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85화 (85/191)

85화 통수

한참 늦은 감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거금을 묶여놓을 수는 없는 법.

최고가에서는 많이 떨어졌지만 당장 상승 모멘텀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팔아치워야 한다.

눈물을 머금고 전량 매도주문을 넣자 십 분 만에 모든 거래가 체결되었다.

16억 원을 몰빵해서 주당 18만 원에 매입한 주가는 엘리스의 공시 이후 시장에서 한참 지분경쟁 소문이 돌면서 최고가인 30만 원을 찍으며 한때 보유자산이 27억 원까지 불었었다.

그러나 조회장의 기자회견으로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가 그 이후 엘리스가 장중에 지분을 모두 팔아치우니 폭탄이라도 맞은 듯 큰 폭으로 떨어졌다.

결국 주당 23만 원에 모두 처분하여 20억 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거라도 어디냐.

얼마 안 되는 기간에 20% 넘게 수익 본 것에 만족할 수밖에.

주문을 넣은 원모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수고했어. 아쉽지만 그래도 벌긴 했으니깐 자축이라도 함 해야지."

원모 그새 풀렸는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회식하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하자. 회식. 오랜만에 맛 나는 삼겹살로다가."

원모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고기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4억이나 벌었잖습니까."

"7억이나 까졌거든. 그것도 누구 때문에. 삼겹살도 감지덕지할 것이지."

"아니 어떻게 머리 꼭대기에서 팝니까? 어깨에서 팔면 된 거 아닙니까?"

"그게 어깨냐? 허리춤도 안 되는데."

원모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리가 기시니깐요."

성환도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원모 말에 동의했다.

"원모님 말대로 성공 투자였으니깐 그걸로 만족하고 좋은 거 드시죠."

사실 성환한테는 돈 같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분위기상 맞춘다고 맞장구쳐준 거에 불과하다.

"알았어. 그럼 좋은 삼겹살집으로 가자."

늦은 오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성환이 인터넷 서핑 중에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 좀 보시죠. 그놈들 먹고 튀었다고 기사 떴네. 대표님 말이 맞았나봐요."

성환이가 보여준 기사는 '헷지펀드의 먹튀'란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있었다.

스탁스와 엘리스 두 헷지펀드가 천하제일지주의 주식에 1조 원을 투자해서 몇 달도 안 되어서 세금을 제외하고도 6,0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주식 다량 매집 후 경영권 간섭과 적대적 M&A 위협, 그리고 막대한 차익 실현 후 철수.

이 당시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가 취약한 국내 시장에서 전형적으로 이뤄지던 치졸한 수법이었다.

"그렇지. 애초에 적대적 M&A 시도 자체가 없었어. 경쟁력 있고 성과 잘 내고 있는 우량기업 중에서 주가가 높지 않은 기업을 타겟 삼은 거지.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기업가치 재건이라는 건 명분일 뿐 실제로는 개미들 꼬셔서 주가 띄운 후 비싼 값에 팔고 튀려고 한 거지.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많이 볼 거야."

성환은 감탄은커녕 못미덥다는 듯 혀를 찼다.

"아주 그냥 대학로에 돗자리라도 깔아야겠네. 가만 보면 맨날 앞으로는 이럴 거야 저럴 거야라고 한단 말야."

원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돗자리 깔면 금방 망할 겁니다."

"왜? 내 말이 틀린 적이라도 있었냐?"

"아니요. 문제는 그게 아니라……."

"뭐? 문제? 뭐라고 이 새끼야?"

"거봐요. 말씀을 이렇게 하시는데 누가 돈 내고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하여간 말투가 가장 문제라니까요. 문제."

원모를 노려보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답해줬다.

"알았어. 미안. 다시 말할게. 뭐~라~고 이~색~히~야? 이 정도 말투면 괜찮냐? 만족해?"

"음……."

원모 고개를 푹 숙이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마디 더 하면 갈가리 물어뜯길 거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내가 너무 심했나 싶어 원모에게 살짝 미안해졌다.

천하제일에 있을 때부터 내 비위도 맞춰주고 화풀이도 받아주며 꽤 힘들었을 텐데.

한 번 풀어줄 필요가 있다.

"왜 그래? 농담이야. 농담. 오늘 회식은 네가 좋아하는 소고깃집으로 잡아라."

급 풀렸는지 원모가 초롱초롱하게 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끝이었다.

역시 이놈 말만 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

"뭐 해?"

"네?"

"예약 안 하고 뭐하냐고?"

"아! 아까 예약했습니다."

"삼겹살집 말고 소고깃집으로 바꿔야 할 거 아냐."

"소고깃집으로 했는데요?"

"뭐라고? 아까 내가 삼겹살집 가자고 했었잖아."

원모 난처한 듯 고개를 돌려 성환이 쪽을 쳐다봤다.

"아까 조성환님께서 강남 천상이라는 집으로 예약하라고 하셔서……."

천상이라면 120 그램에 10만 원도 넘는 최고급 한우집이다.

짬밥 찬 임원들도 맘 놓고 다니지 못하는.

감히 이 자식이 내 말을 거역하고 성환이 말을 듣다니.

레임덕도 아니고 이건 노선 확실히 갈아탔다는 얘기다.

아까 잠시 미안해했던 거 취소다.

"이 자식이……."

원모에게 버럭 하려는 순간 성환이가 중재하듯 끼어들었다.

"제가 살게요. 제가 오늘 대접해드리고 싶어서 장소 바꾸라고 했습니다."

눈 녹듯 화가 스르륵하고 풀렸다.

오늘 허리띠 풀고 제대로 한번 먹어봐야겠다. 람지처럼.

"그래? 진작 말하지 그랬어. 원모야. 전화해서 그 집 고기 얼마나 있는지나 물어봐라."

"네? 뭐라고요?"

"못 들었어? 고기 얼마나 있는지 물어보라고!"

원모 황당해했으나, 그래도 내 표정이 농담이 아님을 느꼈는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오늘 6시에 예약한 천하태평인데요. 오늘 고기 얼마나 있습니까?"

"……."

"아니. 천하제일 말고 천하태평이요."

"……."

"네. 천하태평이요. 그리고 세 명 말고 네 명입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내가 물었다.

"뭐란 거야?"

"네. 오늘 꽃등심, 생갈비, 제비추리 등등 웬만한 거 다 있다고 합니다."

"아니, 그거말고 천하제일이라니."

"아. 그거요? 사장님이 천하제일로 잘못 알아들은 거 같습니다."

"천하제일로?"

"네. 오늘 천하제일 이름으로 세 명 예약한 거 같더라고요."

"누구지?"

"모르죠. 그리고 천하제일이 꼭 그 회사 이름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원모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직감상 바로 그 천하제일이 맞을 거다.

그렇게 비싼 집을 예약할 수 있는 사람이 그룹 내에선 많지 않을 테니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은데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원모가 뒤돌아 탕비실 쪽을 힐끔힐끔 봤다.

"대표님. 이차장한테도 얘기해볼까요?"

설마.

원모가 이상현한테도 같이 회식 갈 건지 물어보자고 한 것이다.

정말 자기 부사수라도 된 것마냥 챙기려고 했는지.

마침 사무실 안팎을 들락날락하며 어슬렁거리던 이상현이 갑자기 전화 받는 척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마치 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네 전무님. 전화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뭔가 비밀 얘기라도 하는 양 탕비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

평상시에는 조용히 얘기하는 척하며 살짝 들어가더니 오늘은 평상시와는 사뭇 달랐다.

귀를 쫑긋 기울이자 통화 소리가 들렸다.

치밀한 놈.

문을 닫았는데도 설마 들을까 불안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난 들을 수 있다는 걸 모를 거다.

"네. 대표님."

대표님?

전무라고 부르면서 받더니 들어가는 도중 승진이라도 한 듯 갑자기 호칭이 바뀌었다.

"네. 조전무가 지난번 홍콩에 빼놓은 자금으로 몽땅 천하제일 주식 샀었습니다. 고가에 다 팔고 차익 상당히 봤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때 뵙겠습니다."

통화상대방은 조윤경이 아니다.

아까는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 조윤경 전화인 척 쑈한 거였다.

오히려 조윤경의 비자금 투자 등 정보까지 누설하면서 스파이 짓을 하고 있었다.

누굴까?

대표라고 하는 걸 보니 직급은 꽤 높은 사람일 것이다.

오늘 회식이 있어서 저놈 뒤를 밟을 수도 없고 궁금해 미치겠다.

집중해서 귀 기울이고 있으니, 마치 내가 멍때리고 있는 것 같았는지

원모가 눈앞에 손바닥을 펴고는 보이냐고 묻듯이 좌우로 흔들었다.

"대표님! 무슨 생각하십니까?"

"보이거든?"

"네. 이차장한테 같이 가자고 물어보냐구요."

"아니 필요 없어. 약속있대."

"네? 벌써 물어보기라도 하신 겁니까? 방금 전에 사무실 들어왔는데요."

원모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날씨가 좋잖아. 당연히 약속있겠지."

"밖에 비 오는데요?"

"불금이잖아."

"수요일입니다."

"아, 이 자식 말 되게 많네. 꼭 말해야 아냐? 저 자식과는 회식은커녕 절대 차 한잔도 같이 안 할 거니깐 앞으론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 떨지 말라고!"

원모는 남 챙기려다 괜히 욕만 먹은 게 억울한 듯 울상을 지어 보였다.

"미안! 너도 알다시피 내가 비 오는 금요일에 좀 예민하잖아."

"수요일이라니깐요."

눈을 부라리듯 치켜떴다.

"죄송합니다. 수요일이나 금요일이나 마찬가지죠. 평일인데요."

* * *

회사가 강남에 있는 장점 중 하나는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게 편하다는 거다.

어차피 약속 대부분은 강남에 있으니 웬만하면 다들 걸어서 가도 될 정도다.

강남 한우집 <천상>

전부 단독 룸인데다 방음도 잘 되어 있어서 은밀한 얘기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지하 주차장에 내리면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 보는 눈 없이 조용히 다녀갈 수 있는 곳이다.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장님이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예약하셨나요?"

"아, 네."

대답하려는 원모를 막아 세우고는 내가 답했다.

"네. 천하제일입니다."

사장님이 장부 같은 걸 넘기면서 예약장소를 찾았다.

"네. 천하제일이요. 5번 방입니다."

종업원을 불러 안내하라고 시키려고 하는 찰라.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수인 척 답했다.

"아 잠깐만요. 제가 방금 천하제일이라고 했나요? 천하제일 아니고 천하태평입니다. 자꾸 우리 회사 이름을 헷갈리네요. 그리고 참 신기하네요. 마침 오늘 비슷한 이름으로 예약이 있나 보네요."

사장님 인심 좋게 웃으며 답했다.

"아. 네 그러게요. 천하태평 8번 방입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알아냈다.

천하제일 3명 5번 방 예약.

단 10분도 걸을 수 없다던 성환은 차가 막혔는지 30분도 더 지나서야 도착했다.

외근 다녀왔던 김철수이사도 마침 성환과 함께 들어왔다.

늦는 건 본인들 사정이고 원모와 난 먼저 시작했다.

사실 온 신경을 5번 방에 기울이고 있어서 고기 한 점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나 혼자 2인분을 클리어한 원모는 배가 아직 안 찼는지 메뉴판을 넘기고 있었다.

마침 안내받아 룸에 들어온 성환은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너무 하신 거 아냐? 한턱 쏜다고 한 사람은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작하기 있는 건가?"

"쏘는 건 쏘는 거고 먹는 건 먹는 거지."

원모 갑자기 들고 있던 메뉴판을 내 손에 쥐여줬다.

"조성환님 말씀이 맞지 말입니다. 조금 기다려도 될 텐데 대표님께서 굳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요. 메뉴판 여깄습니다. 시키실 거 있으면 더 시키시죠. 대표님."

개새끼.

고기는 혼자 다 처먹더니 이런 식으로 빠져나갔다.

그래, 실컷 처먹어라.

내가 사는 것도 아닌데.

이제 막 두 번째 판의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갈 때쯤, 5번 방에서 몇몇 사람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우리 방과 5번 방은 거리도 있을뿐더러 그사이에 있는 방 소리와도 보이스가 겹쳐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먹고들 있어. 난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원모 자식은 걱정하는 척하며 성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대표님 아까 많이 드시더니 배가 좀 아프신가 보네요."

날카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똥 아니거든! 처먹긴 지가 다 처먹고."

그게 들리냐는 듯 황당하게 쳐다보는 원모.

푹 고개를 숙였다.

복도로 나가니 5번 방의 소리가 한결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이차장 왔어? 여기 앉아. 이변호사님도 어서 앉으시죠."

이차장이란 사람은 이상현이었다.

아까 사무실에서 이상현이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저녁때 보자고 했던 장소가 바로 여기 이 식당이었다.

그리고 그때 통화하던 상대방, 방금 이상현이 대표라고 부른 사람은 목소리를 들어보니 누군지 딱 알 것 같았다.

바로 최동욱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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