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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73화 (73/191)

73화 함정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책상에 고지서 같은 게 놓여 있었다.

건물주로부터 받은 청구서였다.

역시 성환이가 말한 대로 임대료는 부과되지 않았다.

그러나 맨 밑 관리비 란에 이상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무려 450만 원!

설마 잘못 봤겠지.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으나 역시 단위는 바뀌지 않았다.

손에 힘이 스스륵 빠지더니 청구서가 떨어졌다.

"야! 조성환!"

고스톱 치다가 고함에 놀랐는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에이. 지금 고할지 스톱할지 중요한 순간인데, 망쳤잖아요."

"지금 그깟 고스톱이 중요해? 진짜 돈도 아닌데?"

"그럼 뭐가 중요하지? 인생에서 재미가 전분데."

틀린 말이 아니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말만 하면서 정작 실천 하나 못하고 있는 내가 잠시 부끄러워졌다.

그저 조용히 청구서를 주워서 내밀었다.

"금액 좀 봐 봐."

성환이 신경질적으로 훽 낚아채 갔다.

"네 봅니다, 봐요. 임대료 빵원, 관리비 450. 도대체 뭐가 문제지?"

"뭐라고? 보고도 느끼는 게 없어?"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느끼라는 건지. 그냥 뱅뱅 돌리지 말고 말하시죠."

"관리비 450이 말이 되냐고. 이사 오기 전에 회사 임대료가 얼만지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잡은 것도 아닌데."

"그쪽 월세는 45였어."

"엥? 45? 하루나 일주일도 아니고?"

"월세라고 월세. 한 달!"

"말도 안 돼. 어떻게 임대표가 한 달에 45가 될 수 있지. 그럼 하루에 이만 원도 안 한단 얘기잖아. 어떻게 강아지 호텔보다 싸지?"

이놈이 개집이랑 비교했다.

물론 크기만 클 뿐 딱히 다를 것까진 없었지만.

"알았어, 강아지 호텔이든 아파트든 아무튼 이전 사무실 임대료가 45만 원이었거든. 근데 지금 관리비만 그 열 배가 됐잖아."

관리비만 받는다고 했을 때 정확히 따져봤어야 했다.

비싸 봐야 삼사십 될까 했었는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다시 돌아가자. 여긴 도저히 안 되겠다."

"뭔 소리지? 이사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네가 한 게 있던가? 내 기억엔 다 끝나고 온 거 같은데?"

"참 나 관리비 그거 쪼끔 얼마나 된다고. 이제부터 돈 많이 벌면 되잖아요."

"투자처가 있어야 말이지. 딸랑 하나 있던 대박 건은 네 잘난 매형이 채갔으니깐 그런 거 아냐."

성환이 갑자기 눈을 부라리더니 정색을 했다.

"자꾸 그 사람을 두고 매형 매형 하지 마시죠. 기분 몹시 나쁘니깐."

"알았어.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지 미처 몰랐다. 너의 매형 매형을."

"아 참! 하지 말라니깐 그러네."

진심으로 버럭했다.

"알았으니깐 돈 벌 궁리나 좀 해. 고스톱은 집에나 가서 치고."

"요즘 그렇지 않아도 투자처 물색하고 있거든요?"

"어이 그러신가? 투자한답시고 클럽 같은 데라도 가나 보지?"

성환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클럽이라니."

마약 사건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는 클럽 얘기를 꺼내 살짝 미안했다.

"미안. 끊었다고 했지."

"됐어요. 아무튼 여기 건물주가 소개해 준다는 사람이 하나 있거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아예 놀고만 있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 무슨 사업하는 사람인데?"

"신발인지 의류인지 아무튼 그런 거 비슷한 거 한다고 하더라구요. 이번 주에 미팅 약속 잡을까 하는데 사무실로 오라고 하면 되겠죠?"

"야. 그런 건수가 있으면 진작 보고를 해야지."

성환이 못 알아들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네? 뭐라고요?"

표정은 마치 '너한테 보고를?'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밀리면 안 된다.

여기서 깨갱하면 대표로서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보고 말야. 중요한 건수 있으면 그때그때 구두로라도 보고를 해야지."

약간 목소리가 컸는지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에이. 무슨 업종인지는 알아야 말을 하던지 하죠."

깨깽.

들이받으면 어찌 반격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다행이었다.

"알았어. 그럼 미리 파악할 수 있는거 파악하고 약속 잡아서 오라고 해."

"그럼 사무실 이사는?"

"알았다. 그냥 여기 있자. "

그래.

이왕 온 거 그냥 써야겠다.

관리비가 비싸긴 하나 임대료는 공짜이니 강남에서 아무리 저렴한 곳을 찾더라도 이보단 비쌀 것이다.

게다가 이제 번듯한 사무실도 생겼으니 손님도 언제든지 오라고 할 수 있고 보안 걱정할 필요도 없는 데다 이래저래 근무 여건이 좋아져 모두들 만족하고 있으니.

* * *

사무실 이전 후 첫 손님이 방문했다.

건물주인 성환이 친구가 소개해준 업체 대표가 첫 방문자였다.

사실 최신 기술을 보유한 회사도 아니고 단순히 스포츠용품 회사라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성환 친구의 적극적인 추천에 시간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비싸긴 해도 관리비만 받는 착한 건물주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성태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새까만 피부에 다부져 보이는 체격.

꽤 믿음을 주는 듯한 인상이었다.

외형상으로 전형적인 의리파 사나이 범주에 속할 법한.

그러나 사실 저런 스타일에서 사기꾼들이 많다.

게다가 두 손으로 건넨 명함은 술집 웨이터도 아니고 금빛 찬란한 문양이 박혀있어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딱 봐도 허세 잔뜩 부리는 스타일인 듯.

사무실 뷰, 날씨와 취미 등 시시콜콜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저희가 천천히 사업계획도 검토해 보고 방문드릴까 했는데 직접 오라고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당연히 방문드려야죠."

사실 자금이 필요하다고 해도 웬만큼 잘나가는 스타트업은 VC를 직접 찾아가지 않는다.

기술력 등에 자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VC들이 알아서 먼저 찾아가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몇 번 튕겼는데도 굳이 찾아오겠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찾아오는 데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떤 계획 때문에 자금이 필요하신지요?"

"네 저희는 조그맣게 트레이닝 복으로 시작해서 꽤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운동화와 아웃도어용품까지 확대할 계획이 있어서요."

"네? 제조를 하신다고요? 저희는 제조업에는 기본적으로 투자하지 않습니다만."

제조업은 토지, 건물, 설비 등 초기 투자자금이 많이 투입되어 우리가 투자할 만한 사이즈가 아니다.

더군다나 재고도 부담해야 하니 리스크만 크고 돈도 안 되기 때문이다.

"저희가 제조를 직접 하지는 않습니다. 제조는 가격경쟁력 있는 업체에 맡기면 되고 저희는 마케팅에만 치중할 계획입니다."

"그럼 마케팅하는 데만 자금을 사용하신다는 건가요?"

"네. 초기 광고비가 많이 필요해서요."

"투자금액은 얼마나 생각하시는지요?"

"네. 최소 5억에서 최대 10억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조를 직접 하는 것보단 구매단가가 높을 텐데 가격경쟁력이 있을까요?"

"네. 저희 마케팅 노하우로 브랜드 가치를 높여서 그만큼 비싸게 팔면 승산이 있습니다."

"혹시 생각해놓으신 브랜드 이름은 있으신지요?"

"네. 깜보라고 정했습니다."

기억났다.

한때 잠시나마 선풍적인 인기를 끈 브랜드였다.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넘어서는 초고가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리다가 어느 순간 꼬꾸라진 브랜드다.

회귀 전 그 브랜드 신발 한 켤레를 산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신어본 날 집에 들어왔을 때 신발을 벗고는 놀랐었다.

신발 안감의 염료가 묻어나왔는지 양말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바로 망한다.

여기에 투자하면 한 푼도 못 건진다.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왔는데 면전에서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땐 좋은 핑계가 있다.

"네 대표님. 브랜드 이름이 아주 멋진데요. 사업계획서 보내주시면 저희가 내부적으로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볼 필요도 없다.

그냥 3일 정도 묵혀놨다가 전화해서 미안하다. 회사 내부적으로 설득하기 힘들었다고 한마디 하면 끝이다.

"아, 네. 그럼 저희가 사업계획서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주대표 눈치가 없는 건지 행간을 못 읽는다.

내가 정말 유망하다고 판단했으면 브랜드 이름 하나 물어보고 끝냈을라고.

이 정도 눈치도 못 채니 망하는 거다.

미팅 후 주대표를 배웅하고 성환이를 불렀다.

"넌 어떻게 생각해?"

"반반이요."

"반반이라니?"

"제조공장 좋은데 구한 다음에 마케팅 잘해서 하이엔드 브랜드로 포지셔닝만 잘할 수 있다면 승산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반반이라고 한 거죠. 대표님은요?"

두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려보였다.

"꽝이야."

"네?"

"매입가격이 매우 저렴하거나 아니면 품질이 월등히 높아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할 거거든. 신규 업체니까 가격결정권이 없으니 저렴하게는 못 살 거고 하이엔드로 가야 한다면 품질이 좋아야 하는데 그러면 매입가격도 높아져서 이익이 떨어지지."

"매입가격이 높으면 판가도 그만큼 높이면 되잖아요."

"듣보잡 브랜드를 일류 브랜드보다 비싸게 산다고?"

"광고 많이 때린다고 하잖아요."

"그걸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는 거야. 지금 적게 투자한다고 해도 나중에 계속 투자가 따라줘야 해. 그러다 보면 결국 망할 거 뻔히 알면서도 지금까지 쓴 돈이 아까워서라도 더 쏟아붓게 되고 결국 늪에 빠진 걸 알게 되었을 땐 이미 회복 불능 상태가 되는 거지."

성환 내 생각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 어투에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설득이 수월해진다.

"이번 건은 그냥 Pass하자."

"잠깐만요. 우리가 안 한다고 그냥 넘깁니까?"

"왜? 추천해 준 친구 눈치라도 보는 거야?"

성환이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대표님 생각엔 이거 망하는 거 확실한가요?"

"확실해."

미래를 알기에 확신에 찬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럼 안치홍 그자한테 넘기죠."

"뭐?"

"그자가 지난번 중고 거래 플랫폼 회사 뺏어가듯이 뺏어가라고 하자고요. 돈이 한 번 들어가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들어갈 거라면서요. 독 빠진 밑에 물 붓듯이."

"밑 빠진 독이겠지."

"아, 참나. 의미만 통하면 됐지. 맨날 지적질이야."

"아무튼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예요. 안치홍이 일단 투자하면 계속해서 추가 투자가 필요할 거고 이미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겠죠. 그러다 보면……. 아웃."

"그렇지. 그런 게 있었네."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으라고. 제대로 한 번 맥여 봐야지. 다신 못 일어나게."

설령 이 건으로 안치홍이 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거 뺏었다가 제대로 당하고 나면 다시는 뺏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목이 믿을만하지 않구나 생각할 테니.

그러나 미끼를 덥썩 물게 할 방법이 문제였다.

"어떻게 하지? 이제 그놈들이 도청도 못 하는데."

"원모님을 이용하자고요."

"에이 원모가 우리 사람인 거 뻔히 아는데 그자가 넘어가겠어?"

"넘어가게 해야죠."

"어떻게?"

"아시다시피 원모님이 입이 가볍잖아요."

"그렇지. 입 싼 거 하면 사대문 안에서 넘버 원이지."

"대규모 투자 건이 있는데 대박날 거 같다고 흘리는 거예요."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예요. 예전 지주사 재무팀 직원들이죠. 지금은 잘렸다곤 해도 안치홍이 얼마 전까진 재무팀장이었으니깐 심어놓거나 연락하는 직원이 아직 있을 거잖아요. 결국 그자 귀에 들어가겠죠."

평소 원모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나불대는 걸 못 참는 스타일이니 딱이다.

성환은 묘안을 낸 게 스스로 기특한 듯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이럴 땐 칭찬 한 번 날려 주는 것도 괜찮다.

"잘했어."

"뭐지? 이런 건조한 어투는?"

"칭찬해줘도 뭐라 하네."

"아니, 멘트가 아니라 말투를 말하는 거잖아요."

"알았어. 감정에 격한 어투로 말해줄게. 잘했어. 아주."

"똑같구만 뭔 개뿔. 암튼 원모님께 말씀드리시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 원모를 불렀다.

"원모야!"

대답이 없다.

저건 들었는데 씹는 거다.

"원모야. 좋은 소식이다."

그제야 들린 척 고개를 쳐들고는 내 자리로 왔다.

"네. 부르셨습니까?"

"예전 재무팀 직원들 있잖아. 해규랑 수진이 등등 다들 불러서 밥 한 끼 사라."

"네? 정말요?"

이유 따윈 묻지도 않은 채 공짜 밥 생각에 그저 좋다고 히죽거렸다.

원모에게 미션을 하달하고는 성환을 쳐다봤다.

반응이 없자 일단 달라는 손짓으로 팔을 뻗었다.

"내 카드? 이건 내 일이 아닌데요."

할 수 없이 내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건네줬다.

"원모야. 적당히 써라. 지주사 근처에 무한 리필 같은 데 많잖아."

"대표님. 혹시 예전 회사 고참이 회사 나간 후 찾아와서는 잘나간다고 자랑해요. 근데 무한 리필 삼겹살 사주면서 말하면 그 말을 믿겠습니까?"

"당연히 안 믿지."

"아예 약속장소에 나오지도 않겠죠. 차라리 내 돈 내고 사 먹고 말지 하겠죠."

"그렇지. 하지만 너 같으면 나올 거 아냐. 맨날 나왔고."

정곡을 찔린 듯 움찔했다.

"그거야 예전엔 저한테 물어보질 않았으니깐요."

그랬다.

선약 있는지 또는 갈 의향이 있는지는 묻지도 않은 채 무조건 그냥 가자고만 했었다.

메뉴도 내가 정했고.

"그래 내가 정말 미안했다. 이번엔 네가 메뉴 정해서 맘대로 먹고 써라."

"넵!"

흐뭇하게 카드를 낚아채 갔다.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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