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배신
이상현이 최동욱과 함께 있다.
그런데 이상현은 천하제일에서 차장으로 같은 직급인 최동욱을 대표라고 칭한다.
그냥 높여서 부르는 호칭일까?
아니면 그들이 속한 단체 같은 데서의 직함이 따로 있다는 건가?
무슨 내막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목소리의 주인이 최동욱인 것만은 확실하다.
두 사람의 만남.
대강 상황이 납득이 갔다.
이상현 이놈은 항상 눈치 살살 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센 놈한테 붙어서 출세하려고 하는 박쥐 같은 놈이니깐.
어쩌면 조윤경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 보니 조윤경이 마치 노예 부리듯 하대하는 게 기분이 상했을 수 있다.
아니면 조윤경을 겪다 보니 싹수가 노란 게 썩은 동아줄이란 걸 깨달았거나 돌아가는 판을 보니 최동욱이 급부상할 거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최동욱은 조윤경이 자기가 조회장의 숨겨놓은 자식이란 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상현이 최동욱에게 줄을 대면서 조윤경이 몰래 유전자 검사했다는 사실을 말했을 거다.
그렇다면 나에 대해서도 말했을 텐데.
어쩐지 자기 어머니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왠지 모르게 안면이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한 그 느낌이 정확했었나 보다.
"이변호사님하고 이차장 두 분은 원래 아는 사이셨나요?"
"네, 법조계에서 몇 번 부딪혔고 훌륭한 선배님으로서 평소에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현의 덕담에 이변호사란 사람도 응대했다.
"저도 여기저기서 똑똑한 친구라고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일 같이해 보니깐 소문이 사실이더군요. 허허."
"두 분께서 이번 일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게나마 노고를 치하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자주 뵙고 의논드릴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곧 큰일 하실 분인데 저희가 영광이죠."
3명이 무슨 작당 모의라도 했단 말인가.
상황을 보아하니 보스는 최동욱이다.
이상현과 이변호사란 사람은 이번에 최동욱을 도와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지금은 그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다.
조만간 큰일을 한다?
정치는 아닐 테니 아마도 천하제일 그룹을 차지한다는 말일 거다.
집어삼킬 계획은 이미 세워놨고 지금은 실행 단계까지 왔을지 모른다.
"이번 기획 건은 이차장이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혹시 이변호사님께도 따로 말씀드릴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헷지펀드 건 말고도 다른 일 하나를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궁금한 마음에 귀를 쫑긋 세우는데 우리방 문이 열리더니 원모가 고개를 쏙 내밀고는 소리쳤다.
"대표님! 안 들어오시고 뭐 하세요?"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게다가 하필이면 목소리까지 커서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상현이 이를 수상하게 여긴 듯.
"잠시만요. 밖에 이상한 소리가 난 거 같습니다."
비상사태다.
재빨리 뛰어가 원모 입을 틀어막고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윽! 뭐 하시는 거예요?"
"닥쳐! 조용해."
가까스로 밀어 넣고 우리 방문을 닫으니 곧바로 5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눈치채지는 못한 듯했다.
성환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물었다.
"근처에 누가 있어요?"
"이상현하고 최동욱이 같이 있는 거 같아."
"네? 그 둘이 왜요?"
생각지도 않은 조합에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몰라. 천하제일에서 둘 다 잘나가니깐 왕래가 있겠지. 암튼 그 둘이 5번 방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뭐지?
내가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걸까?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귀 밝은 거 아니었나? 룸살롱에서도 그렇고 병원에서도 그렇고 맨날 엿들었다면서 오늘은 왜 못 들었데?"
원모를 노려보며 답했다.
"저 자식이 부르지만 않았으면 들었을 텐데. 하필이면 소리 지르는 바람에."
원모는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 고기 다 떨어질까 봐 대표님 더 드시게 하려고 한 건데……."
이 와중에 배려심 있는 척 절묘한 핑계를 댔다.
필요에 의할 때만 멍청한 척할 뿐 저놈은 똑똑한 게 확실하다.
성환은 상관없다는 듯 두 손을 절레절레하며 물었다.
"둘만 있던가요?"
"아니 누구 한 명 더 있는 거 같은데."
성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드시고 나가시죠."
"잉? 나 아직 안 먹었는데?"
"아까 많이 드셨다면서요."
원모를 노려보자 원모는 휴대폰 보는 척 딴청 피웠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안 되잖아요. 이제 복도로 나가서 엿들을 수도 없고."
성환 얘기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기 집안일 때문에 내가 눈앞에 노릇노릇 구워진 한우 맛을 못 보는 건 뭔가 이치에 맞지는 않다만 고기는 다음에 또 먹으면 된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깐.
"그래 오늘은 그냥 간다. 대신 내일 나 여기 다시 올 거니깐 카드 줘봐."
"네?"
"신용카드 주라고."
어서 달라며 손바닥을 들썩들썩 흔들어댔다.
귀찮다는 듯 성환이 지갑을 꺼내 신용카드 한 장을 건넸다.
"네네. 많이 드십시오."
그럴 거다.
내일은 건환이랑 람지까지 데리고 다시 올 테다.
오늘 계산한 것보다 '0'이 하나 더 붙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거다.
식당을 나왔으나 멀리 가진 않았다.
주차장에 세워놓은 성환의 차 안에 들어가서 손님들이 나오는 걸 지켜봤다.
다행히 고급 식당이라 휘황찬란한 차들이 즐비해 성환이 차가 그리 크게 튀지는 않았다.
한 시간 정도가 더 흐르자 최동욱과 다른 한 명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운전기사가 따로 없는 이상현은 일 층에서 헤어졌을 거다.
최동욱을 뒤따르던 중년의 한 남자가 최동욱과 악수를 나누고는 자기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어? 이호창 변호사잖아."
김철수 이사가 한눈에 알아봤다.
정말 얼마 전 헷지펀드 엘리스의 법률대리인으로서 기자회견을 했던 바로 그 이호창 변호사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성환은 뉴스로만 한 번 봤던 사람이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듯.
"지난번 엘리스 측 기자회견 했던 변호사잖아."
"네? 그 사람이라고요? 그 사람이 왜?"
뭔가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엘리스 측과 최동욱이 한 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주 밀접한 관계, 즉 깐부 정도 될 거라는 건 확실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최동욱과 엘리스 측이 밀접한 관계였다면 이번 지분경쟁 해프닝의 최대 수혜자는 최동욱이란 얘긴데.
자금도 충분히 당겼을 거고 조인철 회장까지 일선에서 물러나게 했으니.
게다가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여론 때문에 조성환과 조윤경 두 남매에게 그룹을 승계하는 작업을 당분간 실행할 수도 없게 되었다.
결국 큰 그림을 위해 시간을 벌어놓은 격이 되었다.
"최동욱이 이번 헷지펀드 건을 주도했나 보네."
"네? 설마 최차장이?"
"이상현을 통해서 너희 남매와 회장님께서 어떻게 대응하는지 미리 들었겠지. 그 정보 이용해서 이번에 큰 건 하나 한 거고."
"이차장이 이중스파이고 엘리스가 결국 최동욱 회사라고요?"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익금의 상당 부분은 챙기지 않았을까?"
"6천억의 상당 부분이면 천억 원대까지도 된다는 얘긴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건으로 한몫 단단히 챙겨놨을 거야. 앞으로 쉽지 않겠는데?"
성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듯 어두워졌다.
이제까진 그저 막연한 위협 정도로만 생각했었을 텐데 이렇게 빨리 발톱을 드러낼 거라곤 짐작도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이제?"
"글쎄다. 이제 나도 고민 좀 해야겠는데?"
"네? 무슨 소리죠?"
"너희 남매 나가리될지도 모르잖아. 이상현처럼 다른 줄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나 해서지."
성환이 정색하며 쳐다봤다.
"뭐라고요?"
"에이. 농담이야. 그런데 정말 조심은 해야겠다. 생각보다 최동욱 기세가 커서 정말 너희 남매가 조심해야 할 거 같아."
사실 딱 까놓고 성환의 가정사야 그 집안에서 알아서 하면 되는 거고 나에겐 전 세계 최고 부자이자 경영자가 될 창창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니 거기에 몰두하기만 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조윤경과 이상현에 대한 복수를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성환이는 두 사람의 복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뿐더러 천하태평의 2대 주주이기도 하니 팽개칠 수도 없고 내 미래를 희생하지 않는 수준에서는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 * *
원모가 끼어드는 바람에 엿듣지 못한 기획 건은 며칠 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찌라시 언론을 통해 탐사보도가 나왔다.
기사는 <천하제일 사주 일가 해외 은닉자산>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있었다.
누군가 천하제일 그룹의 자금을 홍콩에 본점을 둔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해외로 빼돌려왔으며 그 홍콩법인을 조인철 회장 가족이 실질적으로 지배한 정황이 있다는 게 기사의 내용이었다.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문맥상으로는 그런 지시를 한 사람이 조윤경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인터넷 기사를 확인한 성환은 여기저기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연신 자기가 아닌데다 기사 내용이 전부 거짓이라고 답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통의 전화는 분위기가 매우 심각했다.
"네. 그럼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대표님. 오늘 저녁에 가족회의 한다고 하네요. 회장님 심기가 여간 불편하신 게 아닌가 본데요?"
"그러시겠지. 아무리 듣보잡 언론사라고 해도 일단 그런 기사가 나왔는데."
"그런데 정말 누나 짓이겠죠? 그런데 언론에서 그걸 어떻게 알았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성환이는 누가 조윤경의 비자금을 운영하는지 모른다.
얼마 전 헷지펀드 사건 때 조윤경이 자기 비자금으로 천하제일 주식을 몽땅 사라고 이상현에게 지시했던 게 떠올랐다.
아마 이상현이 조윤경의 비자금 운영 사실을 최동욱한테 얘기했을 거고 최동욱은 언론사를 통해 이를 터트렸을 거다.
아무리 작은 언론사라고 해도 조회장의 의심을 살 테니 정보력을 총동원하면 결국 밝혀질 텐데.
지난번엔 조윤경이 안치홍에게 뒤집어씌웠다곤 해도 이번 파도는 무사히 넘기지 못할 것이다.
조윤경을 날려버리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이번 일엔 관여하지 않고 철저히 구경꾼 모드로 가야겠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게 말야.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일 수도 있지."
잠시 후.
한동안 잠잠하던 성환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차피 저녁 식사 시간에 보면 되잖아."
"……."
"알았어. 내려갈게."
통화를 끊고는 나를 쳐다봤다.
"대표님. 같이 내려가 보시죠. 지금 지하 주차장에 누나 와있다는데요."
"왜 안 올라오고?"
"글쎄요. 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오늘 가족회의가 안가에서의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르니 똥줄이라도 타나 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환이를 찾아왔을 것이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저 멀리 탱크만 한 크기의 벤 한 대가 서 있었다.
우리가 차 쪽으로 다가가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조윤경은 운전기사를 내보내고 우리를 들어오라고 했다.
차에 오르자마자 성환이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누나 맞는 거지?"
"나는 아냐."
"누나랑 나 둘 중 한 명이라던데 나는 아니니깐 당연히 누나란 얘기잖아."
나름 논리적이다.
"하여간 나 아니라니깐."
조윤경이 나를 표독스럽게 쳐다보고는 물었다.
"천대표. 요즘 회사 주변에서 무슨 이상한 일 없었어?"
오죽 급하면 나한테까지 물어볼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정사정하듯 말해도 귓등으로도 들어주지 않을 텐데 이렇게 강압적으로 물어보니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참았다.
"아니요. 아무 일 없었는데."
너한테는 있어도 안 줄 거다.
그러나 성환이는 뭔가라도 생각난 듯 조윤경을 쳐다봤다.
"맞다. 기사건과는 상관없겠지만 이상한 게 하나 있긴 했어. 이상현차장이 지난주에 최동욱차장하고 식사하더라고. 지난번 그 헷지펀드 법률대리인 맡았던 변호사란 사람하고 같이 말야."
이런!
성환이 입단속을 미처 못했다.
물론 입 닫게 할 만한 마땅한 핑계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정보를 흘릴지는 꿈에도 몰랐다.
"야.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해?"
성환은 호의로 얘기해줬는데 욕먹은 게 억울한 듯 반문했다.
"그게 기사랑 무슨 상관인데?"
"왜 상관이 없어? 그리고. 오늘 가족회의 취소야. 그런 줄 알고 넌 집에 일찍 들어오지 마."
조윤경은 차 밖으로 우리를 밀치듯 몰아냈다.
우리가 내리자 차는 굉음과 함께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조윤경이 이상현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거다.
자기 비자금 정보를 최동욱한테 흘려서 기사가 터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