셨으면 이제 좀 가시죠."
이놈 자기 도와주려는 건지도 모르고 눈치 없이 계속 가라고 한다.
"차는 다 마시고 가면 안 될까?"
"다 마신 거 아닌가?"
정말 내 찻잔에는 바닥이 드러났다.
"리필해 줘. 한 잔으론 부족해."
"한 잔만 더하시면 바로 가시는 겁니다."
"알았다니깐."
한잔을 천천히 마시면 된다.
대기업 회장이 설마 2차 호프에 3차 노래방까지 갈 것도 아니고 이제 곧 들어올 거다.
그럼 최동욱이 누군가와 만나겠지.
성환이 자식 옆에서 계속 내 찻잔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끈질긴 자식.
원샷 때려버리고 그냥 가버릴까 보다.
누구 좋으라고 내 시간 쪼개가며 이 짓거리를 하는 건데 이 자식 눈치 되게 없다.
그런데 때마침 누가 왔는지 반가운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성환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 회장님 오셨나 봅니다."
"자기 집에 오는데도 벨을 누르시나? 비밀번호 모르셔?"
설마 치매라도 온건가.
희한한 광경에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도착하셨다고 알려주시는 거예요. 나오라는 거죠."
재벌 2세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밥을 먹다 거나 차를 마시다 말고도 아버지가 오면 뛰쳐나가야 하고.
성환이 급하게 문밖으로 나서다 뒤를 쳐다봤다.
"안 오고 뭐 해요?"
"뭐 나?"
"네. 빨랑."
손짓으로 얼른 오라며 다그치자 나도 모르게 신발을 신고 따라나섰다.
문밖 정원으로 나가니 어디서 나왔는지 조윤경까지 나와 있었다.
별채에 산다는 얘긴 들었지만, 집이 얼마나 크면 한집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빠 오셨어요?"
"오셨습니까?"
식사하면서 반주를 많이 곁들였는지 조인철 회장은 자식들의 인사에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아서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조인철 회장을 문까지 부축했던 최동욱 차장은 조용히 인사하고 차고 쪽으로 돌아갔다.
잠깐이지만 세 남매가 한자리에 있는 순간이었다.
누구는 집에 잘 오셨냐며 아버지를 반기는 자식이고,
누구는 그 집까지 아버지를 모셔다드리고는 되돌아가야 하는 운전기사이지만.
게다가 그 운전을 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지도 못했다.
최동욱 차장의 기분이 어떨지 잠깐 생각해봤다.
이제 와서 나름 챙겨준다고는 해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조회장을 원망할 것이다.
조윤경과 조성환을 제쳐서 천하제일 그룹을 차지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성환이 조회장을 부축해서 모시고 들어가는데 조윤경은 별채 쪽으로 가지 않고 차고 쪽으로 가는 거였다.
오늘 최동욱이 만나려는 사람은.
결국 조윤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