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84화 (84/191)

84화 한 수

세상 단촐한 밥상이었지만 맛은 정말 최고였다.

엄마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물 맑고 공기 좋은 강원도산 재료로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와는 차원이 달랐다.

된장찌개 국물에는 각종 채소가 우러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고향의 맛 다시다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어 달큰하니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부자는 하루 세끼 산해진미를 맛보기 위해 부자가 된 것은 아닐 거다.

아마 조회장은 돈 버는 게 그저 재미있어서 그토록 열심히 벌어 놓은 게 아닐까 싶었다.

화투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TV 드라마에서 보던 재벌가의 밥상머리와는 다르게 식탁 위에선 밥 먹는 동안 한마디도 오가질 않았다.

성환이도 그렇고 조윤경 또한 말없이 그저 숟가락질만 할 뿐이었다.

회귀 전 같았으면 회장님과의 식사 시간이라 하면 긴장감에 숟가락 한 번 제대로 못 들었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찌개 그릇에 남아있던 국물 한 방울까지 쩝쩝거리며 클리어했다.

성환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읊조렸다.

"아주 그냥 핥아먹네, 핥아먹어. 그릇 빵구나겠어요."

"아주머니 고생하시는데 설거지 조금은 도와드려야 할 거 아냐?"

"네네. 어련하시겠어. 세상 혼자 착한 척은."

식사를 모두 마치고 차를 내오자 드디어 조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성환이한테 첫 번째 기자회견이 거짓이라고 말했다고 들었네. 거짓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엘리스 측에서 장기보유 목적으로 천하제일에 투자했다고 발표한 첫 번째 기자회견을 말한 것이다.

성환이가 그날 저녁 가족회의에서 내 의견을 말했었나 보다.

"정말 단순한 투자목적이라고 한다면 주가가 오르는 걸 즐기지, 그런 식으로 막진 않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아직 목표 수량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주가가 오르다 보니 급하게 막은 거라고 봤습니다."

"시장을 진정시켜놓고 조금이라도 더 낮은 가격에서 추가 매입할 의도였다는 말인가?"

"네. 광땡(섯다에서 무조건 이기는 최고 필승 패) 들고도 한끗(가장 낮은 패) 들고 있는 것처럼 엄살 핀 거죠."

조회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는 것을 보니 화투로 고스톱뿐만 아니라 섯다까지 치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기자회견은 왜 그런 거지?"

보유지분 가지고 경영진 교체 등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발표를 말한 거다.

"뻥카라고 생각합니다."

"뻥카라니?"

"아홉끗(끗 중에서는 가장 높으나 땡보다는 낮음. 전체적으로 비교적 좋은 패임)정도 들고 있으면서 광땡 들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는 말이죠."

"자네 말은 결국 그놈들이 목표 수량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건가?"

"네. 시장에서는 첫 번째 기자회견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죠. 그래서 폭등까진 아니더라도 주가는 계속해서 올랐고 헷지펀드 입장에서도 이렇게 비싼 대기업 주식을 맘껏 매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겁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회사도 아닌데요."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가만히 있으면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질 테니 그냥 기다리면 되겠는가?"

조회장의 말대로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조회장 일가나 천하제일 그룹으로서는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놔둔다면 지분경쟁을 벌이는지 알고 주식은 가파르게 오를 거고 그 주식을 잡고자 여기저기서 개미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들 것이다.

결국 나중에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주가는 이미 회복 불가한 수준까지 떨어져 있을 테고 수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반대로 헷지펀드에게 이익이 되어 그들의 배 속을 가득 채워 줄 것이다.

그렇다면 손해를 입게 될 많은 소액 주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 욕은 전부 천하제일 그룹과 조회장이 뒤집어쓰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조회장의 그릇을 한번 재봐야겠다.

"네 회장님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면 회장님께선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조회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만있을 순 없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질 텐데 새우 생각도 해야지."

조회장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새우의 생명보다는 고래의 명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나 몰라라 하는 스타일까지는 아니었다.

역시 재벌 회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만약 자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나?"

이번엔 반대로 조회장이 나를 테스트하는 거다.

"소액주주들을 잡으셔야죠.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겁니다."

"어떻게 말인가?"

"회장님. 고스톱에서 비풍초똥팔삼이라고 아십니까?"

'비풍초똥팔삼.'

고스톱에서 바닥에 깔린 패와 손에 쥐고 있는 패가 하나도 맞지 않을 때 버리는 패의 순서(비를 가장 먼저 버림)를 일컫는 말이다.

"알다마다. 패 버리는 순서를 말하는 거지."

조회장 역시 정확히 알고 있다.

"네. 맞습니다. 비단 고스톱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가리키는 거죠."

인생 경험이 수십 년이나 많은 사람에게 인생을 논한다는 게 꽤 머쓱하긴 했지만, 고스톱 경력은 내가 훨씬 길다.

심지어 가훈마저 '못 먹어도 고'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은 내가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다. 즉 '비'를 버려라라는 말이지?"

"네. 헷지펀드의 주장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재벌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받아온 지배구조 개선을 에둘러서 말했다.

조회장은 대답 없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성환이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았다.

"대표님. 오늘 회장님께서 기자회견 여신다고 합니다."

"그래? 어떤 내용으로 하신다는데?"

"글쎄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런데 어제 대표님 가시고 나서도 한동안 식탁에 앉아 계시더라고요."

꼭 내가 뭔가를 내려놓아라 라고 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생각한 바와 비슷한 의견을 냈으니 꽤 고민이 됐던 모양이다.

기자회견까지 할 정도면 중대 발표를 하겠다는 건데.

아무래도 무엇을 내려놓을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헷지펀드의 기자회견 이후 사회적 관심을 독차지한 이슈였기 때문에 오후에 조회장의 기자회견이 열린다는 소식이 속보 기사로 뜰 정도였다.

예정된 기자회견 시간이 되었다.

성환은 보는 눈이 많으니 직접 회견장에 참석하지는 못하겠고 또 무슨 발표를 하는지는 빨리 알아야겠고 해서 김철수이사에게 현장에 다녀오라고 부탁했다.

부탁이라기보단 지시에 가깝긴 했지만.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김철수이사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회견장은 몰려드는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바람에 안에 들어서지 못한 기자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모두가 조인철 회장의 입에 주목하고 있었다.

조인철 회장 단상에 올라 90도로 머리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준비한 발표문을 꺼내 읽어내려갔다.

"저는 오늘부로 천하제일그룹의 회장 등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자 합니다. 지주사는 물론 어떤 계열사에서도 등기이사에서 물러남으로써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고자 하며,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강화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에 힘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천하제일 그룹은 대주주는 물론이고 국민연금을 포함한 국내외 주요 기관투자자들의 안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투기 세력의 경영권 침탈 야욕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조회장의 깜짝 사퇴 발표에 놀란 듯 여기저기에서 고함과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주요 일간지 헤드라인은 물론 공중파 9시 뉴스에서도 첫 번째로 방영되었으며 조회장이 낭독한 발표문 전문까지 실릴 정도였다.

성환은 생각지도 못한 사퇴 발표에 불안했는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럼 아예 그룹에서 손 떼시겠다는 건가? 그럼 나는 못 돌아간다는 거고?"

"그게 아니지. 내가 행간을 읽으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헹가렌지 뭔지 도대체 그게 뭐나고요?"

"회장 직함이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다는 거잖아. 감투를 쓰지 않겠다고."

"그게 손 떼겠다는 거 아닌가?"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셨어. 직함은 내려놓더라도 지분은 그대로이고 그 대주주의 권한으로 전문경영인을 선임해 대표이사에 임명할 수 있지. 결국 간접적으로는 여전히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야."

고스톱으로 말하면 광박, 피막은 면하고자 광이나 쌍피 하나 정도는 들고 가려고 키핑해놓은 것과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해야 할까.

성환은 절벽 끝에서 희망의 꽃이 피어나기라도 하듯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전문경영인으로 나를 세우면 되겠네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다.

그러나 표정은 사뭇 진지한 게 설마 진심으로 한 소린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장난하냐? 아랫돌 빼서 위에 놓는 건데 그게 말이 되냐?"

성환 얼굴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그건 그렇죠. 그럼 누가 대표이사가 된다는 거지? 당연히 누나는 아니겠죠?"

"당연히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서 회장님께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세우시겠지. 말도 잘 듣는 사람들 중에서."

"그러니깐 그게 누구냐고요?"

나도 그렇고 성환이도 쉽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회장의 복심이자 실세였던 우전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안치홍과 함께 나가리된 마당에 지금은 독보적인 2 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회장의 기자회견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우상향 곡선을 그리던 천하제일지주의 주가도 브레이크를 밟은 듯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조회장의 용퇴는 재벌가에서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희생정신으로까지 비쳐질 정도였다.

물론 주로 정기적으로 천하제일그룹에서 광고를 실어주던 언론사를 통해서였으나 여러 언론들로부터 확대 재생산되며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 *

일주일 뒤.

성환이 인터넷을 뒤지다가 갑자기 놀란 듯 나를 불렀다.

"대표님! 봤어요?"

"보다니. 뭘?"

"엘리슨지 뭔지, 게네들 천하제일 주식 다 팔았다고 공시했다네요. 결국 엄포만 놓고 제대로 붙어볼 생각도 안 하고 내뺐네요. 하하"

성환이 싸움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해져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넌 설마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졌나요? 도망은 게네들이 쳤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

"뭔 소리래?"

"헷지펀드의 목적이 뭐야? 설마 천하제일그룹의 지배구조를 개선하자는 게 목적이었겠어?"

"당연히 아니죠. 돈 버는 게 목적아니겠습니까?"

"게네들이 돈을 벌었을까 못 벌었을까?"

"벌었겠죠. 매입가보단 상당히 올랐을 때 팔았을 테니깐요."

"그럼 게네들은 일단 목적은 달성한 거란 얘기잖아."

성환은 듣고 보니 내 얘기가 맞는 거 같아 더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회장님께서 결단해주신 덕분에 이 정도에서 막을 수 있었지. 하마터면 게네들이 천문학적인 이익 가져갈 수도 있는걸 막아준 거잖아. 그래서 그자들 입장에서 절반의 성공이라고 한 거야."

성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대표님. 역시 헷지펀드 나갔다니깐 주가가 그냥 꼬라박는데요."

"당연히 호재가 사라졌으니깐 그럴 수밖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주식 당연히 다 팔았겠죠?"

헉!

성환이 집안일에 신경 쓰느라고 정작 중요한 우리의 투자금을 생각하지 못했다.

천하제일주식에 몰빵한 법인자금 16억 원을 잊고 있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에이 설마.

옆에서 주워듣고 있던 원모가 분명히 알아서 팔았을 거다.

원모를 불렀다.

"원모야!"

"네."

힘없이 답하는 원모.

불길하다.

조마조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원모야. 천하제일 주식 다 팔았지? 그렇지?"

제발 팔았다고 대답해라.

제발!!

"네? 아. 아니요."

"이런 씨……. 뭐라고?"

"안 팔았지 말입니다."

"아니 왜? 너 분위기 파악 못 해? 요즘 어떤 분위기였는지 옆에서 보고도 몰라?"

"대표님이 그전에 저보고 알아서 혼자 하지 말고 지시받거나 승인받아서 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업무분장이 원칙이라면서요."

융통성 없는 새끼.

원모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곧이곧대로 말을 잘 듣는다.

그래 사실 원모는 잘못이 없다.

탓은 원모가 아닌 나한테 해야지.

결국 내 꾀에 내가 걸려 넘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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