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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77화 (77/191)

77화 잠입

성환이 말을 듣고서야 조윤경이 내가 배석하고 있는 걸 인지했는지 날 째려보고는 아래위로 훑었다.

마치 '아랫것이 아직까지도 자리 안 비키고 있었냐'라고 하듯.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살짝 움찔했다.

이놈의 옛날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기분이 더럽다.

이제는 달라졌음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성환이 다시 물었다.

"같이 가실 거잖아요? 그렇죠?"

마음속으로 동의했다곤 하더라도 조윤경 면전에서는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조윤경 역시 화를 억누르듯 입술을 꼭 깨물고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비자금 빼돌리는 걸 조회장에게 누설한 게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형식적이라곤 해도 안치홍과 이혼한게 모두 내 탓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안치홍의 투자금 120억 원까지 날리게 만든 설계자가 나라고 알고 있을 테니 더욱더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래서 차마 나에게 같이 한배 타자는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하고 있는 거다.

조윤경은 잠시 동안 호흡을 가다듬더니 어렵사리 입을 뗐다.

"지난 일은 잊고 그저 성환이 돕는다고 생각하고 함께 할 수 있겠지?"

갑자기 반말이다.

항상 이런 식이다.

같이 하자고는 했지만 사실상 자기 아래라고 서열 정리한 거다.

같이 하자고 하면서도 조소와 경멸을 한껏 담은 표정까지는 감추질 않았다.

겨우 이 정도에도 감정적으로 동요가 되다니.

물론 난 회귀 후의 일은 몰라도 회귀 전 동작대교에서 뛰어들게 한 것까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윤경에 비하면 내가 한 수 위다.

아주 자연스럽게 굳은 의지까지 내비치듯 답했다.

"그럽시다. 그러지 뭐."

하지만 조윤경은 내가 반말 반쯤 섞은 게 신경 쓰였는지 매섭게 째려봤다.

나도 맞설 듯 조윤경을 응시하고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뭐 어쩌라고?' 하듯.

조윤경은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마지못한 듯 입을 뗐다.

"음. 아무래도 일을 도모하려면 안에 있어야 하니 일단 두 사람은 천하제일로 복귀하는 게 어때?"

갑자기 천하제일에 재입사하라는 거였다.

마치 자기 수하라도 되라는 듯이.

내 꿈은 천하태평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킴으로써 세계 최고 경영자이자 세계 최대 부자로 등극하는 거다. 물론 조윤경과 이상현에 대한 복수를 잊겠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천우신조의 기회를 희생하면서까지 천하제일로 돌아가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

조윤경에 대한 복수는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참을 고민하는 척하고는 답했다.

"돕기는 하겠다만 우리는 본업이 있어서, 굳이 재입사하면서까지 우리를 노출시킬 필요까지 있을까요? 그냥 여기에 남아서 지원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조윤경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은지 바로 동의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계속 반말이다.

참자.

아랫것이라고 여기는 내게 짓밟힐 때가 더 고통이 클 테니.

게다가 반말 좀 들으면 어떤가.

돈이 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내 인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회사로는 안 돌아온다 치더라도 성환이 너는 성북동으로 돌아와."

성환이 낯빛이 어두워지며 힘없이 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회장님께서 승낙하실까?"

"내가 아빠한테 잘 얘기해 놓을 테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자숙한 기간도 꽤 되고 하니깐 문제없을 거야."

조회장을 자기가 구워삶을 수 있다고 한 거다.

지난번 성환을 안가에서 쫓아낸 게 바로 자기다라고 자백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성환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지 그저 좋다며 답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말씀 좀 잘 드려 줘."

남매간의 다정한(?)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만."

조윤경 자기 말에 토라도 대냐는 식으로 눈을 치켜떴다.

"조건이라는 게 뭐지?"

"우리 팀원 중 한 명을 대신 심어놓을까 하는데요."

"어차피 예전 다들 지주사 출신들이라 댁이 보낸 지 뻔히 다 알지 않을까?"

"지주사 출신 아닌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 예전에 주간 보고받았을 테니 기억할 텐데?"

바로 천하제일엔터 출신인 건환이였다.

예전에 엔터사에 있을 때 건환이 시켜서 매주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은 걸 비꼰 것이다.

나중에 이중스파이 노릇을 시키긴 했지만.

물론 얼마 안 가 퇴사하는 바람에 제대로 써먹진 못했었다.

성환이가 맞장구쳤다.

"건환이를 말씀하신 건가요? 아주 딱인데요. 지주사에 아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 친구 비서실에 박아놓죠."

조윤경 별 고민 없이 흔쾌히 답했다.

"그러지.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해. 대신 최동욱 그자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해 놔."

남매 사이의 도원결의, 아니 작당 모의 자리에 끼어들어 한참을 어색하게 보내고는 회의실을 나왔다.

우리 팀원들은 물론이고 이상현을 비롯한 조윤경 패거리들마저 아까 들어갈 때와 지금 나올 때의 분위기가 다른 걸 직감하고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처음에 조윤경이 회사에 들어왔을 땐 쳐다도 안 보던 성환이 나갈 땐 엘리베이터에까지 앞장서서 배웅했기 때문이다.

조윤경 일행이 오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성환을 노려봤다.

"뭐야? 할 짓 못 할 짓이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 기억엔 누나도 아니라고 한 거 같은데?"

"그랬었죠."

"그런데 뭐야? 갑자기 애틋한 남매의 정이라도 돋아났나 보지? 난 또 6.25때 헤어진 남매가 상봉이라도 한 줄."

성환 불쾌한 듯 째려보았다.

"내가 설마 진심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겁니까?"

"그럼. 딱 봐도 아주 죽고 못 사는 남매였구만."

"에이 정말. 내 목표가 뭔지 모르세요? 설마 누나를 감방이라도 쳐넣는 거라도 되는 줄 아셨나?"

"그거 아냐? 그럼 너 혹시 설마 날 밀어내고 천하태평의 대주주라도 되려는 거야?"

"장난하십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천하제일 회장이라고 치자고."

"대표님은 돈이라면 똥밭에서라도 구를 수 있다면서요. 나도 천하제일이라면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거든요. 누나가 제쳐야 할 대상임은 변함없지만 잠시 시기를 늦추겠다는 거죠. 누가 계속 함께한다고 했습니까?"

아예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 조윤경이 진심이 아니었단 건 알았다는 거지?"

"누나를 내가 모르겠습니까? 자기 남편도 모두 뒤집어 씌워놓고 이혼까지 하는 마당에. 최동욱 몰아내면 그 칼로 바로 내 목에 들이댈 게 뻔한데."

"그래. 그럼 일단 돕는 척 정도는 하자고. 그러다가 기회 봐서 제치는 거야."

성환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최동욱 상무 보통이 아닌 사람이니깐. 조윤경은 너랑 최동욱 상무가 싸우게 할 거야. 둘 다 피투성이 되면 그때 나서려고 하겠지. 거기에 말려들면 안 돼."

"당연하죠. 죽 쒀서 개 줄라고요? 그 둘이 싸우게 해야죠. 근데 최동욱 상무 보통이 아니라니?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 아직 차장으로 알고 있는데. 가만 보면 이상하다니깐. 어떤 회사는 대박 뜰 거고 어떤 건 망한다고 하질 않나. 앞날이라도 보는 거야? 뭐야?"

실수로 회귀 전 최동욱의 직급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이놈이 그렇게 예리한 놈이 아닌데 이렇게 말할 정도면 평상시 나도 모르게 천기누설하듯 많이 내뱉었나 보다.

그저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내가 그랬나? 난 또 회장님 숨겨놓은 아들이라니 임원이라도 달아준 줄 알았지. 그리고 얼마나 믿으시면 운전대를 맡기겠냐?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겠지."

"그렇죠. 그 사람 나한테 엄청 잘 해 줬는데 무서운 사람이었네. 다 알면서도 그렇게 철판을 깔고. 조심해야겠네요."

사무실로 들어오니 원모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회의실이 뒷간도 아니고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왜 이렇게 다른 겁니까? 설마 화해라도 하신 겁니까?"

"원모야. 성환이 호칭이 뭐라고 했지?"

"네? 아! 회장님 아드님이요."

"그렇지. 근데 오늘부터 바뀌었다. 회장님 둘째 아들로."

"네?"

"큰 아드님은 따로 있으시단다."

원모는 영문을 모른 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고 성환은 빈정이라도 상한 듯 날카롭게 째려봤다.

외근 다녀온 건환이가 느지막한 오후에 배를 두드리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오래 기다렸다는 듯 얼굴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까딱하며 성환이와 함께 회의실로 불렀다.

건환이 어슬렁어슬렁 회의실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건환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보고 혼내려고 하는 걸로 지레짐작한 듯 의기소침하게 답했다.

"네. 잠시 외근 다녀왔습니다."

"안 물어봤거든."

"점심때랑 겹쳐서 밥 먹고 오느라고 살짝 늦었습니다."

"안 물어봤다니깐."

"넵.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뒷머리를 긁적이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는 좀 어떠셔?"

"아시다시피 낫는 병은 아니어서요. 그래도 활동 보조 선생님들이 잘 보살펴주셔서 다행히 더 나빠지지는 않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래도 병원비 같은 게 많이 나올 텐데 어떻게 감당하지? 아직 우리 투자금 회수해서 배당도 한번 안 했는데."

"아직 많이 편찮으시지 않아서 입원할 일은 안 생겨서요. 의료보험이 잘 돼 있어서 외래는 병원비가 거의 안 듭니다."

긍정적으로 얘기를 꺼냈지만, 얼굴 한쪽은 그늘져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다시 천하제일로 돌아가면 직계가족 의료비까지 몽땅 보장해 주고……."

건환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잠깐만요. 혹시 지금 저보고 회사 나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전 못 돌아갑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사실 잘린 거나 다름없어서 재입사 안 돼요."

건환이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다시는 땡땡이 안치겠습니다. 여자친구가 내일 촬영 있다고 몸 풀어야 한다고 해서 찜질방 잠깐 갔었는데 갑자기 계란이 먹고 싶다고 해서요. 두 판 시키는 바람에 다 먹고 오느라고 살짝 늦었습니다."

람지는 방송 전날에도 그렇게 먹어대다니 역시 대단하다.

"외근 나간 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라니깐. 아무래도 원모가 이미……."

"네? 원모님이요?"

원모는 천하제일 지주사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있으니 너 밖에 보낼 사람이 없다라고 하려 했었는데.

건환이가 원모 이름을 듣자마자 화가 난 듯 내 말을 끊어버렸다.

"원모님이 그러던가요? 지난주에 술 마시면서 제가 대표님 욕했다고요? 멍석 깐 게 누군데. 전 그냥 원모님이 부추기는 바람에 그런 거지 제 본심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원모님도 욕한 건 마찬가지였구요. 쪼잔하다고 하질 않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질 않나. 아무튼 원모님도 만만치 않았거든요."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불었다.

원모랑 건환이 이 자식들이 지난주에 소주 한잔하면서 나를 안주 삼아 씹어댔다고.

둘이 웃으면서 뒷담화 까는 광경이 떠오르니 울화가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감히 날 뒤에서 씹으셨겠다? 빨리 나가서 원모 같이 불러 와."

분위기가 옆길로 새는 게 느껴졌는지 성환이 제지했다.

"아 쫌! 뒤에선……. 뭐더라? 하여간 President도 욕한다는데 그게 뭐 어쨌다고? 하여간 쪼잔한 거 맞네. 맞아."

"나라님이겠지."

"또 지적질. 하여간 건환이 틀린 말 하나도 안 했구만 도대체 화는 왜 내는 거지?"

그래.

지난 오랜 세월의 고단한 직장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맘에 맞는 동료들끼리 상사 욕하는 것도 한몫했다.

앞에서 한 것도 아닌데.

설령 앞에서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흥분할 일이었던가.

성환이 말마따나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알았다."

내가 순순히 넘어가자 놀란 듯 건환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올려봤다.

"자르는 게 아니라 잠입하는 거야. 엔터사도 아니고 지주사로. 그것도 비서실로 갈 거야."

"네? 지주사 비서실이요?"

승진이 보장된 비서실 자리.

다른 계열사나 부서에 근무 중이었다면 고민 없이 받아들었을 텐데 상황이 달라진 건환이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자기가 버리는 패라는 생각에 자괴감이라도 들었던 모양이다.

성환이 나서서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직원이 아닌 창업자니깐 여기에서의 네 지위는 변함없어. 다만 천하제일로 가서 우리 옵저버가 되어 달라는 거지. 원모님은 지주사 사람들이 다 알아서 너밖에 없어. 건환이 너 잠입 액션 게임 좋아하잖아. 그냥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나와 성환이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앞으로의 계획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할 수 있지?"

다행히 건환이가 비교적 흔쾌히 답했다.

"네. 해 보지 말입니다. 근데 임무는요?"

"우선은 최동욱차장이라고 있을 거야. 그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 그리고 매주 금요일마다 네가 잘하는 거 있잖아. 주간보고 써서 보내."

"네? 주간보고요?"

"그래 네가 예전에 하던 거. 너네 집에서 내가 본 거 있잖아. 내가 짬뽕 먹고 성환이 짜장 먹은 거까지 다 적어 놨었잖아."

예전에 사직서 돌려주러 건환이 집에 갔을 때 스파이짓 하던 걸 발견한 얘기를 꺼냈다.

"아이 그때 그건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습니까. 더 이상 못하겠다고 사직서도 냈었구요."

"알아 다 알지. 아무튼 그때 그거 해 달라고 하는 거야."

"네. 정말 그거면 되는 겁니까?"

다음 주 월요일.

건환이가 지주사 비서실로 첫 출근을 했고 성환이는 성북동 안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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