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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78화 (78/191)

78화 전략가

건환이가 출근한 후 첫 주말이 되자 메일 하나가 날라왔다.

제목은 <1주차 주간 업무 보고>.

첫 번째 장에는 최동욱 차장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최동욱 차장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짜장면임.

그것도 불은 걸 매우 좋아함.

완전 변태 같음.

메일을 같이 보다가 성환이 쪽을 돌아봤다.

"형이 확실하네. 같이 산 적은 한 번도 없는 데도 입맛이 아주 똑같네, 아주. 변태 맞네, 쌍으로다가."

성환이 어처구니없는 듯 혀를 찼다.

"아니 짜장면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백이면 백 좋아하지. 불은 거 좋아하는 사람이 반이라면 백이면 오십은 불은 짜장 좋아한다는 얘긴데. 그럼 세상 반이 다 형제입니까?"

억지긴 하나 나름 논리적이라 반박하기 힘들었다.

"알았어. 어차피 한민족인데. 올라가 보면 다 형제지 뭐."

다음으로는 업무 능력 및 성격에 대해 기재되어 있었다.

똑똑하며 일 처리가 매우 깔끔하고 리스크 관리를 잘해 나감.

재치 있는 유머를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함.

누군가와는 다르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아주 다정다감하며 팀원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함.

성환이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누군가와는 다르다네요. 화 한 번 안 내고 아주 다정다감하다네요. 누군가와는 다르게."

"설마 건환이가 나랑 비교했다는 거야? 내가 말야……."

"쳇. 네네. 그렇구 말구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두 번째 장에는 일과에 대한 내용이었다.

다른 날은 그저 평범한 하루였으나 수요일만 특이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최동욱 차장 안가에서 회장님 모시고 L호텔 중식당 다녀옴.

회사 복귀했을 때 식사하셨냐고 물어보니 불도장 먹었다고 함.

회장님과 같이 식사하신 걸로 추정됨.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면 바로 불도장 50% 할인 행사 날인데.

혼자 잡지 같은 거 보기도 해야 하고 게다가 본인만 할인되기 때문에 반드시 혼밥만 한다고 알려졌는데 이번 주는 최동욱 차장과 함께 식사했다는 거였다.

보고서를 읽은 성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기는 식사는커녕 잠깐 동안이라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그 자리에 이복형이라는 사람이 마주 앉아 즐겁게 식사까지 했다는 생각에 충격이 상당했음이리라.

"내가 사 줄게 불도장.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안 통했다.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다.

"미안. 짜장면 시켜 먹을까? 불은 걸로."

"아, 쫌!"

배달 짜장까지 안 통하다니 마음의 상처가 여간 심하지 않은 듯하다.

"성환아. 안가에서 최동욱 차장 본 적은 있어?"

"음, 회장님이 자주 외출은 안 하시니깐 잘 보진 못하죠. 그래도 며칠 전에 출근하는 길에 나오다가 한 번 마주쳤어요."

"얘기는 해 봤고?"

"갑자기 평상시랑 다르게 대하면 눈치챌까 봐 보통 때처럼 몇 마디 건네봤죠."

"뭐라는데?"

"글쎄 뭐랄까. 지난번하고 아주 똑같이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래요. 아마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내가 전후 사정을 몰랐다면 정말 우리 형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니깐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듯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동욱 자신이 누군지 알면서도 그랬다면 내공이 정말 보통이 아닌 것이다.

그 후 몇 번의 보고서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특별히 누구를 만난다거나 오랫동안 나갔다 온다거나 하는 거 없이 평범한 비서실 직원으로서의 일상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었다.

성환이 답답한 듯 말했다.

"이 사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닐까요? 아니 어쩜 아무 일도 없지?"

"건환이가 아무리 사무실에 같이 있다곤 해도 한계가 있겠지. 근무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럼 사람이라도 붙여 볼까요?"

"조윤경이 이미 붙여 봤을 텐데 소용없을걸."

성환이 뭔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이번 달 마지막 주 수요일."

"그 중식당 불도장? 에이 설마 또 같이 가실라고?"

"회장님 성격으로 볼 때 지난번 한 번으로 끝내진 않을 거예요. 루틴으로 정했을지 몰라요. 옆방 예약해드릴 테니 대표님이 다녀오시죠."

그럴지도 모른다.

어차피 혼자 경영 구상하는 것도 아닌 데다 그 시간만큼은 누군가의 시선도 받지 않을 테니 남의 눈치 봐야 할 일을 하기엔 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자식이 내가 소머즈 능력이 있다는 걸 아는 걸까.

옆방 예약을 하라는 의미가 뭘까?

"근데 내가 너 심부름꾼이라도 되냐? 왜 날 시키고 지랄일까?"

"내가 갈 순 없잖아요."

"조회장님께서도 내 얼굴 알거든. 불쑥불쑥 몇 번을 찾아갔는데 그리고 옆방 가서 뭐 하라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거잖아요. 매번 그래왔듯이."

오묘한 웃음을 짓는 게 뭔가 수상했다.

설마 정말 눈치챈 건 아닐까.

성환이 잠시 후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더니 건넸다.

말 안 해도 알아서 주는 걸 보니 이번 일의 중함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당히 좀 쓰십쇼."

"걱정 마. 회식 있는 것도 아닌데."

뜻하지 않게 예산이 생겼다.

이 기회에 주위 놈들 다 불러서 한턱 크게 쏜다면 다음 몇 번은 마음 편히 무임 승차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수화기를 들고 연락처를 끝까지 뒤져보는데 통화 버튼을 누를 만한 친구 한 명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놈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있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던 것인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사실 언제부턴가 동기 모임에 나가는 게 한편으로 꺼려졌었다.

동기라고 하면 최소한 입학식 때는 왠지 같은 출발점에 서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수능점수를 비롯한 모든 조건이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할까.

졸업 후 정기적인 동기 모임의 목적은 예전에 자기와 비슷하게 출발했다고 생각했던 동기들이 지금은 어디쯤 와 있는지 서로서로 확인하기 위한 것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자기와 비슷한 처지임을 확인한다면 그동안 내가 뒤떨어지진 않았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동기 중 누군가 크게 성공하거나 떼돈을 벌거나 하면 비록 술자리에서는 축하의 말을 건네면서도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왜 뒤처졌을까 자책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동기들의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면 안타까운 듯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그 불행이 나한테 오지 않았음에 안도한 적도 있었다.

비교는 마음속 불안감의 근본 원인이니 안 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더라도 인간의 본능과도 같아서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따라서 비교 자체를 아예 하지 않기 위해 어느 때부턴가 동기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기본 심리일 수도 있지만, 나만의 자격지심도 더 큰 몫을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결국 이렇게 공짜로 밥 한 끼 크게 쏠 기회가 생겼는데도 선뜻 연락할 친구가 없어진 것이다.

* * *

오픈 시간에 맞춰 L호텔 중식당에 도착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성환이 말대로 조인철회장이 항상 예약하는 룸의 바로 옆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메뉴판을 들고 서버분이 들어왔다.

내 얼굴을 보고는 예전에 방문한 게 기억난 듯 인사했다.

"오랜만에 방문해 주셨네요."

"기억하세요?"

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메인디쉬에 짜장면 담아달라고 하셨었죠."

아무래도 꽤 인상이 깊었나 보다.

"네. 맞아요. 오늘도 그렇게 주십시오."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손님. 저희는 룸에서는……."

"네, 알아요. 농담입니다. 오늘은 불도장으로 주십시오."

"네. 준비하겠습니다."

돌아서는 종업원을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그리고 물론 군만두는 서비스되죠?"

"손님. 저희는 군만두를 서비스……."

"네 알아요. 농담이에요. 계산할 테니 포장해 주세요."

역시 얄짤없다.

자주 오든 말든, 아는 손님이건 말건, 많이 시키든 말든 여기선 군만두는 엄연히 하나의 잘 차려진 요리다.

포장이라도 해서 군만두 좋아하는 원모한테나 갖다줘야겠다.

불도장이 나오고 뚜껑을 열자 갖가지 재료의 향기가 온 방 안을 휘감아 돌았다.

역시 불도장(佛跳牆).

스님이 담을 뛰어넘는다는 이름에 걸맞는 요리다.

마침 식사를 마칠 때쯤 옆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밑창이 달아 바닥을 끄는 듯한 발소리가 나는 게 조인철 회장이 들어온 것이다.

역시 동행인이 있는 듯 두 사람이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최동욱일 것이다.

조회장이 비교적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키게."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키래두."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끄응"

불만 가득한 쇳소리를 냈다.

역시 조크루지다.

아마도 가장 비싼 메뉴인 불도장은 자기 것만 할인되니 다른 거 시켰으면 했었나 보다.

최동욱 아직까지 조회장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듯 그 의중까지 읽지는 못한 모양이다.

"회장님 원래 혼자 하시는 식사 자리라고 알고 있는데 왜 매번 저를 부르시는 겁니까?"

"이제 여기서 혼자 있을 필요 없어."

"네?"

"세상이 워낙 좋아져서 휴대폰만 있으면 뭐든 안 되는 게 없으니깐."

크크 절로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내가 불쑥 찾아 들어 온 날 이후부터는 조회장의 은밀한 여가 대상이 잡지에서 휴대폰으로 바뀌었나보다.

최동욱 통 영문을 모르는지 다시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내가 주책이야. 그게 아니라 이렇게라도 식사 한번 해야지 평생 동안 같이 밥 한 끼 같이 먹어본 적이 없으니깐 그러지."

"아. 네."

조회장의 다정한 물음에 최동욱이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서로 간에 부자지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다.

식사 도중 별다른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한참 뒤.

조인철 회장이 정적을 깨듯 말했다.

"어머니는 좀 괜찮아지셨니?"

"왜 한국에 들어오셨냐고 따지시는 겁니까? 병치레차 고향 한 번 오는 것도 안 되는 겁니까? 우린 언제까지 숨어만 살아야 합니까?"

갑작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에 조인철 회장 적잖이 당황한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너희 모자에겐 미안하게 됐다. 내가 그럴 형편이 아니라는 거 네 어머니는 이해해 주실 거다. 하지만 항상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이해해 줬으면 한다."

"이제 와서요? 왜, 이제 와서 아버지 행세라도 하는 겁니까? 어머니는 직접 한 번도 찾아뵐 생각조차 못하면서요?"

조회장 아무런 답도 못한 채 작은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최동욱은 아무래도 수준 높은 전략가 스타일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하고 앵겼으면 오히려 조회장이 밀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

원망하는 모습으로 후벼파면서 죄책감이나 미안한 감정을 증폭시키게 하고 있다.

오히려 저러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세를 이끌어 가려는 수작을 부리는 거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더니 최동욱이 복도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야. 왜 몸이 안 좋아?"

"……."

"지금 그 인간하고 같이 있어."

"……."

"아니 그럼 그 인간이라고 하지 이제 와서 아빠라고 해? 뻔히 아들딸 두고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한테."

"……."

"지금 그 집 아들도 본가에 들어왔어. 내가 모시고 있지.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깐. 엄마는 몸조리나 잘해. 이따 밤에 사람 없을 때 잠깐 들를 테니깐."

아무래도 최동욱의 친모는 외국 살다가 입원차 한국에 잠시 들어온 듯했다.

모자간에 보는 눈을 피해 몰래 만날 수밖에 없고 불쌍하긴 하다.

다만 조성환에게 호의적인 게 아니라 언젠간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성환을 찾아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니 정말이에요? 최차장이 나한테 그랬다고?"

녹음 같은 증거도 없이 그저 이간질시키는 거 같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렇다니깐. 내가 복도에서 통화하는 거 두 귀로 똑똑히 들었어."

차마 룸 안에서의 부자지간 대화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조회장이 최동욱을 애틋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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