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87화 (87/191)

87화 서운함

조인철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천하제일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지배구조 개선에 힘쓰겠다고 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주 일가가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비자금을 빼돌렸다는 폭로기사가 나왔으니.

이는 사회적으로 제법 묵직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큰 이슈였으므로 메이저 언론사들도 일제히 뛰어들었다.

계속되는 추측성 언론 보도가 쏟아지면서 여론은 확인되지도 않은 사항이 마치 기정사실인 양 받아들일 정도까지 되었다.

댓글 창엔 조회장 일가에 대한 욕설과 험담으로 온통 도배되다시피 했다.

더 이상 기사를 쳐다볼 수 없었는지 성환이 노트북 덮개를 덮어버렸다.

"아주 개박살 나는구만."

"정신건강에 해로우니깐 웬만하면 보지 마라."

"어떻게 안 봅니까? 궁금한데. 게다가 재밌는 것도 있고."

"욕이 재밌냐?"

"내 욕인가 뭐? 대부분 누나 욕인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역시 멘탈은 좋다.

"회장님은 뭐라 안 하셔? 어제 가족회의 취소된 이후로 말이야."

"잘 모르겠어요. 누나가 어제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안 갔으니깐요."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말 잘 들었냐? 그럼 오늘 아침에도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고?"

"별말씀 없으시던데요? 그러고 보니깐 이상하네. 어제 회장님께서 그렇게 심각하게 가족회의 하자고 하시더니 누나가 맘대로 취소한 것도 그렇고 회장님께서도 아직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것도 그렇고."

조윤경이 먼저 수를 쓴 것이다.

설마 조인철회장한테 가서 '최동욱이 아빠 혼외자인 거 다 안다. 그리고 최동욱이 자기 수하인 이상현과 짜고 언론사에 거짓 제보한 거다' 뭐 이러진 않았을 거다.

자기 짓이라고 자백한 거나 다름없는 결과가 될 테니.

핑계라도 대고 모함이라고 우겨서 당장의 위기는 넘겼을 거다.

증거라고 딱히 나온 것도 없으니 아마 조회장도 더는 추궁하지 못했을 테고.

그렇다면 일단 부인하겠다는 얘긴데.

정말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오후에 천하제일그룹에서 보도자료가 하나 나왔다.

어제 기사는 언론사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며, 조회장 일가는 그런 불법적인 일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대표이사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연 것이 아니라 홍보실을 통해 보도자료만 배포한 걸로 봐서는 가벼운 가십성 기사로 치부하려는 듯 보였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에서 이런 문제가 터졌을 때의 대응 순서는 이렇다.

일단 부인한다.

그리고 나서 증거가 나오면 그때 회사 차원에서 확인해보겠다고 한다.

증거가 확실할 경우 희생양을 찾아서 단두대에 대신 서게 한다.

최악의 경우 즉, 빼박이라 도저히 희생양을 세울 수 없을 땐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하고 당분간 자숙에 들어간다.

그러다 여론이 잠잠해진 틈을 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나온다.

이번 보도자료를 통해서 일단 부인했으니 시간은 벌어놨겠다, 이제는 물밑에서 치열한 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조회장은 자기 딸이 정말 딴 주머니 찼는지 확인하려 할 테고 조윤경은 좁혀지는 포위망을 요리조리 피하려 할 것이다.

난 그저 옆에서 팔짱 끼고 지켜보고만 있으면 된다.

오후 늦은 시각.

어두운 낯빛의 이상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투명 인간처럼 없는 사람 대하듯 하니 이상현도 눈빛 한번 마주치지 않은 채 자기 방, 탕비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을 꼭 닫고는 조심스럽게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네. 대표님 접니다. 방금 사무실에 복귀했습니다."

대표님이라면 최동욱일 것이다.

"네. 홍콩 페이퍼 컴퍼니는 모두 차명으로 설립했습니다. 홍콩은 관리 대행사에서 차명 서비스가 가능하니깐 서비스 신청할 때의 내부문서 아니면 진짜 주인을 밝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

"아닙니다. 조전무가 직접 사인을 하지 않아서요."

"……."

"문서에는 제가 대신 사인했습니다."

"……."

"네? 그 문서를요? 제가 방법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대강 사이즈 나왔다.

최동욱이 홍콩 페이퍼 컴퍼니의 주인이 조윤경인 것을 까발리려 한 것이다.

조윤경이 비자금을 빼돌려서 해외에 은닉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으니.

그러나 대기업 오너 일가는 어떠한 곳에도 자기의 사인을 남기지 않는다.

하다못해 자기의 은닉자산을 관리하는 데다 철저히 비밀까지 보장된다고 하더라고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세상에 비밀이 없다는 것과 사인을 하는 순간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은 지난 오랜 세월 대기업 총수들이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조회장으로부터 보고 배운 게 있어서 이런 방면으론 치밀했는지 조윤경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최동욱에게 방법은 있다.

먼저 홍콩 관리 대행사의 내부문서를 노출시켜서 이상현이 드러나게 한 다음 이상현이 조윤경의 지시에 따랐다는 걸 증명하면 된다.

아마도 방금 이상현의 마지막 말을 미루어볼 때 최동욱이 이상현에게 그 내부문서를 입수하라고 시켰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화를 끊더니 바로 다른 곳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무님. 이상현입니다. 말씀하신 거 알아봤습니다."

이번엔 조윤경이다.

"……."

"이호창변호사와 함께 엘리스 측과 미팅을 했다는 주변인 진술은 확보했습니다."

"……."

"아닙니다. 녹취록이나 CCTV 등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 발견 못 했습니다."

"……."

"네. 확실한 게 있나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윤경 또한 최동욱이 헷지펀드 측과 한패인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나 보다.

그것만 확보한다면 최동욱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곁에 둘 수 있게 된 혼외자식이 기업사냥꾼과 한패가 돼서 자기가 평생 일군 천하제일을 공격하고 한몫 챙겼다는 사실을 안다면 조회장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

이제 누가 먼저 찾느냐의 싸움이다.

먼저 찾는 쪽이 이긴다.

이상현!

머리도 좋은 새끼.

이중스파이 짓거리를 하면서도 헷갈리지도 않는지 실수 하나 없이 잘 넘나들고 있었다.

두 쪽에 모두 붙어서 재보고 있는 거다.

'이기는 편 내 편' 전략.

그러나 조윤경은 조성환이 내뱉은 말 덕분에 이상현이 최동욱과 한패라는 걸 알게 됐다.

최동욱 또한 이상현이 조윤경에서 자기한테로 완전히 돌아선 게 아니라 중간에서 재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것이다.

결국 이상현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이상현의 통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뭐하십니까? 기도하는 거예요? 하느님 음성이라도 듣는 거야 뭐야?"

성환이 내가 귀 기울이고 있는 포즈가 수상했는지 한마디 했다.

귀신같은 놈.

정말 아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알 거 없어. 남이사 기도를 하든 불경을 읊던 뭔 상관이야."

성환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치켜뜨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제 주시죠."

"뭐? 용돈이라도 줘? 하여간 있는 집 자식이 더하다니깐"

"신용카드."

아뿔싸.

고깃집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받아놓은 카드 내놓으라는 거다.

람지가 방송 스케줄이랑 겹치는 바람에 며칠 미뤘었는데.

"약속 있대서 못 갔는데 며칠만 더 갖고 있으면 안 될까?"

"친구도 없으면서 약속은 무슨 약속? 뭐 자신과의 약속 그런 건가?"

"건환이 만나려고 하는 거지. 최동욱 정보를 캐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그걸 왜 그 비싼 집 가서 하냐구요. 매주 주간 보고받으면 됐지."

"고생하잖아. 천하제일 다닌다고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할 텐데."

"참나. 천하태평도 아니고 천하제일, 그것도 회장 비서실에 있는데 설마 그러겠어요?"

그렇다.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건 바로 우리 천하태평 사람들이다.

천하제일 회장 비서팀은 예산도 없이 그냥 직급별로 한도 얼마짜리 법인카드를 쥐여준다.

사전 승인 같은 것도 없다.

전표를 따로 안 써도 영수증만 내밀면 경리직원들이 다 알아서 처리해준다.

업종이나 목적 같은 건 불문이다.

일반 직원들의 연봉이나 복지 수준이 그저 회사를 때려치지 않을 딱 그 정도 수준이라면,

회장 비서팀 직원들에겐 꿈에서라도 이직 생각이 단 한 번이라도 들지 않도록 알아서 팍팍 챙겨준다.

그만큼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온갖 추잡한 비밀들을 다 주워듣고 했으니 절대 밖에 나가서 떠벌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성환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채 휴대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건환아. 나다."

"네! 형님."

"뭐라고? 형님?"

거친 숨소리를 들으니 통화하려고 급하게 자리를 옮기는 중인 듯했다.

"듣는 사람이 많아서요. 대표님이라고 하기가 좀 그래서요."

"괜찮아. 아무렴 어때. 앞으로도 그냥 편한 대로 불러."

"네. 대표님.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지난번에 람지 시간 안 된다고 해서 못 봤잖아. 오늘은 가능한가? 너희가 좋아하는 강남 한우집인데."

"아, 네. 한우요."

환호성까진 기대하지 않았지만.

대답이 이렇게나 무미건조할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너 고생하는데 챙겨줄라고 하는 거지. 좋지 않아? 안 땡겨? 투플러슨데?"

"고생은 원모님이 더 많이 하실 텐데 원모님이랑 같이 가시죠."

이 자식이 튕기는 건가 아니면 정말 원모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워낙 잘 먹고 다녀서 진짜로 안 당긴다는 말인가.

갑자기 건환이가 지나가는 누구를 봤는지 아주 상냥하고 반가운 말투로 나긋나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형님. 어디 가십니까? ……고생하십시오."

"형님? 너 이 자식 벌써 친한 사람이라도 생겼냐?"

건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네. 최동욱 차장님요. 너무 잘 챙겨주셔서요."

헐.

이 자식이 잘 지켜보라고 했더니 아예 친해져 버렸다.

말투를 보아하니 벌써 형 동생 하면서 사적으로도 밀접한 사이가 된 듯했다.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최동욱 차장? 그 사람 어떤 스타일인데?"

"아주 스마트한데도 친근감 있고 배려심 많고 해서 회사 내에서도 엄청 평이 좋습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한테요."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감시 붙인 놈까지 감동시킬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얘긴데.

"지난번에도 얘기했잖아. 최동욱은 네가 우리가 보냈다는 걸 안다니깐."

"글쎄요. 그래도 별로 달라진 건 못 느끼겠던데요."

지난번에 이상현과 최동욱이 만나는 걸 보고 바로 건환이한테 얘기해줬으나 못 믿는 건지 개의치 않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그런 거 말고 요즘 뭐 이상한 건 없어?"

건환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 입을 뗐다.

"그게……. 이상하다기보다는 요즘 우리 사무실에 찾아오는 사람이 좀 많긴 합니다."

"찾아오다니 누가?"

"계열사 대표랑 임원들 몇몇이요."

"수행비서니깐 뭔가 전달해달라고 하는 거 아닐까?"

"꼭 그런 이유는 아닌 거 같아요. 뭐랄까 네트워킹한다라고 할까 하여간 그런 느낌이 조금 들었습니다."

핵심 임원들을 직접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알아서 찾아온다라니.

뭔가 심상치 않다.

설마!

비서실장에라도 임명하려고 하는 건가?

이제 겨우 차장 나부랭이인데 전무급 자리를?

에이! 말도 안 된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임원인사가 있다.

기자회견으로 조회장이 물러난다고 발표하면서 대대적인 임원 물갈이가 예정되어 있었다.

수행비서니깐 옆에서 말 한마디라도 잘해달라고 부탁하려고 찾아온 것일 거다.

"알았다. 주간보고나 빼먹지 말고 잘 보내. 한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그리고 무슨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전화해라."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뚜뚜뚜뚜.

이 자식이 먼저 끊었다.

뭘까.

화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살짝 서운한 이 느낌은.

그래도 몇 년을 함께한 나한테는 꼬박꼬박 대표님이라고 했는데.

몇 달 겪어보지도 않은 최동욱한테는 친근하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아무리 공과 사를 구분해서 사무실에서는 어느 누구와도 형 동생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운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공과 사의 영역은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인데.

사적인 관계는 자칫 공적인 영역에서 불공평을 가져올 수 있어서 조직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벽을 높게 치기만 하면 인간적으로 다가가기가 어려워 오히려 조직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결국 공정성을 잘 유지하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그 구분을 완화해도 된다는 얘긴데.

최동욱은 그 중간 지점을 잘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최동욱한테 분명 배울 점이 하나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