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79화 (79/191)

79화 미행

"오늘 최동욱이 자기 어머니 만난다고 하는데, 따라가야지."

"네? 나도요? 음……."

자기 아버지 옛 내연녀를 만난다는 생각에 내키지 않았는지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당연하지. 운전해야 할 거 아냐. 나 차 없잖아."

"아 쫌! 차 좀 사라니깐."

"조기사도 있는데 내가 뭐 하러 차를 사냐?"

기사라는 말에 기분이라도 상했는지 무섭게 째려봤다.

"그런데 최차장 집이 어딘지는 아는 겁니까?"

"알지. 지난번 주간업무 보고자료에 있었잖아."

"네?"

건환이가 보낸 메일의 첨부파일을 열어서 보여줬다.

역시 건환이 겉으론 굼뜨고 느린 거 같아도 꼼꼼한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보고자료에는 비서팀의 회식 내용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최동욱의 주량, 주사는 물론이고 차종과 차량 번호 및 대리기사를 통해 어느 아파트로 귀가했는지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봤냐? 건환이가 딱이라니깐. 내가 말했었잖아. 이놈 예전에 스파이짓할 때 내가 하루에 화장실 몇 번 가는지까지 적어 놨었다니깐."

성환이 역시 건환이를 다시 보게 됐는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의왼데요?"

잠시 후 차를 타러 성환이와 함께 지하 주차장에 내려갔다.

역시 강남 고급 오피스 빌딩에 주차되어 있는 차는 때깔부터가 달랐다.

매일 세차라도 하는지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듯 삐까번쩍 광택이 잘잘 흐르는 검은색 차량들이 일렬로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었다.

검은색 세단 사이 유독 톡 튀는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말이 뛰어오르는 듯한 모양의 엠블럼이 박힌 오렌지색 스포츠카였다.

"설마 저거?"

"네. 출근하는데 오늘 날씨가 너무 맑아서."

"아니, 왜 하필 오늘?"

"하필이라뇨. 오늘 날씨가 맑은 게 이상한가? 연중 300일은 맑구만."

"아니 그게 아니라 왜 하필 오늘 저런 걸 타고 왔냐고. 미행한다고 광고라도 할라고?"

"누가 이럴 줄 알았나요? 그리고 이차가 그나마 제일 얌전한 축에 속하거든요!"

"알았다. 그런데 옷은 이게 뭐냐? 미친 놈마냥 꽃무늬가 뭐야. 이게"

하필이면 오늘 성환이 옷마저 환상이었다.

흰색 바탕에 커다란 꽃다발을 그려놓은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배에 손이라도 올려놓고 있으면 딱 그냥 꽃을 든 남자다.

"아 참. 날씨도 그렇고 차랑 깔맞춤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넥타이도 아니고 자동차랑 색깔을 맞추다니.

역시 재벌 2세답다.

"됐다. 그냥 운전이나 똑바로 해."

보조석 앞에 서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성환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운전합니까?"

"그럼 내가 하리? 스포츠카 면허도 없는데? 난 1종이라 트럭밖에 못 몰아."

"에이, 진작 좀 따 놓지."

이놈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 듯.

한참을 달려 건환이가 알려준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다.

주차장 입구가 보이는 맞은 편에 세워 놓고 최동욱의 차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밤이 깊어가도록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잘못 들은 거 아닙니까? 귀가 밝은지 알았더니 영 아니네."

"맞다니깐. 오늘이 확실해."

잠시 티격태격하는 사이 주차장 위로 라이트가 비추는 거 같더니 차량 한 대가 나와 바로 큰길로 진입했다.

건환이가 말해준 차종과 번호가 일치했다.

"저거다. 빨리 출발해."

갑작스럽게 풀 악셀을 밟는 바람에 '부앙'하는 굉음과 함께 차가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야! 미행한다고 알리냐? 조용히 못 해!"

"빨리 가라면서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조용히 합니까. 차가 소리 지르는 걸 가지고."

"알았어. 내가 졌다. 그냥 닥치고 조용히 따라가기나 해."

최동욱의 차는 올림픽대로로 올라타 동쪽으로 계속해서 달렸고 십여 분 뒤 어느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성능 좋은 차 덕분에 신호도 안 놓치고 가깝게 따라붙을 수 있었다.

다행히 최동욱은 우리가 따라붙은 지 모르는 눈치였다.

최동욱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우리는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성환이의 얼굴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떡하죠? 다 쫓아와서 놓쳤네요."

"괜찮아. 늦은 시간이니까 이동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

다행히 최동욱이 탄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엔 서지 않은 채 5층에서 멈췄다.

"5층이다. 가자."

5층에 도착해 내리니 입원실이 족히 수십 개도 되는 듯해 보였다.

"이 많은 데서 어떻게 찾죠? 환자 이름도 모르는데?"

"우선 넌 왼쪽, 난 오른쪽으로 가서 찾아보자."

흩어져서 찾으려는 찰나, 화장실에서 누군가가 손을 털며 나오는 것이었다.

최동욱이었다.

조용히 뒤를 밟았다.

최동욱이 들어간 병실 앞 입원환자 명단을 보고는 성환이 놀라며 말했다.

"세상에. 이게 몇 명이야! 병실 하나에 6명이나 있는데요."

"6인실이 가장 일반적인 병실이야."

"에이. 이렇게 좁은데 다닥다닥 붙어있다고요? 없던 병도 생기겠네."

"어쩔 수 없지. 인원이 적은 병실은 의료보험이 적용 안 돼서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으니깐."

"그럼 최차장 어머니가 병원비 때문에 이런 데서 지낸다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성환은 안쓰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6인실 병동에 입원해 있다는 건 조회장의 손길이 닿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아니면 거부했다거나.

밤늦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병실에 귀를 쫑긋 세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누군가 우리 어깨를 툭툭 쳤다.

"저……,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입원실을 돌던 간호사가 우리를 수상히 여겨서 물어본 것이었다.

특히 성환의 옷차림을 보고는 더욱더 수상히 여긴 것 같다.

"어디 찾아오셨나요?"

난 재빨리 간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듯 간절하게 쳐다봤다.

"네. 여기 이 친구가 마음이 좀 아픈가 봐요. 자꾸 제 옆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요."

간호사 몰래 성환에게 살짝 눈짓으로 싸인을 보냈다.

다행히 성환은 바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는 왼쪽으로 살짝 돌리고 두 눈은 오른쪽 위로 치켜뜨며 말했다.

"우리 항숙이 이뻤다."

간호사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뭐라고요? 누구요?"

"우리 항숙이 이뻤다. 나를 좋아했다."

검지를 머리카락에 꼽아 둘둘 마는 시늉을 하니 간호사가 더욱 소스라치게 놀라며 ㄴ뒷걸음쳤다.

범상치 않은 꽃무늬 티셔츠는 묘하게 지금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침착함을 되찾은 간호사가 성환에게 친절히 물었다.

"환자분 A 병동에서 나오셨어요? 몇 호실인지 기억하세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내방……. 6인실이다."

성환이 녀석 몇 호실이 아니라 몇 인실인지 물어보는지 알고 답한 거다.

"네? 뭐라구요?"

내가 눈짓으로 그게 아니라고 하자 성환이 곧바로 알아들은 듯 손가락을 뻗어 먼 곳을 가리켰다.

"사람 많다. 항숙이도 있고."

간호사는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듯한 팔을 붙잡고 성환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데려갔다.

어차피 나만 들으면 되는 데다 있어봤자 방해만 될 테니 차라리 잘됐다.

집중해서 들으니 최동욱 모자간의 대화 소리가 아주 자세히 들려왔다.

"아버지랑 식사했다고?"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아버지예요! 언제 봤다고!"

홍길동이야 뭐야?

"그래도 항상 알게 모르게 챙겨 주시고 계시니깐 고마워해야지."

"고맙긴. 내가 언젠간 그 집안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리 알고 계세요."

"동욱아 그런 맘 먹으면 안 돼. 다들 좋으신 분들이야."

"좋은 분들이라뇨. 어머니는 삼십 년을 넘게 그렇게 고통받아 왔으면서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요?"

"내가 잘못한 것도 있어."

"네?"

"너한테 이런 말 정말 안 하려고 했지만 네가 자꾸 엇나가는 거 같아서 얘기해 줄게."

"네? 무슨 일인데요?"

최동욱의 어머니는 지난 기억을 되새기며 상념에 사로잡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는 사실 그 집 딸 윤경이 유모였어."

최동욱은 크게 놀란 듯 했다.

"네? 뭐라고요? 유모?"

"맞아. 사모님 산후조리할 때부터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윤경이를 내 손으로 키웠어. 회장님 부부께서 수고한다고 참 잘해주셨지. 그런데 내가 눈에 뭐라도 확 씌었는지 회장님과……."

고통스러운 듯 신음 소리만 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는.

"너 임신한 거 알고는 내가 관둔 거야. 처음엔 회장님도 모르셨어. 나중에 너 낳고 나서 백 일도 안 되었을 때쯤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지. 사모님께 모두 말씀드리고 그 집에 너를 들이겠다고 했지만, 내가 너 없으면 못 산다고 거절한 거야."

최동욱도 처음 들는 말에 꽤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일본으로 나갔는데도 어떻게 아셨는지 계속 도와주셨어. 네가 대학도 나오고 유학도 다녀오고 한 것도 다 회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야."

"외삼촌이 도와주셨다고 하셨잖아요."

"아니야. 외삼촌은 노름으로 집안 살림 다 거덜내고 나가는 바람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남의 집 생활 시작하게 된 거였어."

더 이상은 못듣겠는지 후다닥 병실을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뛰쳐나오는 최동욱과 눈이 마주쳤다.

최동욱 얼굴에선 분노와 회환이 뒤섞인 듯 희미한 웃음과 함께 눈물까지 엿볼 수 있었다.

그 역시 찰나의 순간에 나를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회귀 후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는 사람 만났을 때의 표정을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로 자리를 떠서 주차장에 도착하니 성환이 이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었어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오케이 싸인을 보냈다.

"물론이지. 근데 항숙이는 찾았나?"

"크크, 어떱니까? 내 연기가."

"연기는 모르겠고 외모는 구분 못할 정도로 거의 똑같았어. 아주 그냥 막하막하야."

"무슨 그런 막말을. 얼굴이 다 한 거지. 페이스가 일단 호감형이면 무슨 말을 해도 다 믿고 싶은 겁니다."

"뭐래. 꺼져."

"그건 그렇고 뭐라고들 하던가요? 회장님 얘기는 하던가요? 무슨 꿍꿍인 거 같아요? 앞으로 어떡하겠대요?"

숨 한 번 고르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배가 고파서 입이 안 떨어진다. 뭐라도 먼저 먹자. 살 덜 찌고 비싼 걸로다가. 아무래도 회가 좋겠지?"

"뭐지? 입 안 떼진다면서 몇 마디를 하는 거지?"

"안 가고 뭐 해?"

"갑니다. 갑니다요."

이 자식, 나 벨트 아직 안 멘 거 뻔히 알면서 있는 힘껏 악셀을 꾹 눌러 밟았다.

하마터면 튕겨 나갈 뻔했다.

"야 이 자식아. 천천히 좀 가라니깐."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출구 쪽에 서 있던 한 남자가 통화하면서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 그놈들이 맞습니다……."

차가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그 남자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를 보고 말했다는 거다.

누구지?

조윤경이 최동욱을 미행하라고 붙인 건가?

아님 최동욱의 수하인가?

누구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차가 도착한 곳은 강남의 한 이자카야.

술 한잔하면서 성환에게 병원에서 엿들은 얘기를 해 주었다.

"정말 그랬단 말이에요?"

성환 역시 최동욱 모자의 처지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렇다니깐. 아무래도 타지에서 고생 많이 했겠지."

"아니 그거 말고. 그자가 정말 우리 집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고요?"

내가 잠깐 오해했다.

역시 자기만 생각하는 건 아직 변하지 않았다.

하긴 이십몇 년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 성격이 몇 년 만에 바뀌겠는가.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 심정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봐."

"이해한다고요? 아니 어떻게 아이 키우는 걸 돕는다면서 그 아이 아빠랑 그럴 수가 있지? 그게 아이와 아이 엄마한테 할 짓인가?"

듣고 보니 성환이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성환이도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자기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해서 화를 낸 것이었다.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그저 각자의 입장, 처지가 다를 뿐이다.

술 한 병을 더 시키고는 빈 잔을 채우는데, 일행인 듯 몇 명이 무리 지어 술집에 들어왔다.

자정도 넘은 시각에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듯하여 자세히 쳐다보니 일행 중 한 명의 낯이 익었다.

주차장 나올 때 우릴 보면서 통화하던 그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이 자식이 악셀을 밟는 바람에 제대로 못 봐서 긴가민가했다.

귀를 기울이며 그자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으려 했으나 아무 얘기도 없이 술도 마시지 않은 채 그저 우리 쪽만 노려보는 것 같았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성환아. 그만해!"

"네? 아니 이 상황에서 그 정도 말도 못 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뒤에 저놈들 뭔가 이상해. 우릴 따라온 거 같아."

"네? 뭐라고요?"

뒤돌아보려는 성환을 제지했다.

"그냥 가자."

술값을 카운터에 던져놓고 문밖을 나서는데 그 일행들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우리한테 붙은 게 틀림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