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스파이
쏟아지는 뉴스에 댓글까지 꼼꼼히 보느라 뒤숭숭해진 마음에 퇴근도 못 하고 있었다.
원모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하제일에 있을 때의 습관이 굳어진 듯 퇴근도 못 하고 내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다.
"퇴근 안 하고 뭐 하냐 원모야?"
"퇴근 아직 안 하셨잖습니까."
딸랑딸랑.
고참이 아직 못 가는데 어떻게 벌써 갈 수 있느냐고 대답한 거다.
옛날 버릇 좀 버리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를 않는다.
먼저 자리를 일어나는 게 큰 죄라도 짓는 것마냥.
"난 할 일이 좀 있으니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 그리고 일없으면 알아서 퇴근하면 되지 도대체 눈치를 왜 봐 눈치를?"
"대표님 말씀드린 거 아닌데 말입니다."
조용히 고개를 돌려 성환이 쪽을 안쓰러운 듯 바라봤다.
내 눈치를 본 게 아니었다.
수족이라 거뒀지만, 언제부턴가 더 이상 내 수족이 아닌 듯.
성환은 불안한 마음에 TV를 켜고 턱을 괸 채 저녁 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9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뉴스가 시작됐다.
잠시 후 앵커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조세피난처에 소재한 미국계 투자회사로 알려진 스탁스는 금일 오후 금융감독원 공시시스템을 통해 천하제일지주 지분의 6%를 취득했다고 공시했습니다. 한편, 지분 취득 목적을 단순 투자로 명시했으나, 시장에서는 적대적 M&A의 시도일 수 있다며 지분 경쟁이 본격화될 것을 예상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련 뉴스가 끝나자 성환이 불안한 듯 물었다.
"뭐지? 저놈들이 천하제일을 삼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음……, 아직은 모르지. 경영권을 넘보겠다는 건지 단순히 시세차익을 노리고 들어온 건지는 진행 상황을 더 지켜볼 수밖에."
"만약에 경영권을 가져가겠다고 하면요?"
"그럼 지분매입 경쟁이 불가피해질 텐데. 그래도 천하제일은 조회장님 지분이 20%가 넘고 저쪽은 아직 6%밖에 안 되기 때문에 당분간 문제없을 거야. 이 비싼 주식을 20% 이상 사들인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니깐."
"이미 쟤네들이 5% 미만으로 여러 군데 분할해서 가지고 있다면요?"
성환이 말은 일리가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독립적이나 사실상 한통속인 자들이 여러 회사 명의로 지분을 쪼개어 가지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공시할 의무가 없을 테니 우리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4.9%씩 네 곳이 들고 있다면 공시는 안 했지만 이미 19.6%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설마 그렇겠어? 그랬다면 이미 게임 끝났을 수도 있는 건데."
성환이 다 된 밥에 재라도 뿌려진 것처럼 탄식을 뱉었다.
"우씨.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그럼 이제 넌 차기 회장은 물 건너간 거지 뭐. 회장은커녕 과장으로도 못 돌아가지 않을까? 아무리 모자란 놈이라도 조씨 집안 사람을 한 명이라도 남겨두겠어? 천하제일은 이제 버리고 대천하태평에 올인해 보지 그래?"
성환이 정색하며 발끈했다.
"하여간 말하는 것 좀 봐. 아주 저렴한 데다 극단적이란 말이야."
"모든 일엔 항상 최악을 가정해야 하는 법이야."
원모는 옆에서 불안한 듯 말없이 둘 사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원모야 들었지?"
"네? 무슨 말씀하신 건지……."
"어디 붙을지 노선 확실히 정해놓으라고. 더 늦으면 다시는 안 받아준다. 이놈 이제 회장님 둘째 아들도 안 될지 모르거든."
원모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그럼 셋째? 형님이 한 분 더 생기셨단 말입니까?"
헉!
어느 대목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 그 말이 아니잖아! 아니다 됐다. 어쩌면 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성환이도 유모는 있었을 테니깐."
"에이! 대표님. 그러면 조성환님께서 둘째가 맞죠. 그분이 동생일 테니깐요."
한 방 먹었다.
성환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두 분 재미있으십니까? 남의 가정사 가지고 아주 그냥 신나셨나 보네."
원모 스스로를 질책하듯 고개를 숙이고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계속 그런 쪽으로 유도해 가지고요. 저도 모르게 그만 꾐에 넘어간 거 같습니다."
개새끼!
아무래도 노선 확실히 정한 듯 했다.
이젠 무릎 꿇고 울면서 매달려도 안 받아줄 거다.
"됐고! 그만큼 심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아무튼 말 나온 김에 조윤경한테라도 가서 물어보는 게 어때? 그쪽 짓이 아니라면 그쪽도 똥줄이 타는 건 마찬가지여야 할 테니까."
"설마? 누나일라고요."
하긴 조회장의 지분을 물려받은 후에 자기 친위세력을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단계에서 조윤경 짓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때마침 성환이 휴대폰이 울렸다.
"누난데요? 양반은 못 되나 보네."
성환이 통화버튼과 함께 스피커폰을 눌렀다.
"여보세요? 방금 뉴스 봤어?"
조윤경은 대답도 없이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됐고. 사무실 문이나 빨리 열어놔."
조윤경이 우리 사무실에 왔다는 거다.
성환이 원모 쪽을 돌아보자 원모가 바로 눈치채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원모가 조윤경을 영접해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안이 중하고 시급한지 이번에는 수행원들을 주렁주렁 안 달고 왔다.
하지만 문밖에서 벨 누르고 대기하는 건 죽어도 싫었는지 성환에게 전화해서 미리 사람이라도 보내서 문 열어놓고 있으라고 한 것이었다.
재벌병엔 치료약도 없었다.
역시 내가 아랫것이라 여겼는지 인사는커녕 아는 척 눈짓 한 번 안 보낸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신경질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정말 네가 한 짓이 아니란 게 맞아? 미국계 투자회사라고 하는데, 혹시 네가 아는 사람이라도 끌어들인 거 아냐?"
"누나 아니었어? 미국 투자은행 출신 그 잘난 매형이 작전 세력 아니냐고?"
지난 몇 차례의 반목 이후 남매사이에 높은 불신의 벽이 세워졌다.
잠시 한배를 탔다곤 하나, 공동의 적을 무너트린 다음에는 바로 상대에게 칼을 겨눌 수밖에 없는 경쟁자이기 때문에 서로 믿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뭐라고? 너 말 다 했어?"
어찌 보면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조윤경의 스타일상 범인은 아닌 것 같다.
자기 측근이 했다고 치더라도 최소한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됐어, 그만해. 그런데 그룹 내에서 얻은 정보 같은 건 없어?"
"최근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라 그런지 뒤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파악이 안 돼. 너희 쪽에서도 알아낸 건 없어?"
갑자기 내 쪽을 바라보더니 비웃음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하긴. 뭐. 이런 데서 뭐라도 알아낼 수 있겠냐?"
뭔가 납득이라도 된다는 듯 원모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기분 상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니 반박할 수 없었다.
조윤경은 나와 성환이를 번갈아 가며 째려봤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최동욱한테 눈치 준거라도 있나? 혹시 그쪽 직원이라고 하나 보낸 놈이 실수한 거 아니야? 천하제일엔터에서 MJ 사원이었다던데."
MJ 사원! 문제사원을 일컫는 말이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봤다.
옵저버로 보낸 건환이를 말한거다.
"건환이 그 친구보고 MJ사원이라니. 처음에 엔터사에서 에이스라고 해서 받은 건데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 친구가 굼떠 보이긴 해도 꼼꼼해서 실수할 놈은 아닌데."
성환이도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최차장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요즘 들어서 최동욱의 낌새가 이상해서 말이지. 최근에 안가에서 몇 번 부딪혔을 때 표정이 예전하곤 좀 달라졌어. 아무래도 우리가 자기 신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거 같다라고 할까."
"최차장 모르게 유전자 검사한 거라며?"
"그랬지. 유전자 검사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는데. 천하제일은 당연히 아닐 테고. 나왔다면 여기서 새 나온 거 아니겠어? 그 MJ사원말야."
"아니라니깐. 그쪽 사람들이나 입단속 시켜."
정말 최동욱이 알게 되었다면 더 이상 넋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꿍꿍이가 있다면 좀 더 빨리 발톱을 드러낼 수도 있다.
할 말을 다 한 듯 조윤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뭔가 할 말이라도 떠올랐는지 우리 쪽을 돌아봤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사람 하나 박아놓고 싶은데."
"무슨 말이죠?"
"나도 눈과 귀 하나는 달아 놔야 할 거 아니야. 여기서 무슨 작당하는지 나보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거야?"
우리 회사 안에 자기 사람을 하나 붙여 놓겠다는 거였다.
귀찮기도 할뿐더러 중요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나눌 테니 무조건 막아야 한다.
난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냈다.
"월급 줄 형편도 아닌데다가 보다시피 여기 사무실에 여유 자리가 많지 않아서."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월급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깐 신경 쓰지 말지. 어차피 그럴 형편도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리고 자리는 그냥 저기라도 앉으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조윤경의 뻗은 손이 가리키는 쪽은 탕비실이었다.
탕비실 안 테이블에는 빈 생수통과 봉지 커피 등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역시 직원의 복지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잠시 다른 핑곗거리를 떠올렸다.
"컴퓨터도 그렇고 다른 비품이……."
늦었다.
조윤경은 대답 따위는 개한테나 주라는 듯 고개를 쳐들고 나가버렸다.
"뭐야? 네 누나 원래 저러냐?"
"개집이라도 있었으면 거기 앉히라고 했을걸요."
"저런 씨."
차마 친동생 앞이라 욕설이라도 내뱉으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정말 한 명 보내기라도 한다면?"
성환 곤란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낸다면 보낼 사람인데다 딱히 거부할만한 명분도 없는 거 같은데요."
원모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냥 오라고 하지 말입니다. 제가 잘 가르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감시할 사람 붙여놓는다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는거야?"
"어차피 뭐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요. 뭘 숨길만 한 게 있겠습니까? 영수증 정리하고 커피타고 하는거나 시키죠."
원모 자식.
감시고 나발이고 그저 탕비실 업무 넘기려는 생각에 신이라도 난 모양이다.
* * *
다음 날.
출근 시간도 안 됐는데 누군가 사무실을 방문했는지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맞다.
조윤경이 보낸 사람이다.
"원모야!"
대답이 없다.
일어나서 사무실을 빙 둘러봐도 꽁무니조차 보이질 않았다.
핸드폰을 열고 통화목록을 뒤져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더니 탕비실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네! 나갑니다."
"뭐 하고 있었어?"
"탕비실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웬 정리?"
"밑에 직원 온다는데 그래도 정리는 해놔야죠. 아무리 눈엣가시라고 해도 커피나 녹차 깔아놓은 자리에 그냥 앉히는 게 좀 그래서요."
부사수를 받았을 때의 설렘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우리 편이 아니라 감시하러 온 사람이라고 해도 밑에 직원이 온다고 하니 좋긴 하나 보다.
삐익! 삐익! 삐익!
다시 벨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신경질적으로 세 번이나 연거푸 누르는 걸로 봐서는 조윤경이 보낸 사람 성격 역시 만만치 않은 듯했다.
"뭐 해 안 나가고? 벨 누르는 소리 안 들려?"
"아. 네 지금 갑니다요."
그래도 환한 얼굴로 맞이하듯 사무실 문 쪽으로 뛰쳐나갔다.
귀를 기울이니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뭔가 못 볼 거라도 봤는지 원모가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잠시 후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 위에 딸각딸각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복도를 돌아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똥 씹은 표정의 원모 뒤로 누군가 기세등등한 듯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걸어 들어왔다.
이런 X바.
설마설마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짬밥에 오겠어' 하고 넘겼었는데.
정말 이상현이었다.
어쩐지 신음 소리를 냈더라니, 원모가 못 볼 걸 본 게 맞았다.
원모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마치 월드컵 결승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하늘로 향하는 슛이라도 날린 듯 처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충 얼빵한 부사수 하나 받을 줄 알았더니 한참 선배이자 그것도 모자라 그룹 내 최고 엘리트로 손꼽히는 자가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