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본진 공략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성환이 어슬렁어슬렁 사무실로 들어왔다.
"해장하셔야죠."
"출근하자마자 점심이냐? 누가 보면 외근이라도 다녀온 줄."
"도무지 할 일이 있어야 말이죠."
그렇다.
김범룡 대표 회사에 3억 원을 투자한 이후로는 새로운 투자는커녕 검토조차 한 건도 한 적이 없었다.
조성환이 조인하면서 출자한 19억 원 중 16억 원이 통장 안에 고스란히 잠자고 있었다.
김철수 이사도 불안한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요즘 너무 한가한 거 아닌가 해서 걱정이긴 해. 조성환님하고 천대표는 다른 일 하느라고 바쁜 거 같아서 보채지도 못하겠고 말이지."
"네, 죄송합니다. 저희 이번 일 빨리 마무리하고 투입하겠습니다."
"죄송할 거까지야. 나랑 원모가 능력이 달려서 그런 거지 뭐. 그건 그렇고 천대표 요즘 주식시장에서 도는 소문 들은 거 있어?"
"네? 소문이라뇨?"
"며칠 전에 경제신문 기자하는 후배를 만났을 때 들은 건데."
김이사가 슬쩍 조성환 눈치를 살폈다.
성환은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해보세요."
"그게 말이지. 천하제일그룹 지주사 지분을 누가 매집한다는 소문이 있는거 같아."
"네 지주사 지분을요? 아니 그게 누군데요?"
"거기까진 아직 모르나 봐. 그리고 소문이 사실이라도 해도 아직 주식 대량 보유 공시는 안 나온 걸로 봐서 5%까지는 매입 안 했겠지."
주식시장에서는 누군가 상장사 주식을 5% 이상 보유하게 된 경우 그 주식을 보유한 목적과 보유 주식수 등에 관한 정보를 공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업지배권 경쟁에 대한 공정성을 확보하고 투자자로 하여금 투자 판단의 자료로 쓰일 수 있도록 공시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김이사가 심각한 듯 물었다.
"기자들까지 들었을 정도면 이미 꽤 많이 진행됐다는 얘기일 텐데 혹시 성환님께선 회장님께 무슨 언질이라도 들은 거 있으십니까?"
"아뇨! 저도 금시초문인데요."
"그럼 그룹 차원에서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아니란 얘기네요."
"아니에요. 이사님. 성환이 저거 완전 튕겨진 이후로 그룹사 일은 거의 공유 못 받아요. 처지가 처지인 만큼."
'둘째 아들이라서요'라는 말은 뺐다.
하지만 성환이 바로 알아차리고는 발끈했다.
"에이 내가 왜요? 오늘 아침에 회장님하고 식사도 했는데."
"잉 식사? 누구처럼 불도장이라도 같이 드셨나 보지?"
"그만 좀!!"
한마디 더 하면 폭발할 타이밍이다.
"알았다, 알았어."
"혹시 누나가 그런 거 아닐까요? 지난번 비자금 빼돌린 것도 있겠다."
아마 자기랑 연대하자고 해놓고 뒤통수칠 게 뻔하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앞에선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나서 계열분리 하자고 안심시켜놓고 뒤로는 몰래 지주사 지분을 주워 담는다?
조윤경 캐릭터라면 충분히 그럴수 있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아무리 꼬불쳐놓은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새 발의 피도 안 될 것이다.
"비자금 몇백 억 정도 빼돌렸다고 해도 그 정도 가지곤 어림도 없을 거야. 지분 5%만 하더라도 수천억은 넘게 필요할 텐데."
"그럼 최동욱 아닐까요?"
"에이. 자기 어머니도 6인실 병실로 모시는 사람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렇죠. 차도 엔진하고 바퀴만 달려있는 거더만. 그런데 그 정도 자금력이 있다면 내부 사람이면 회장님밖에 없으시겠네요. 설마 그럼 회장님이?"
성환이 말하면서 점점 확신에 찬 듯 얼굴 표정이 굳어져갔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회장님은 아니야. 지주사 지분을 자식들한테 넘기려면 상속세 부담 때문에 주가가 높으면 절대 안 되지. 대량으로 매입한다면 주가가 상승하면서 세 부담만 더 높아질 텐데 그렇게 하시겠어?"
"네? 정말이에요?"
성환 뭐가 좋은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뭐야? 지분 상속받을 생각하니까 벌써 좋기라도 한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
"주가가 오른다는 거요."
"당연히 오르지."
"그럼 우리 투자처 찾았네."
성환이 말은 천하제일 지주사 주식을 매입하자는 거였다.
주식은 단기간에 몇 배씩 오르기도 힘들뿐더러 회귀 전에도 천하제일 지주사 주식은 상속 이슈 때문에 오히려 주가가 뜨지 못하게 꾹꾹 누르고 있던 형국이었다.
그래서 아예 투자대상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특별히 마땅한 투자처도 없는 상황에서 누군진 모르지만 어떤 세력의 매집으로 단기간에 주가가 오를 게 뻔하다면 여유자금을 잠깐 담가 놓는 것도 상당히 괜찮은 전략이다.
"오호! 좋은 생각이야. 근데 주가가 오르는 게 너한텐 장기적으로 좋은 건 아닌데. 나중에 네가 물려받는다고 해도 상속세를 많이 내야 할 테니."
"나중 일은 나중에 고민하면 되고. 일단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올라타야죠."
성환이 말이 맞다.
어차피 지금 우리의 자금 규모로는 물줄기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일단 비옥한 땅으로 흘러갈 수 있는 물길이 있다면 그저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초록창을 열고 천하제일 지주사 주가를 검색했다.
이 무거운 주식이 특별한 호재도 없는데 최근 한 달만에 30% 이상 상승했다.
누군가 매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맞는 것만 같았다.
한 달 전에만 샀어도 꽤 먹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이거 벌써 너무 올랐는데?"
"대표님. 떨어지는 칼날을 잡지 말고 달리는 말에 올라타라는 말도 모르십니까?"
회귀 전까지 포함하면 수십 년 재무 경력을 가진 내게 한낱 풋내기가 충고질을 했다.
하지만 주식시장의 유명한 격언이자 진리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 사자."
"그런데 어떻게 사죠?"
문제는 법인 명의로 증권계좌가 있는지 자금 이체는 가능한지 등 디테일에 있었다.
"글쎄다. 나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원모가 끼어들었다.
"제가 준비 다 해 놨지 말입니다."
일 얘기할 때는 아무 관심도 없어 하다가 주식 얘기로 전환하자 솔깃했는지 어느새 근처에 와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거였다.
역시 관리이사 직함에 걸맞는 준비성이었다.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걸 준비한다는 게 말만 쉽지 실천하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그 어려운 걸 원모가 해냈다.
"원모야 천하제일에서는 이러지 않았잖아? 왜 이렇게 변했어?"
"제가 언제 그랬었다구요?"
"입사때부터 퇴사때까지. 쭉~ 한결같이."
"에이 대표님도. 그땐 너무 바빴잖습니까. 전표만 해도 하루에 얼마나 싸인을 많이 했는데요. 지금은 할 일이 없잖습니까. 책임은 크게 늘어났고요."
그래.
모든건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위임했기 때문이다.
사람 저마다의 성격, 일에 대한 태도 등에서의 차이도 존재하지만,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부여함에 따라 자발적 참여의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원모가 자기 컴퓨터로 인터넷뱅킹에 접속해서 회사 명의 보통예금 계좌에서 증권계좌로 이체를 신청했다.
다른 사람의 확인이나 결제 등의 절차 없이 바로 이체가 실행됐다.
"뭐야? 끝났어?"
"네. 인터넷뱅킹이잖아요. 은행 가서 출금하고 증권사 가서 입금이라도 해야하는지 아셨습니까?"
"아니 그 얘기가 아니잖아. 너 혼자 이걸 할 수 있단 말야?"
"네. 관리이산데요."
권한의 위임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그런데 이놈은 그 선을 한참 넘은 것이었다.
"이 자식이! 야! 네가 맘만 먹으면 다 빼돌리고 날을 수도 있다는 얘기네."
"에이, 제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아니 이 자식이 재무 밥 몇 년인데 아직 내부통제, 업무분장 원칙을 몰라."
원모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갈굼도 그렇지만 그것보단 권한과 책임이 급격히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널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모든 업무는 수행하는 사람과 검토하는 사람이 분리되어야 하는 게 원칙이잖아. 알아듣지?"
"네."
아직 굳은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원모야. 내일부터 상무라고 명함 파고 다녀라."
"네? 상무요?"
"그래. 상무. 좋냐?"
"네."
좋댄다.
바로 풀렸다.
모두 공동창업자이자 주주인데 직함이 뭐가 중요하다고 저렇게 좋을까.
아무래도 회사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상무란 직급이 주는 무게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모가 주식창을 열고는 16억 원어치의 매수 주문을 넣었다.
성환이와 김철수 이사까지 모두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띠리링'하면서 체결을 표시하는 알림창이 계속해서 뜨고 있었다.
체결이 완료될까지는 채 몇 분이 걸리지도 않았다.
성환 잠시 후 걱정이라도 된 듯.
"근데 우리 잘못한 게 아닐까요?"
"야. 이제 와서 왜 그래? 자기가 사자고 해놓고. 조금만 기다려. 딱 두 배만 되면 빼자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게 아니라 정관이요. 우리 회사 정관을 보면 5억 이상 투자는 이사회 결의도 있어야 하고 주식수 2/3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고 적혀있는데."
지난번에 3억 원 투자하면서 정관에 대해 말해준 걸 기억하고는 자세히 읽어봤나 보다.
그러고는 갑자기 원칙을 들이민 것이다.
"성환아. 그건 원칙이고. 실무는 다른 얘기야."
"네? 실무라뇨?"
조용히 원모 쪽을 돌아봤다.
"원모야 뭐 하냐?"
숙달된 조교라도 된 듯 원모가 거수경례를 들어보였다.
"넵!"
몇 분간 키보드를 따닥따닥 두드리더니 문서 두 장을 출력했다.
한 장은 이사회의사록, 다른 한 장은 주주총회의사록으로서 결의일은 어제 날짜였다.
두 장의 문서를 성환에게 내밀었다.
"실무는 이런 거야. 형식은 형식일 뿐 실질이 중요하지. 뭐해? 싸인 안 하고."
성환 어이없는 듯 황당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깐 뭐 내부통제니, 업무분장이니 하면서 원칙을 그렇게나 따지더니 이게 뭐죠?"
"그때그때 다른 거지. 그냥 싸인이나 해."
그렇게 16억 원의 투자 건은 이사회와 주주총회에 결의안으로 상정되어 동의를 얻고 통과되었다.
* * *
천하제일 주식은 날개라도 달린 듯 날아갔다.
주당 18만 원에 매입한 주가가 하루에 몇 퍼센트씩 꾸준히 오르더니 일주일 만에 30%가 넘게 상승했다.
"대박! 대표님 벌써 수익이 5억이 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봐. 두 배 되면 바로 빼자고."
"넵."
원모 자기 돈이라도 번 듯 싱글벙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물론 자기 돈은 맞다.
지분율은 비록 5%이지만 금액으로 보자면 이삼천은 번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유주식의 주가가 오르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정말 어떤 세력이 매집해서 오르는 것인지, 그게 맞다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매집한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세력들의 의도와 자금 동원력에 따라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어쩌면 나의 복수에까지도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불안한 마음에 김철수이사를 찾았다.
"이사님. 혹시 동료분들로부터 더 얻은 정보는 없습니까? 소문이 맞는지 누가 매집하는지 같은 거요. 영 찜찜한 게 아닌데요."
김철수이사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좀 이상해.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는데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나 봐. 주가 오르는 거 보면 그 소문이 맞는 것도 같은데. 후배들도 자세히는 모르는 눈치인 거 같아."
"네, 조금 더 알아봐 주세요. 뭐라도 나오면 바로 알려 주시구요."
"알았어. 별일 없을 거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
며칠 후.
점심 약속 있다며 나갔던 김철수이사가 헐레벌떡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천대표! 알아냈어."
"네? 천하제일 건이요?"
"맞아. 오늘 장 끝나면 공시 하나 나온다는 소문이야. 공시 나면 바로 기사화될 거고."
"무슨 내용인데요?"
"미국계 투자회사 몇 개가 천하제일 지주사 지분 매입했나 봐.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공시할 거지만 적대적 M&A 시도한다는 소문이 파다해."
"네? 적대적 M&A요?"
"천하제일을 집어삼키려는 거지."
옆에서 듣고 있던 조성환 표정이 어두워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물었다.
"그놈들이 누구라고 합니까?"
"아직 자세히 알려진 건 없습니다. 그저 케이먼제도에 소재한 미국계 투자회사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시총 규모도 상당한 대기업 천하제일을 인수하겠다니 정말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그게 진짜라면 정말 엄청난 규모의 펀드가 뛰어들었다는 얘기다.
김철수이사의 말대로 장 마감과 동시에 공시가 떴다.
이어서 <천하제일 그룹 '적대적 M&A' 위기 지분경쟁 시작되나> 라는 제목의 자극적인 기사도 포털 주요 뉴스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