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76화 (76/191)

76화 오월동주

"오늘 손님 오시기로 되어 있나?"

원모가 바로 답했다.

"아니요. 전 못 들었습니다."

대답만 하고는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뭐냐?"

"네?"

"안 나가고 뭐 하냐고? 벨 누르는 소리 안 들려?"

"제가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건환이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건환이 외근 갔다. 빨리 안 나가?"

"에이 잡상인이겠죠."

삐이삐이!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더욱 거세게 벨을 누르는 듯했다.

"잡상인이 이렇게 몇 번씩 누르냐?"

원모는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나갔다.

잠시 후.

원모가 헐레벌떡 뛰면서 돌아 들어왔다.

"누가 온다고 합니다."

"오다니? 누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그게 누구냐고?"

원모가 성환이 쪽을 바라봤다.

"천하제일 조윤경전무요."

"뭐? 조윤경?"

재벌병은 어쩔 수 없었는 듯.

남의 회사에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서도 수행비서 먼저 보내서 문 열어놓고 영접하라고 시킨 거다.

어쩌면 예전 북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직원 중 누군가가 밑에서 엘리베이터라도 잡아놓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가라고 할까요?"

자기 혼자 결정하기가 곤란했는지 나와 성환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늦었다. 원모야."

이미 밖에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행비서 둘이 자동문 출입구 쪽 센서 쪽에 붙어서는 문이 닫히지 않게 하고 있었다.

또각또각 신경질적인 발걸음 소리와 함께 조윤경이 들어왔다.

뒤로는 이상현이 경멸스런 눈길을 내뿜으며 따르고 있었다.

조윤경은 자기를 보고도 그저 앉은 채 꿈쩍 안 하는 성환에게 한마디 뱉었다.

"누나를 봤으면 인사라도 하는 게 도리 아니니?"

성환은 마지못한 듯 일어났다.

"도리는 개뿔."

분이 채 안 풀린 듯 사무실 한바퀴 빙 두르더니 소리를 질렀다.

"누가 사무실에 아무나 들이라고 했습니까? 제가 분명히 쥐새끼 한 마리도 약속 없이는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저건 비단 조윤경을 비꼬면서 욕보이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겸사겸사 마치 여기 주인은 자기다라고 과시라도 할 겸 내뱉은 거다.

증오하는 마음 가운데서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비집고 튀어나온 듯.

인간이면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곤 하지만 재벌 2세라 그런지 한층 더 강렬한 것 같다.

조윤경 역시 눈을 치켜뜨더니 표독스럽게 쏘아봤다.

역시 자기 감정표현에 충실하고 좀체 숨기려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누나가 동생 한번 못 찾아오니? 아무리 내놨다곤 해도 동생은 동생인데."

"누나가 동생한테 할 짓 못 할 짓이 따로 있지. 그 짓을 하고서도 이제 와서 누나라고. 어처구니가 없구만."

"무슨 말이야?"

"클럽에서 일이 누구 짓인지 정말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네가 누구한테 무슨 얘길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한 거 아냐."

"찔리나 보지? 무슨 일인지도 말도 안 꺼냈는데 먼저 아니라고 하는 거 보니."

조윤경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됐다. 무슨 말이든 믿겠냐? 쫒겨난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놈이."

영문도 모르는 거친 말을 주고받는 남매 싸움에 구경꾼들은 안절부절하지못했다.

단순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신나게 지켜보기만 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풀이로 언제 자기한테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이니.

조윤경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회의실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뭐 해? 따라오지 않고. 아랫것들한테 이런 모습까지 보일 거야?"

아랫것들?

우리 팀원들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두르는데, 이상현을 포함한 조윤경 일행은 늘 듣는 말이었던 듯 조금의 동요도 보이질 않았다.

나 역시 성환이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는데 조윤경이 막아 세우더니 이상현과 내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친구분들끼리 오랜만에 담소라도 나누는 게 어떨지?"

감히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라고 한 거다.

조용히 물러서는 이상현을 뒤로하고 성환이 내 팔을 붙잡았다.

"천대표는 같이 들어가시죠."

단호한 성환의 말에 조윤경이 눈짓으로 가볍게 끄덕였다.

회의실 밖에서도 어차피 들리긴 할 테지만 이상현과 얼굴 맞대고 앉기도 싫어 그냥 못 이긴 척 들어갔다.

이상현에게 한껏 비웃음을 담아 한마디 던졌다.

"아랫것은 나가서 대기하고 있으란다."

이상현은 돌아보며 눈에 살기를 띠었다.

성환이 회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조윤경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우리 사이에 오랜만이라고 안부 따윈 묻지 말자고. 무슨 일이야?"

조윤경 아무 대답 없이 눈에 불이라도 켠 듯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노려본 후 그제야 입을 뗐다.

"당신 작품인가 보죠?"

신발 브랜드 투자 건을 말하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척 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작품이라뇨?"

"깜보 말이에요. 덕분에 성환이 매형이 고생 좀 한 거 같던데."

말은 고생 조금 했다고 하면서도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끓어오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줬다.

난 이제야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그 신발 브랜드 얘기시구나. 제 작품이라뇨? 그 투자 건은 댁 남편 아니지 전남편이 낚아채 갔다고 들었는데. 덕분에 우리가 막대한 손실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하하."

한껏 비웃음을 섞어가며 즐겁다는 듯 말했다.

조윤경은 그저 무심하게 응사했다.

"그까짓 돈 몇 푼 가지고 막대한 손실까지야. 덕분에 수업료 톡톡히 치렀다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하네요. 아무튼 고마워요. 좋은 경험시켜 줘서."

120억 원의 손실이 그저 한 번의 수업료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치가 떨리는지 얼굴 한쪽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까진 숨기진 못했다.

큰 타격을 입은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음 기회엔 아예 다시는 일어날 수도 없게 잘근잘근 밟아줄 것이다.

성환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 말할라고 온 거야?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가지."

조윤경은 조용히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이게 뭐야?"

"열어 봐 봐."

성환 봉투를 열어 서류 한 장을 꺼내들었다.

제목은

'친자확인검사 결과 확인서'

유전자 감식으로 친자 여부를 확인했다는 얘기다.

맨 밑 검사결과란에는 99.98%의 확률로 의뢰인 A, B 사이는 친자관계가 성립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뭐야 이게? A, B가 누구야? 누구랑 누가 친자라는 거야?"

"누구일 거 같아?"

"우리 거라고 가져온 건 아닐 테고 설마……. 우리가 모르는 형제라도 있다는 거야?"

조윤경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인철 회장에게 혼외자식이 있다는 말이다.

회귀 전에는 분명 그런 기억이 없었는데.

내가 몰랐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곧 조성환도 몰랐다는 얘기인데 지금은 회귀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도대체 누구야?"

"나한테는 이복동생이고 너한테는 이복형이야."

"형이라고?"

조성환 크게 동요한 듯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자기가 장자이자 유일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과도 같았을 거다.

"아니, 어떻게 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거야? 그것도 우리가 모르게."

"너랑 내 터울이 크잖아. 아빠입장에서는 후계 구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그럴 수 있다.

조회장 입장에서는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후계구도를 생각해서 어떻게든 아들을 얻고 싶었을 테고 조회장 부인에게서는 조윤경을 낳은 후 몇 년 동안 임신 소식을 들을 수 없었으니 차라리 밖에서라도 낳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추측 컨대 혼외자가 어느정도 성장하면 데려오려고 했으나 그사이 조회장 부인에게서 늦둥이 아들 성환이를 얻는 바람에 집으로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고도성장기 때 재벌가 집안 사이에서 이런 혼외자 이슈는 매우 흔했었다.

성환도 조윤경 말을 알아들은 듯 침울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우전무 물러나고 나서 새로 아빠 차 핸들잡은 사람이 있어. 비서실 우전무 밑에 있던 최차장이라고."

성환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 매우 놀라며 되물었다.

"뭐라고? 최차장? 우씨 아저씨 밑에 있던 그 최동욱 차장을 말하는 거야?"

얼마 전에 조성환이 비서실에 아직 자기 사람 있다면서 자랑하듯 말했던 사람이었다.

회귀 전에도 우전무와 함께 조회장 뒤에서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최동욱 상무다.

우전무의 부사수로서 비자금운영을 도와가며 조회장으로부터 꽤 신임을 얻고 있는 임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숨겨놓은 아들이었을 줄이야.

어쩐지 매서운 눈매가 꽤 닮은 것도 같았다.

"맞아. 그 사람이야. 아빠가 보통 믿는 사람이 아니면 운전 절대 안 맡기는데 경력으로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운전대를 맡겼다는 게 하도 이상해서 말이지. 게다가 어쩔 때 보면 아빠랑 닮아 보여서 혹시나 하고 머리카락 수집해서 유전자 검사 맡겼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거지."

성환은 큰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듯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한참 후에 입을 뗐다.

"그런데 그걸 지금 나한테 얘기하는 이유가 뭐지?"

"아빠가 얼마 전에 고문변호사 통해서 유언 공증을 바꿨다는 얘기가 있어. 너무 이상하잖아. 갑자기 혼외자식을 가까이 두질 않나 유언장까지 바꾸고."

조윤경 역시 똥줄이라도 타나보다.

비록 비자금 몰래 빼돌린 걸 남편이 뒤집어썼다고는 하지만 조인철회장이 분명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물증은 없더라도 심정적으로는 안치홍이 조윤경과 공모했거나 최소한 논의 정도는 했을 거라고.

그래서 조회장이 유언 공증을 바꾼 것에 대해 잔뜩 경계하는 거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제라도 집에 들어가서 아들 노릇이라도 제대로 하라고? 아님 아들은 나 혼자니까 형은 필요 없다. 혼외자식은 내치라고 말이라도 할까?"

성환이 잔뜩 흥분한 듯 소리쳤다.

자기는 집에서 쫒겨나 듯 나와 몇 달에 한 번 아버지 얼굴 보기도 힘든데, 갑자기 어디서 형이라고 나타나 매일 아버지와 얼굴 마주치고 살갗 부대끼며 지낸다는 걸 생각하니 아들 자리를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엄마 아들도 아닌데 우리가 힘을 합쳐서 몰아내야 할 거 아냐? 그놈한테 천하제일 다 넘길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만 있을 거야?"

"아니지. 가만있을 순 없지."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철천지원수라도 된 양 서슴없이 분노를 뿜어대더니 이제 와서는 갑자기 나타난 공동의 적에 같이 대항하기라도 하려는 듯 두 손을 맞잡으려 한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출생의 비밀, 혼외자, 상속 분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성환이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반은 넘어갔다.

조윤경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갑자기 생각지도 않게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이복형에게 천하제일그룹을 뺏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공포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나까지 회귀 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철천지원수와 힘을 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치고 팔짝 뛸 심정이었다.

조윤경이 희미한 웃음을 띠며 성환에게 제안했다.

"일단 최동욱을 몰아낸 다음에 천하제일을 계열 분리해서 승계받는 게 어때?"

천하제일 그룹을 둘로 쪼개서 물려받자는 건데.

뱀의 혀로 달콤하게 유혹하는 거다.

최동욱을 몰아낸 후에는 성환이를 재치려할 게 뻔하다.

교활한 조윤경은 태연한 척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잘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성환이 결연한 듯 주먹을 불끈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완전히 넘어갔다.

덕분에 난 완전히 꼬였다.

사실 나야 머지않아 세계 최대의 부호가 될 사람이니 천하제일이야 최동욱이 차지하든 조성환이 차지하든 상관없이 그저 조윤경만 밟아버리면 그만인데 일이 복잡하게 됐다.

잠시동안이지만 조성환 남매와 한배에 올라타서 최동욱을 보내버리고 난 후 기회를 봐서 조윤경을 치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저 방관자모드로 조성환과 함께 팔짱 끼고 구경만 하다가 조윤경이 최동욱한테 날라 가면 그때 나타나서 조윤경을 짓밟아버리는 게 나을까?

두 번째 경우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가장 좋겠지만 만약 반대로 조윤경이 이긴다면?

최동욱을 날려버리고 천하제일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다면 다시는 조윤경에게 복수할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성환 역시 천하제일 후계자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될 것이고.

어쩔 수 없지만 눈 딱 감고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철천지원수와 한배를 타야하다니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려왔지만, 지금으로선 뾰족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잠시 후 성환이 두 주먹을 꽉 쥐곤 내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같이 가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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