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음모
난 표정과 말투에 온갖 짜증을 듬뿍 담아 이상현에게 아는 척 말을 건넸다.
"뭐냐? 기껏 보낸다는 게 너였냐?"
이상현도 만만치 않은 듯 조소를 한껏 담아 응사했다.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건가?"
"올 만한 곳은 아니지."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보지?"
"그건 앞으로 네가 찾아야 할 텐데. 마님 명이 따로 있었을 테니."
마님이라는 말에 발끈한 듯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이 자식이!"
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너 지금 분위기 파악 못 하나 본데? 너희 마님이 너 오게 되면 맘껏 굴리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하셨거든? 토사구팽이라고 몰라? 이제 네가 버리는 패가 된 걸 아직 모르겠어?"
이간질이 제대로 먹힌 듯했다.
맞는 말을 해서 뜨끔했는지 이상현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언뜻 분노가 스쳐 갔다.
아무래도 이상현은 조윤경이 우리 사무실에 들어가 있으라고 할 때, 분명 곁에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방금 후벼판 말이 쐐기를 박은 것이다.
손가락을 뻗어 탕비실을 가리켰다.
"너희 마님이 특별히 저 자리에 앉히라고 하셨다. 그래도 아랫사람 하나 온다고 김원모상무가 정리 잘해놨으니까 고맙게 생각해. 김상무 밑에서 열심히 일 배우고."
원모를 향해 다그쳤다.
"김상무! 뭐해? 이상현 차장 자리 안내 안 해주고!"
"네? 아, 넵! 알겠습니다."
급격히 밝아진 원모 뒤로 이상현이 부글부글 끓는 듯 눈을 부라렸다.
"이차장. 따라오지 말입니다."
원모는 이상현을 탕비실 쪽으로 안내해서 데리고 들어갔다.
이상현은 직급 가지고 하대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따로 독립된 공간이라서 그런지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원모가 자리 안내 후 문득 물었다.
"설마 혹시 컴퓨터 안 가져오신 거 아닙니까?"
이상현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 놀라서 반문했다.
"뭐? 컴퓨터?"
"헐! 컴퓨터를 안 가져오다니. 이분 이거 전쟁 나갈 때 소총도 빼먹고 갈 분이시구만."
이상현 기분이라도 상했는지 눈을 부릅뜨고 덤비듯 말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나 보다.
"못 들으셨어요? 여긴 자기가 쓸건 다 자기가 알아서 들고 와야 합니다. 내가 팁을 하나 드리자면 지금 당장 천하제일 들어가서 쓸만한 노트북 하나 들고 오시죠."
부글부글하겠지만 받아치기도 뭐 한지 그저 대답 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아 참, 그리고 이거."
원모가 주머니에서 키를 하나 꺼내 이상현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여기 탕비실 관리책임자가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책임자라니?"
"말 그대로 책임자요. 여기 탕비실에 차가 떨어지면 안 되거든요. 특히 대표님은 블랙커피랑 보이차만 드시니까 이 둘이 떨어지면 큰일 나요. 익히 아시겠지만, 성격 아주 지랄맞으시거든요."
설마 이 먼 거리에서 들리겠냐 생각하면서도 불안했는지 내 자리 쪽을 슬쩍 돌아봤다.
그러나 난 다 들린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처럼 생생하게.
원모를 응시한 채, 마치 다 들린다라고 하듯 손가락을 귀 쪽으로 가져갔다.
깜짝 놀란 원모 고개를 숙이고는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여간 눈치 하난 귀신이라니깐. 아무튼 여기 차 같은 거 떨어지지 않게 관리 잘하세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천하제일에 다녀오시면 될 겁니다."
이상현은 어이가 없었는지 귓등으로도 듣는 척하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원모 한마디 덧붙였다.
"차장님. 혹시 천하제일 가셨을 때 노트북 남는 거 하나 더 있으면 가져오시지 말입니다. 제가 아직 데스크톱을 써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상현 표정을 보아하니 갈팡질팡하는 게 느껴졌다.
이놈을 밟아버릴까 하다가도 괜히 조윤경이 보냈는데 분란만 일으키는 거 같을 테고, 그냥 참자니 기분이 상해서 못 견디겠고 했을 거다.
그저 원모를 나가라고 하더니 탕비실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출근 시간이 되고 성환이와 김철수이사도 회사로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이상현이 출근한 걸 알고는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말 잘 듣는 대리급 사원이라도 보내줄지 알았는데, 조윤경의 심복인데다 직급까지 꽤 높은 놈을 보냈기 때문이다.
반갑다며 웃음을 건넬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사 정도는 건넸다.
이 두 사람은 회귀 전 이상현과 나와의 악연을 아는 것은 아니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자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건환이가 보낸 <주간업무보고> 였다.
최동욱 측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듯 평범한 비서실의 일상만이 기재되어 있었다.
메일 끝부분 추신으로 한마디를 적어놓았다.
'평상시 영어로 통화하는 경우는 많지만 요즘 부쩍 늘었음.'
무슨 내용으로 통화한 것까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내용을 못 들었다기보단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였을 것이다.
업무도 그럴뿐더러 최동욱이 유학파 출신이라 영어로 통화할 일이 많았을 텐데 건환이가 까막귀일 줄은 몰랐다.
천하제일엔터에 있었을 때 MJ사원은 물론 에이스 역시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원모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별반 다르진 않았을 테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이상현이 혼자 나갔다.
원모가 이상현을 불러세웠다.
"이차장님 어디 가십니까?"
"내가 밥 먹으러 가는데 너한테 보고까지 해야 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상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장소에서 근무한다고 차마 점심까지 같이할 순 없었을 것이다.
직장인에게 점심은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는 한 끼 식사만을 위한 시간은 아니다.
휴식을 통해 반나절 동안 쌓였던 불필요한 감정들을 추스르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이 소중한 시간을 맘에 맞지 않는 사람 그것도 적과 함께하면서 불필요하게 악감정을 더 쌓을 필요는 없다.
성환이 나를 보고 불안한 듯 물었다.
"어떡하죠? 앞으론 이차장 있을 땐 중요한 말도 못 할 텐데. 그리고 도청한다거나 우리 컴퓨터에서 자료라도 빼갈 수 있으니까 사무실에 CCTV라도 달아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왜 고스톱 머니라도 빼갈까 봐? 뭐 중요한 거라도 있어? 하루종일 화투만 치는 놈이."
"아니 뭐 그거 빼곤 딱히 중요하다고 할거까진 없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잘만 이용하면 역정보를 흘리게 할 수도 있고."
아직 이상현의 능력치를 제대로 몰라서 하는 말이다.
회귀 전에는 나도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리기 전까진 의심 한 번 갖지 못했던 만큼 치밀한 놈이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저놈이 그런 거에 속을 놈도 아니고. 그냥 저놈 앞에서만 조심하자고. 저놈도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거야."
이상현이 나가자 김철수 부장도 안심한 듯 준비한 말을 꺼냈다.
"천대표가 알아보라고 한 거 말인데."
얼마 전 천하제일지주 지분 매입했다고 공시한 투자회사의 뒷배경을 알아봤다는 거다.
"그 회사 누구 건지 알아보셨어요?"
"그냥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소문만 있고 자세히는 알려진 게 없나 봐."
"매입 의도가 뭔 지도요?"
"그것도 그래. 아직 누군가 자기들 소행이라고 나선 데가 없어서 그렇지."
특별히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저절로 알려질 때까지 굳이 일부러 나설 필요가 없었을 거다.
"그럼 다른 소문은요?"
"천하제일 측에서 대관이랑 대언론 작업 시작했나 보더라고."
"홍보실에서요? 소문 축소하려는 거겠죠?"
"맞아. 이건 M&A건이 아니다, 설령 맞다고 하더라도 조회장 지분이 높을뿐더러 우호 주주도 많이 확보해놓았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식으로 언론에 써달라고 하나 봐."
천하제일 측에서는 평상시 쓸데없는 광고비까지 써가면서 언론 관리하던 걸 이제 써먹을 데가 온 것이다.
조회장 입장에서는 주가가 상승하는 게 하나도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경영권 분쟁까지 휘말린다면 자기의 그룹 장악력과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고 비춰질 수도 있으니 애써 의미를 축소시키려 할 것이다.
정말 천하제일 홍보팀의 의도대로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평상시 약칠해놓은 효과를 본 것이다.
경제신문 등 여러 언론사에서는 아직 상대측이 6%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경영권 방어에 무리가 없다는 식으로 보도를 내보냈다.
조회장의 지분율은 물론 주가까지 매우 높은데다 국민연금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이 헷지펀드(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단기 고위험 고수익 상품에 투자하는 펀드)의 손을 들어줄 일이 없을 거라고 보도했다.
언론보도 덕분에 시장은 급격한 안정을 찾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추가 취득에 관한 공시가 나오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며칠도 안 되어 예측이 빗나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 * *
어느 날.
점심시간도 한참 지나 선릉 쪽을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커피 한잔하고 있을 때였다.
"대표님!"
원모가 급하게 나를 찾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정말 급하거나 큰 사건이라도 발생한 것이다.
"뭐야?"
"기사 났습니다. 천하제일 건인데요. 여기 이것 좀 한번 보십시요."
"네가 가져와."
원모가 짐짓 곤란한 듯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잠시 모니터를 들어올리는 척하다가 무거워서 못 들겠다는 듯 털썩 내려놓았다.
노트북 사달라고 시위한 거다.
"에이씨. 내가 졌다. 알았어! 사준다 사줘! 그까짓 노트북."
대단하다.
몇 달 아니 몇 년일지라도 불편한 건 참겠지만, 돈 드는 건 도저히 못 참겠다는 저 불굴의 의지.
그 의지만큼은 본받을 만하다.
원모가 가리킨 쪽에는 방금 속보로 올라온 기사가 열려있었다.
"천하제일지주 지분 매입했다고 또 공시 떴나 봐요."
"뭐라고? 어딘데?"
"이번엔 다른 곳입니다."
지난번 6%를 매입했다는 스탁스가 아닌 엘리스라는 회사가 천하제일지주 주식을 매입했다고 공시한 것이었다.
비록 회사 이름은 달랐지만, 이전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투자회사의 소재지 역시 조세피난처 중 한 곳인 버진아일랜드였으며 미국계 투자회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리스란 이름이 왠지 낯이 익었다.
기억을 되새겨봤지만 잘 떠오르지는 않았다.
"여기도 6% 매입했다고 공시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지분율 역시 6%로 같은데다가 보유목적 역시 단순 보유라고 공시했다.
"이상하긴 하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성환이까지 와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화면만 응시하던 성환이가 불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이거 예전에 내가 얘기한 것처럼 여러 군데서 나눠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군데가 아닐까요?"
"에이 설마?"
"이미 5% 미만으로 여러 군데로 나눠서 가지고 있다가 1%씩 최근에 새로 산 거 아닐까 해서요?"
"뭐라고? 그렇다면 이미 나가린데."
불안한 마음에 걱정만 하고 있던 와중 탕비실 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여기 이자들도 미리 알고 있었던 거 같지는 않습니다. 방금 똑같이 뉴스 보면서 안 거 같은 눈치입니다."
이상현이 조윤경에게 구두보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다 들으라는 식으로 탕비실 문도 활짝 열어 놓은 채 큰 소리로 통화한 것이었다.
우린 정보력도 없는 데다 별것도 아니라고 비웃는 걸 들으라는 듯이.
잠시 후 원모가 크게 놀란 듯 외쳤다.
"이것 좀 보세요. 천하제일지주 방금 상한가 쳤는데요?"
공시가 뜨자마자 시장이 격하게 반응한 것이다.
이건 단순 투자목적이 아닌 경영권 분쟁을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에 쭉쭉 올라가는 금액마다 체결되더니 상한가에서 거래가 완전히 멈췄다.
매수주문만 남아있고 매도는 씨가 말랐다.
파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시장에서 지분경쟁이 시작됐다고 확신했으니 올라갈 일만 남은 것이었다.
원모는 눈치 없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으흐흐, 이게 얼마야? 보세요 대표님. 지금 수익이 얼만지?"
우리가 16억으로 매입한 주식이 상한가를 치니 마냥 좋은 것이었다.
반면 성환이 표정은 더욱 어두워져 갔다.
정말 지분경쟁이 시작되었으며 어쩌면 조회장이 져서 천하제일을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래? 저놈들이 한 몸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는 거잖아."
"한 몸이 아니면 저렇게 똑같이 할까요? 지분율도 똑같고 시기도 비슷하고. 하는 짓거리까지."
성환이 말이 일리가 있었다.
한 몸까진 아닐지라도 최소한 한통속 정도는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최소한 12%는 확보했다는 건데.
가능성은 낮지만 행여나 다른 회사들 명의로 5% 미만씩 여러 군데 가지고 있다면 조회장을 압도할 수 있었다.
침착해지려 해도 더욱 불투명해진 앞날에 불안감만 가중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