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미끼
100만 원이 넘는 지출로 쓰리긴 했다만.
원모의 적진 침투는 성공적이었다.
안 봐도 훤했다.
회사 다닐 때 자기 돈 쓸 때는 자판기 커피 한잔 뽑을 때도 벌벌 떨던 놈이 갑자기 정장을 쫙 빼입고 나타나서는 후배들 밥 사준다며 강남의 양대창집을 데려갔으니.
그 소식은 메신저를 통해 반나절도 안 돼서 사무실 전체에 돌았을 것이다.
심어놓은 직원을 통해 결국 안치홍의 귀에까지도 들어갔을 테고.
나와 성환이가 큰 투자회사를 차리고 대박 투자건 검토하고 있다고 떠벌린 덕에 며칠도 안 지나서 효과가 느껴졌다.
며칠 뒤 깜보 주대표를 찾아갔을 때였다.
바쁜 일 있다며 직접 오라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보내주신 사업계획 저희가 검토 완료했습니다."
"그렇군요. 마침 저희도 여기저기 VC들과 조율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 미팅 때만 해도 읍소만 안 했을 뿐 어서 투자 좀 해 주십시요라고 사정하다시피 했었는데 지금은 살짝 거리를 둔 느낌마저 들었다.
안치홍이 주대표에게 낚시질을 한 게 틀림없다.
"주대표님 사업에 대해서 저희 내부 구성원들 모두가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성환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네 주대표님. 정말 대박칠 거 같습니다."
면전에서 치켜세우니 주대표 잔뜩 기고만장해져서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업체들 쪽에서도 사업성이 좋다며 연락을 많이 해 오고 있습니다."
좋댄다.
착각은 자유다.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다.
"저희가 20억을 한 번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네? 20억이요?"
주대표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지분율 20%에 20억이요."
지난번 미팅 때 대략 최소 5억 최대 10억까지 얘기했었는데 한꺼번에 20억을 쏜다고 하니 주대표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업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내부적으로 최대치로 해 보자고 결정했습니다."
주대표 급하게 짱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마 안치홍 측으로부터 대략 10억 정도 투자할 수 있다는 언질을 받은 상태였을 텐데 우리가 더 큰 금액을 불렀으니 고민 꽤 들었을 거다.
주대표 안절부절못하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아닙니다. 화장실이 좀 급해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리를 붙잡고는 방을 나갔다.
귀를 기울여보니 역시 화장실을 간 게 아니었다.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갔는지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주성태입니다."
"……."
"말씀하신 대로 그쪽에서 왔습니다.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제안을 하네요."
"……."
"사업계획이 너무 좋다면서 15% 지분으로 20억을 투자하고 싶다고 합니다. 좋은 조건이라 거절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역시 첫인상이 맞았다.
사기꾼이다.
20%에 20억을 15%에 20억이라고 그새 구라를 풀었다.
투자금은 똑같더라도 지분율을 낮게 쳐주면 그만큼 자기한테 이득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협상의 한 과정이니 꼭 사기라고 할 순 없지만.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적당히 둘러대서 보내겠습니다. 대신 지금 말씀하신 건 꼭 지키셔야합니다."
수화기 상대편의 소리가 들리진 않았으나 아마도 우리보다 좋은 제안을 던진 게 분명했다.
미끼를 물었다.
통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것처럼 물기도 없는 마른 손을 바지에 닦는척하며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요즘 들어서 수시로 배가 아파서요."
"네, 시원하십니까?"
"그런데 아까 어디까지 말씀하셨죠?"
"저희가 제안을 드렸습니다. 20% 지분으로 20억 원 투자의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그랬었죠."
모른 척.
너무나 태연한 듯 말해서 정말 그새 잊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엿듣는 능력이 없었다면 이자의 페이스에 말렸을지 모른다.
"그럼 저희의 제안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주대표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답했다.
"네 우선 대표님 제안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이사회 통해서 최종 논의드리고 조만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시간 끌기용 핑계를 댄 것이다.
아직 안치홍과 구두 협의만 했을 뿐 계약서에 싸인한 것까진 아니니 우리 제안을 바로 팽개칠 순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 안치홍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텐데 덥석 우리 제안을 받기도 어려웠을 테고.
"그렇게 하시죠. 연락 부탁드립니다."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
성환이 살짝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원모님 얘기가 안치홍 귀에 들어간 게 맞을까요? 잘 모르겠네. 미끼를 물은 건지 안 물은 건지."
통화 소리를 엿듣지 못했을 테니 전후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주대표가 아까 정말 화장실 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닌가?"
"아니야. 통화하고 왔어. 아마 안치홍하고 했겠지."
"에이. 설마 밖에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겁니까? 왜 이리 매번 이런 상황에서 확신하는 거지? 가만보면 꼭 들은 것처럼 말한다니까."
이 자식이 눈치라도 챘나.
"그게 아니라. 아까 들어올 때 물기도 없는 손을 바지에 문지르잖아. 화장실 갔다온 척 할라고 그런거지."
의구심 반 경외심 반쯤을 섞은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야 루팡이야? 언제 그런 걸 다 봤데."
"홈즈겠지."
"아 참나. 지적질 좀 하지 말라니깐요."
"알았다, 의미만 통하면 된다고. 알았다고."
* * *
며칠 후.
역시 주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표님 저희 제안 생각해보셨습니까? 저희는 다 세팅해 놓고 계약서 싸인만 해주시면 바로 20억 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대표 잠시 곤란한 듯 머뭇거리더니 입을 뗐다.
"그게……. 저희가 다른 VC로부터 투자받기로 했습니다. 워낙 조건이 좋아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대표님께는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끊으면 재미가 없다.
정말 안치홍이 맞는지 확인도 해야겠고.
게다가 지금 나의 반응이 그자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오버 액션이 살짝 필요하다.
"아이 주대표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저희 다 의사결정이다 뭐다 준비 다 끝냈습니다.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조건이……."
"대표님. 간곡하게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맞춰드리겠습니다. 어떤 조건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미 그쪽이랑 지분 양수도 계약서에 싸인까지 해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비통함에 잠긴 듯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대표님.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게 되었군요. 그렇다면 혹시 투자해주신다는 업체가 어딘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것도 좀……."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CH가 맞죠? 그것만이라도 답해주시죠."
흠칫 놀란 듯하면서도 애써 담담하게 답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죠?"
역시 안치홍이 미끼를 물었다.
"네. 양아치라고 우리 업계에 명성이 자자해서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자였군요."
이왕이면 이간질이라도 해 보자는 맘에 둘러댔다.
말은 없었지만, 수화기 너머 걱정스러운 듯한 반응이 전해져오는 듯했다.
뚜뚜뚜뚜.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스피커폰으로 같이 듣고 있던 성환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소리를 질렀다.
"됐어. 독 빠진 밑에 물 붓기가 어떤지 맛좀 봐라."
"밑 빠진……. 됐다. 의미만 통하면 되지."
안치홍이 늪에 발을 들였다.
빠진 걸 알게 된 후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한 발을 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깊이 빠질 수밖에 없을 거다.
성환이 잠시동안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듯싶더니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돌아봤다.
"대표님. 투자건 추천받은 게 하나 있는데 말씀드릴까 하고요."
지난번에 보고 안 했다고 욕먹은게 떠올랐는지 미리 구두보고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뭔데? 무슨 업종?"
"신발 관련된 업종인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신발이라니.
말을 도중에 끊고는 꾸중하듯 답했다.
"뭐? 신발? 그런 거 안 돼. 최저가랑 최고가만 살아남는 시장인 거 너도 이제 알잖아."
역시 또 그런다는 식으로 노려봤다.
"하여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니깐. 엄청 급해 가지고."
"알았어. 말해 봐."
"신발 추천해 주는 어플이라고 하는데요."
뭔가 있어 보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예전에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쌈박한 느낌이 왔다.
"뭐? 어플? 신발 추천?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말하고 있는데 중간에 끊어먹은 사람이 누군데."
"알았어. 이제 말해 봐."
"끝났는데요."
"뭐라고? 신발 추천이라고 한 거밖에 없는데?"
"그게 지금 알고 있는 전분데요?"
"뭐라고? 장난하냐?"
"언젠 또 그때그때 보고하라면서. 뭐랬더라? 단무지가 안 오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오는게 낮지, 늦게 와서 짜장이 불면 안 된다나 어쩐다나. 비유도 이상해 하여간. 짜장은 불어야 제맛인데."
불어 터진 짜장이 낫다는 거 빼고는 맞는 말이다.
평상시 자주 내뱉던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럼 어쩌라고?"
"어쩌긴요. 지금 찾아가 보죠. 뭐. 그쪽 대표는 약속 같은 건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네. 롸잇나우!"
성환이의 말과 동시에 일어나서 외투를 챙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지금', '당장'이라고 외치면서 다그치곤 했었는데 역으로 당하는 거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허름한 주택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무실이 자리했던 그 동네를 오랜만에 찾아갔다.
스타트업이 자리한 본사 사무실.
여긴 우리 예전 사무실보다 심했다.
그래도 우린 4층이어서 창문을 열면 옆 건물 사이로 하늘이라도 살짝 보였지만 여기 사무실은 반지하라 열린 창문 사이로 자동차 바퀴와 바삐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신발만이 보일 뿐이었다.
꾀죄죄한 지하창고에 자리 잡은 사무실보다도 이 회사 대표의 행색이 더 참혹했다.
지하창고 냄새를 모두 빨아들인 듯 퀘퀘한 냄새가 풀풀 풍겨져 오는 너저분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신발 추천해주는 업체를 운영한다면서도 자기는 반 정도 찢어진 듯 너덜너덜해져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아니 슬리퍼라고 하면 슬리퍼가 너무 슬퍼할 듯.
슬리퍼라고 하기보단 쓰레빠, 아니 그냥 쓰레기다.
성환 역시 예의 따윈 집에다 두고 온 듯.
상대편이 보는 앞에서 엄지와 검지로 코를 잡아서 막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상대측 역시 예의나 격식 따위는 차리지 않는 듯했다.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앉으라고 권하자 성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속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의자에 펴고는 그 위에 앉았다.
상대방은 이 역시도 개의치 않는 듯 자연스럽게 커피를 타려 했다.
유통기한이 십 년은 지났는지 봉지를 뜯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커피 가루가 종이컵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저흰 괜찮습니다. 방금 커피 마시고 왔습니다."
"제 껍니다."
"아. 네 그렇군요."
봉지를 수저 삼아 훽훽 돌리더니 봉지에 묻은 커피를 빨아 먹었다.
드러운 놈.
이런 놈이 무슨 패션을 추천한다고.
그냥 일어나서 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힘들게 먼 길을 온 게 아까워서라도 온 김에 들어나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어떤 사업모델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신발 추천하는 어플을 만드는 중입니다."
"어떤 신발이요?"
"신고 다니는 신발이요."
뭐지.
신선하다.
성환이가 그게 알고 있는 전부라고 했던 게 이해됐다.
도무지 남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있는 사람인 듯.
"저희가 사업계획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사업계획은 시간이 없어서 아직. 지금 어플 출시하게 급해서요."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투자 유치를 원하는 자세로는 영 꽝이다.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신지요?"
"글쎄요. 많으면 좋지만 당장은 뭐 2, 3억 정도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개발자들 좀 챙겨 줄라면요."
"네, 그렇군요."
더 이상 물을 말도 없었고 물어 봐야 대답도 뻔했다.
답이 없을 듯.
그냥 조용히 일어나서 인사하고 나가는 게 낫겠다.
"네 감사합니다. 저희가 내부적으로 논의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상대 역시 쿨했다.
성환이 이제야 생각난 듯 명함을 꺼내서 건넸다.
아까 첫인상에 큰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명함 교환할 생각도 못 했었나 보다.
나도 명함을 꺼내자 상대편은 주섬주섬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누렇고 꼬깃꼬깃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는데 얼핏 명함 속 이름이 떠올랐다.
김범룡.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헉!
설마 그 김범룡?
천재 개발자, 괴짜 경영자로 불리며 스타트업 신화를 이룬?
이대로 일어나서 돌아간다면 천추의 한이 될 수도 있다.
문밖으로 이미 나간 성환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뒤돌아섰다.
"다시 앉아. 빨리 가서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