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재벌가
천하제일지주 주식의 상한가는 하루 만에 멈추긴 했으나, 주가는 여전히 상승 흐름을 보였다.
성환은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듯 사무실을 배회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괜히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게 사람들을 여간 부담스럽게 하는 게 아니었다.
원모도 그렇고 김철수이사도 성환이 눈치만 살살 살피고 있었다.
"야 성환아. 그만 좀 앉아 있지 그래. 주가도 크게 뛰지 않는 거 보니깐 별거 아닌 걸 수도 있잖아."
"아니야. 뭔가 있는 게 분명해요."
"아직 추가매입 공시 같은 건 안 떴잖아."
"그렇긴 한데 회장님이 요즘 매일 나가세요. 원래 외출도 잘 안 하시는 분이 요즘 들어서 매일 저녁마다 약속 있으신 게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누구 만나시는지는 알고?"
"공무원도 있는 거 같고 주로 연기금이랑 금융기관 사람들 만나신다는데요."
조회장이 직접 나설 정도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분명하다.
아무래도 정말 지분경쟁이라도 시작된다면 당장 추가 매입할 수 있는 총알이 없으니 우호 주주를 섭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것일 거다.
잠시 후.
김철수이사 어디와 통화를 하더니 급하게 우릴 찾았다.
"천대표. 오늘 오후에 기자회견 한다는 소식이야."
"네? 어디가요?"
"엘리스라고 지난주에 천하제일지주 주식 매입했다는 헷지펀드 있잖아."
헷지펀드의 기자회견이라.
일단 나쁜 뉴스다.
이 시절에는 코스피 지수가 1500 정도 박스권에 갇혀 있었는 데다 시장 규모가 워낙 작아 여러 헷지펀드들이 분탕질을 해대던 시기로 국내 주식시장은 외국계 헷지펀드들의 놀이터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였다.
기자회견 장소와 일정은 잡혔으나 워낙 극비였는지 내용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천하제일그룹과의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온갖 언론매체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거의 실시간 중계라도 하듯 오후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속보로 뉴스가 쏟아졌다.
기자회견장에는 엘리스의 대표가 아닌 국내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에스의 이호창 변호사가 나섰다.
이호창!
회귀 전에는 기업사냥꾼들 자문을 전담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꽤 받았던 인물이다.
이호창 변호사를 보니 엘리스의 이름이 기억에서 떠올랐다.
어쩐지 이름이 낯설지 않더라니, 회귀 전 국내 Top 5 재벌인 삼화와 경영권 분쟁을 일으켜 떼돈 벌고 먹튀한 헷지펀드의 이름이었다.
그 당시 이호창 변호사가 법률 자문을 맡아서 외국계 사기꾼의 앞잡이라며 욕을 많이 먹었는데 그때 그 헷지펀드가 바로 엘리스였다.
본 게임 하기 전에 승산 있는 게임인지 확인도 할 겸 연습해보는 상대를 스파링 상대라고 한다.
몇 년 뒤 일어날 삼화와의 경영권 분쟁이 본 게임이고, 그 전에 연습 삼아 해보는 스파링 상대가 지금의 천하제일그룹이다.
회귀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기자회견장에 등장한 이호창 변호사는 품에서 미리 준비된 문서를 꺼내고 읽어내려갔다.
"우리는 천하제일의 오너와 경영진을 신뢰하고 있으며 적대적 인수합병을 노리는 세력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여 투자수익을 회수하려는 포트폴리오 투자가입니다. 소액 투자자로서 대주주 및 경영진들과 건설적 대화를 통해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도록 주주의 책임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장문 발표와 함께 어떠한 질문도 받지 않고 퇴장해버렸다.
본색을 감추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안도하게끔 하는 전형적인 기만전술이다.
옆에서 같이 뉴스를 지켜보던 성환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일단은 다행이네요."
"뭐가 저게 다행이야? 넌 도대체 저 뉴스를 어떻게 들은 거냐?"
성환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긴요. 말 그대로지. 대표님은 못 알아들으셨어요?"
옆에 가만히 있던 원모까지 역성을 들었다.
물론 내가 못 듣게 하려는 듯 성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분 이해력이 조금 부족해지신 거 같습니다."
"저분 다 들린다."
화들짝 놀란 원모가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성환은 자세를 고쳐잡고 말했다.
"물론 저들 얘기를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 추가로 더 매입했다는 공시도 없는데,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
"맨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주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거 아냐?"
"그게 어때서요? 의례 하는 말 늘어놓은 거 아닌가?"
"아니지. 건설적 대화가 안 통하면 실력행사 하겠다고 선전포고 한 거잖아."
"대표님은 그 말이 그렇게 들려요?"
"넌 그렇게 안 들리냐?"
성환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행간을 읽어야 해. 그냥 투자자면 기자회견을 하겠냐고?"
성환은 한참을 고민하는 듯했다.
"아무튼 오늘 저녁에 가족회의 한다고 했으니깐 회장님과도 얘기해볼게요."
"그래. 회장님도 마냥 안심하고 계시진 않을 거야."
천하제일그룹을 재계 Top 20 안에 올려놓은 사람인데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닐 거다.
* * *
다음 날.
성환이 출근하자마자 가족회의 결과를 공유해주었다.
"회장님도 대표님 의견과 같던데요."
"조윤경은?"
"처음엔 어제 저처럼 얘기하더라고요. 일단 드러난 건 없으니 기다려보자고. 그래도 회장님이 워낙 확신하시니깐 나중에는 조금 알아듣는 눈치더라고요."
대화 중 뒤통수가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상현이 딴짓하는 척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염탐꾼이 있었다는 걸 까먹었다.
성환이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다물었다.
빨리 저 자식을 보내버리든지 해야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잠시 후.
이상현의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총총걸음으로 탕비실로 들어갔다.
자기가 엿듣고 싶을 땐 밖으로 나오면 되고 자기 중요한 얘기할 땐 들어가서 문 닫아버리면 되니 이상현한테는 탕비실이 최적의 장소다.
어쩐지 반대 안 한다 했더라니.
그러나 이상현도 이건 모를 거다.
나는 다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네. 전무님!"
역시 조윤경이었다.
"별일은 없습니다. 그냥 어제 안가에서 있었던 일 얘기하는 거 같습니다."
"……."
"네?"
"……."
"네. 그거면 지금 스위스 계좌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
"네? 천하제일 주식을 사라고요?"
"……."
"알겠습니다."
나쁜 놈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위기 때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조윤경.
역시 자기만 아는 사람이 맞다.
엘리스가 그냥 투자목적이 아니라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하니 다시 주가가 크게 오를 거라고 판단한 거다.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는.
어차피 조회장의 지분율이 높을뿐더러 우호 주주 확보에도 큰 어려움은 없을 거 같으니 위기를 넘길 거라고 생각한 거다.
대신 기회에 한몫 잡아보려고 수를 쓴 거다.
그렇지만 무슨 돈이 있어서?
예전에 안치홍과 함께 조회장 비자금 빼돌린 걸 쓰려는 거다.
계좌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안치홍이 천하제일에서 나간 뒤 그 자금을 이상현이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변호사이다 보니 법에 빠삭해서 그랬을 거다.
* * *
며칠 뒤.
걱정은 현실이 됐다.
엘리스 측 법률대리인인 이호창 변호사가 다시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입장하는 표정부터 종전 기자회견과는 확연히 달랐으며 멘트 역시 강렬했다.
"저희는 천하제일지주의 주주인 스탁스와 연대하기로 하였습니다. 천하제일 그룹의 경우 소수에 집중된 지배구조로 부진한 계열사 등을 부당하게 지원하고 있다고 판단한 바 지배구조 개편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부실 계열사 지원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스탁스를 포함한 다른 투자자들과 협력하여 경영진을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입니다."
사실상 자기들보다 먼저 투자한 스탁스와 한통속이라고 고백한 거다.
12%의 지분으로 혹은 숨겨진 지분까지 더해서 실력행사를 하겠다고 선전포고했다.
기자회견이 끝남과 동시에 천하제일 주가는 10% 이상 크게 상승했다.
시장에서는 지분경쟁이 시작되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급변한 것이다.
성환은 어깨를 잔뜩 늘어뜨린 채 사무실로 힘없이 걸어들어왔다.
"대표님 말이 맞았네요."
"예정된 수순이었지. 말 자체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왜 그런 말을 하느냐.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냐이지."
"네네. 한 수 배웠습니다. 그건 그렇고 회장님께서 보자고 하시는데요. 오늘 저녁같이 하자고요."
역시 재벌 스타일.
언제가 편한지 이따위는 묻지도 않고 그저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상대에게 통보한다.
"잠깐 스케줄 좀 보고."
수첩을 뒤지는데 성환이 혀를 찼다.
"뭐야? 약속은커녕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저녁은 6시에 드시니깐 같이 나가죠."
수첩을 덮어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알았어."
그래. 대기업 회장과의 식사 약속을 튕길 순 없지.
만들고 싶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자리다.
회귀 전 비자금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을 때도 안가는커녕 구내식당에서조차 마주 앉아 식사 한 번을 한 적이 없었다.
대기업을 일군 회장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혹시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파인애플 들어간 김밥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온갖 진귀한 요리가 가득할 텐데 겨우 김밥을 떠올리다니.
"그냥 아무거나. 평상시 회장님 드시는 대로 같이하지 뭐."
청정바다의 싱싱한 해산물부터 비옥한 땅에서 자란 농산물, 제철 맞은 산해진미가 가득한 한 상을 떠올렸다.
오늘 점심은 굶는다.
저녁을 위해.
* * *
성북동 안가.
지난번 조윤경이 회유하려고 부른 이후 오랜만에 방문했다.
산꼭대기에 자리한 안가는 밖에서 보기엔 성벽처럼 높은 담장이 가로막고 있어 방문객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지만 일단 안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어스름한 저녁 산 쪽 방향 야트막한 담벼락 위로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워져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다시 한번 닭장 같은 아파트 말고 이런 데서 살아야겠다 다짐해봤다.
성환이 응접실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 앉으시죠. 아직 10분 전이니깐 조금 있으면 회장님 내려오실 겁니다."
"그래. 우리가 일찍 온 거니깐."
건성으로 답하고는 주방 쪽을 힐끗 쳐다봤다.
아직 음식 준비가 다 안 된 듯 식탁 위가 휑했다.
정확히 6시가 되자.
조윤경이 조회장을 모시고 2층에서 내려왔다.
"내려오셨네요. 가시죠."
쇼파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했다.
조회장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만.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네. 기억하시네요."
"기억하지. 자네 덕분에 곳간 빼먹는 도둑놈 잡았는데. 지난번엔 고마웠네."
중식당에서 안치홍과 우전무 얘기해준 걸 말한 거다.
조회장이 전남편 안치홍이 떠오른 듯 조윤경 쪽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이에 조윤경은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우선 식사나 하자고."
조회장이 식탁에 앉으라고 권했다.
중세유럽 배경의 영화에서나 볼법한 길고 화려한 식탁까진 아닐지라도 멋스러운 대리석 식탁쯤은 될 줄 알았지만, 전혀 딴판이었다.
족히 삼십 년은 넘었을 법한 빛바랜 식탁에다 의자는 한번 앉으니 앞뒤로 심하게 흔들리며 삐그덕 거리는 소리까지 났다.
음식만 좋으면 되지 식탁이 뭣이 중하랴.
그러나 식탁 위에는 아직 제대로 음식이 차려지지 않은 듯 밥과 함께 샐러드와 나물 같은 풀때기만 가득했다.
조회장이 수저를 들고는 식사를 시작하자 성환이 속삭였다.
"어서 드세요. 구경만 하십니까?"
"아직 음식이 안 나온 거 같은데?"
"네? 다 나왔는데? 아!"
뭔가 생각이라도 났는지 성환이 가사도우미를 불렀다.
"아주머니. 그거 주세요."
도우미분 분주하게 준비하는 거 같더니 뭔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두부가 펄떡거리는 듯 팔팔 끓고 있는 된장찌개였다.
어제도 먹었고 오늘도 먹을 거며 내일도 먹게 될 된장찌개가 메인이었다.
성환은 이제 만족하냐는 듯 턱짓으로 끄덕했다.
"찌개가 빠졌었네요. 뭐 해요 안 드시고?"
성환이 쪽으로 돌아서 귓속말로 물었다.
"장난하냐? 이게 평상시 식사가 맞아?"
"뭐야? 설마 수라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기업 회장님이 정말 이렇게 드신단 말야?"
"재벌도 하루 세끼 먹는데 어떻게 매일 산해진미를 먹습니까? 먹는 건 다 똑같아요. 밥에 김치에 된장찌개면 된 거 아닌가?"
점심 괜히 굶었다.
차라리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었을 때 파인애플 김밥이라고 대답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