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짜장면
이름 석 자를 듣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소연이나 감정에의 호소는 물론이고 더 이상 협상의 여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선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
안치홍!
날려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바로 뒤통수치면서 반격해 올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원모는 우리 둘 눈치를 보느라고 안절부절못했다.
원모도 이제 원팀의 일원일뿐더러 혹시 생길 수 있는 실수라도 막고자 대략적인 상황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조윤경의 계략으로 성환이가 감옥에 가고 나도 회사를 나오게 된 것.
그리고 최근 안치홍과 관련된 일들을 공유해 줬다.
"아니 나쁜 놈들이네요. 그것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욕을 늘어놓는데 갑자기 성환 쪽을 의식하고는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친누나 욕을 면전에서 해대니 살짝 눈치가 보인 것이다.
성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나도 이제 그것들과 아무 사이도 아니니깐."
"원모야! 근데 네가 왜 이렇게 흥분하냐! 누가 보면 철천지원수라도 되는지 알겠다."
"조성환님 고생하신 거 생각하니 분해서 그렇죠. 대표님은 전혀 안 그러신가 봅니다."
딸랑딸랑.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역시 순간 포착 잘한다.
"단지 그것뿐이야?"
"네?"
"분노 포인트가 그거뿐이냐고."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저 회사 잘린 것도 그렇고 올해 결혼 미룬 것도 그렇구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두 눈엔 불길이 이글거렸다.
순진한 놈.
나 같으면 그냥 그게 전부였다고 했을 텐데.
"원모님! 자발적으로 퇴사하고 여기 조인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성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아. 네 그게 꼭 잘렸다기보단……."
사무실에 돌아오자 성환이 수첩을 책상에 던져버렸다.
"벌써 복수라도 하려는 거야?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러게. 죽 쒀서 개 줬네."
사실 투자 건을 날린 것은 아쉬웠지만 그보단 아직 그들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난 명함을 판 적도 어디에 건넨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네 뒤를 밟았겠지. 워낙에 재벌 티를 내고 다니시니."
"참나. 내가 무슨 티를 냈다고. 건물에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뒤를 밟았다 한들 회사 이름을 어떻게 알겠어요. 저놈들이?"
"그거야 지난번 원모가 룸살롱에서 안상무한테 아는 척한다고 떠벌렸으니까 그런 거지."
말 끝나기 무섭게 원모를 노려봤다.
억울하다는 듯 원모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 그때 몰랐잖습니까. 미리 말씀이라도 좀 해주시죠.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요."
"알았어, 입 무겁다 너. 그러니깐 이제부터라도 조심해. 그만 좀 나불대라고."
"네. 근데 지나가듯 얘기한 걸 기억해냈다고요?"
성환이 확신에 찬 듯 답했다.
"매형 그자가 머리 하난 좋아요. 이상한 데 써서 그렇지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번 투자 건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우리 중에?"
그렇다.
박대표도 계약서 싸인도 하기 전인데 어디 가서 나불대진 않았을 테고.
여기 우리 사무실에서 새어 나간 거다.
그렇다면.
스파이다.
설마 건환이가 이중스파이하다가 전향이라도 했나?
아니면 김철수이사가 딴맘이라도 먹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성환이는 당연히 아니고 원모도 스파이였다면 아까 여기서 새 나갔다는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김이사와 건환이 둘 중 하나라는 얘긴데.
때 마침 외근을 나갔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
티 내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실패했다.
다들 힐끔힐끔 보는데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티가 너무 났다.
눈치 빠른 김철수이사가 성환에게 물었다.
"조성환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성환이 대답과 동시에 나를 쳐다보고 턱짓했다.
나보고 얘기하라는 거다.
"이사님 여쭤볼 게 좀 있습니다. 건환이도 와서 들어봐 봐."
"천대표 갑자기 무슨 일이야?"
건환이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대표님?"
"아무래도 우리 이번 투자 건이 새 나간 거 같아요. 천하제일 안상무가 잘리자마자 벤처캐피털 회사를 바로 차리더니 이번 투자 건을 낚아채 갔습니다."
"정말이에요?"
건환이 처음 들어본 듯이 격한 반응을 내보였다.
알면서 연기한 거였으면 대종상 남우주연상감이다.
김철수이사는 역시 연륜 있게 본질을 꿰뚫었다.
"그럼 우리 중에 누군가 흘렸다는 건가?"
"네. 지금 상황을 볼 때 답은 그거밖에 없어요."
김철수이사가 우리 얼굴을 쓰윽하고는 둘러봤다.
"누구지? 지금 말하지. 어차피 곧 밝혀질 텐데."
기자 시절 다그치듯 취재하던 버릇이 나왔다.
그러나 반응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다들 김이사와 건환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김이사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날 의심하는 거야?"
내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얘기해보자고 한 거죠."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의심 가득한 눈빛까지 숨길 순 없었나 보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후.
건환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혹시 몰카나 도청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에이 뭔 헛소리야!"
"영화 찍냐?"
주위의 성토에도 아랑곳하지 않더니 건환이가 조용히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상한 물체를 들고는 사무실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여기저기 들이댔다.
몰카 탐지기였다.
영화에서만 봐 왔었지, 실제로는 처음 봤다.
탕비실 근처 정수기 쪽으로 다가가자 격한 소리가 들려왔다.
삐삐삐삐!
"여깁니다."
건환이가 정수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뒤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검은색 조그만 장치 같은 걸 꺼내 보였다.
"도청긴데요."
이어서 바닥에 내팽겨쳐 버리고는 발로 짓밟았다.
"아니 누가 여기다 이런 짓을?"
성환이 짧게 읊조렸다.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누나 짓이지."
원모가 조용히 손을 들고는 나를 쏘아보듯 쳐다봤다.
"대표님께서 지난주 내내 불 끄고 퇴근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번에 갈구면서 얘기한 걸 기억해 낸 거다.
"그걸 믿냐? 네가 자꾸 야근했다고 구라치니까 그냥 그렇게 말한 거지."
내가 손가락을 뻗어 건환이를 지목했다.
"여기 도청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네? 우리 중엔 범인이 없잖습니까. 여기서 새 나갔다면 도청이나 몰카밖에 없겠죠. 설마 대표님께선 우리 중에 범인이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탐지기를 들고 다닌다는 게 너무 이상하잖아.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말이지."
"불금이잖아요."
"불금이 뭔 상관인데?"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조심해야죠. 얼굴도 알려진 친군데."
건환이 부끄러운 듯 살짝 귓불이 빨개졌다.
의구심이 풀렸다.
"자자 서로 의심하지 마시죠. 우리 중에 없다는 건 우리가 잘 알잖아요."
"의심은 대표님이 하고 계신거 아닌가요?"
건환이 아직 빈정상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듯 했다.
"미안해, 그냥 해 본 소리야. 왜 이래, 심각하게. 암튼 오늘 당장 출입구 비밀번호 변경하고 이제부터는 음식도 시키지 말자고. 보안 철저하게 합시다."
성환이 턱을 괴며 말을 꺼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그럼 번갈아 가면서 당직 근무라도 설까?"
다들 나를 째려봤다.
바로 손사래를 치며 웃어넘겼다.
"농담이야."
성환이 턱 괸 손을 빼더니 책상을 내려쳤다.
"그냥 이사 가시죠."
"이사라니? 어디로?"
"강남이요. 출퇴근하기 멀어서 짜증도 나는데 이번 기회에 가까운 데로 가시죠."
"야. 너네집이랑 가까울라고 회사가 이사 가냐? 네가 근처로 오면 되지."
"아무래도 보안이 철저한 오피스빌딩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긴 주차장도 없는 데다 손님 모시기도 좀 그렇잖아요."
성환이 말이 맞았다.
한 번도 손님을 초대해 본 적이 없었다.
찾아가기만 했을 뿐.
듣고만 있던 김철수이사도 거들었다.
"조성환님 의견이 맞는 거 같네. 난 여기도 맘에 들긴 하지만 아무래도 사무실이 강남에 있어야 명함 주는 맛이 난다라고 할까?"
어차피 조성환이 출자한 돈도 있으니 충분히 이사할 수 있다.
그래 이 기회에 강남 진출하는 거다.
"그러시죠. 가시죠. 강남으로."
"네!"
이제 출근하면서 등산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다들 기뻐하는 눈치였다.
"원모야!"
"넵!"
척하면 척.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으나 영 매가리가 없는 게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자기한테 시킬 거라는 걸.
"잘 들어 봐. 강남구에 있어. 톰크루즈도 침입이 어려운 초고층 빌딩에, 지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고 아주 보안이 철저한 최신식 건물이야. 그런데 희한하게도 보증금하고 임대료가 말도 안 되게 저렴해. 찾아 봐."
대답이 없다.
돌아보니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안 나가고?"
"에이 대표님! 그런 데가 어디 있습니까?"
"뭐라고?"
"그건 미국산 한우 사 오라는 말이랑 같잖습니까."
"미국산이 한우일 수가 있나?"
"제 말이요. 엄청 좋다와 싸다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를 포기하시죠. 강남이긴 하지만 오래된 건물로 할까요? 아님 강남은 아니지만 보안 확실한 최신식 건물로 할까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별수 없다.
명함에 강남이라고는 박아야겠고 임대료는 싸야 하니 오래된 건물을 찾을 수밖에.
대답하려는 찰나, 성환이 끼어들었다.
"그냥 강남 새 건물로 가시죠."
"야. 아무리 네가 출자 많이 했다고 하지만 그건 투자용이지 사무실 임대용은 아니다."
"그 정도는 괜찮아요."
"아니 내가 안 괜찮다니깐. 대주주인 내가 반대한다고."
"하나 봐둔 데가 있어요. 친구 거니깐 그냥 관리비만 받으라고 해도 될 거예요."
"정말? 그런 조건으로 할 수 있어? 그럼 진작 말해 주지."
"그런데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성환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치명적이라?
불안감이 엄습했다.
안 좋은 거부터 먼저 말해 주지.
이놈은 맨날 좋은 거부터 말해서 실컷 기대하게 해 놓고 재 뿌리는 스타일이다.
"치명적인 단점이란게 뭔데?"
"배달이 안 된대요."
"파든(Pardon)? 뭐라고?"
"거긴 짜장면 배달 못 시킨다고요. 배달 음식 반입 금지요."
나라 잃은 슬픔이 이랬을까?
세상을 다 잃은 듯한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묻어났다.
성환의 말에 모두들 기겁했다.
"나가서 먹으면 되지? 뭔 문제야 그게?"
"배달이 좋지 않아요?"
표정에 진심이 묻어났다.
"야! 배달이 왜 좋아 다 불어 터져서 오는데. 나가 먹을 수 없으니깐 집에서 시켜 먹는 거지. 넌 집에 밥 놔두고도 햇반 먹냐?"
짜장면 배달을 경험한 이후로는 매주 한두 번씩은 꼬박 시켜 먹더니 그새 중독이라도 된 듯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꼴이다.
* * *
사무실 이사 날.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으니, 마치 파란 하늘에서 햇빛을 쏟아붓고 있는 듯했다.
테헤란로와 선정릉 공원이 한눈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뷰에 모두들 넋을 놓고 있었다.
신축건물이라 아직 다 빠지지 았았는지, 새집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페인트, 실리콘 등 각종 화약 약품의 톡 쏘는 냄새마저 향기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짐이라고 해봐야 각자 노트북과 집기 등이 전부여서 따로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고 각자 짐을 챙겨서 옮기는 걸로 했다.
그래도 이사는 이사.
간단해 보여도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다.
특히 원모는 천하제일 때부터 쓰던 데스크톱과 모니터를 들고 오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모야. 그냥 새 컴퓨터 하나 사라."
원모가 바로 손을 내밀었다.
"돈 주시죠."
"아니다. 그냥 그거 써라. 어차피 인터넷만 되면 되는데."
"대표님. 어떻게 회사가 컴퓨터도 안 주고 자기 거 가져와서 쓰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컴퓨터 주는데 회사로 가든지."
"죄송합니다."
조용히 돌아서서 짐 정리하는 척했다.
잠시 후.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성환이었다.
"이사 다 끝나니까 인제 기어들어 오냐?"
"그럼 끝나기 전에 옵니까? 방해만 됐을 텐데."
대단한 놈.
어차피 일 안 할 거 너네들 생각해서 일부러 끝날 때쯤 왔다고 얘기한 거다.
"알았어. 네 자리 정리나 해."
"나가시죠. 이삿날엔 짜장면 한 그릇 해야 한다던대요."
"짜장면은 이삿짐 나른 사람들만 먹는 거야."
"내가 사는데요."
"가자! 다들 짐 안 챙기고 뭐 해?"
멀지 않은 곳에 중국집이 있었다.
건환이 메뉴판을 잡고 인원수에 맞춰서 요리를 시키려 하자 성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
"보통 요리를 한 사람에 하나씩 먹냐?"
"두당 요리 하나 면 하나는 기본이죠."
건환이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을 이어갔다.
요리를 어느 정도 먹으니 면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들 사이로 짜장 하나만 랩에 씌워져 있었다.
내가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뭐죠 이게?"
성환이 괜찮다는 듯 조용히 손짓했다.
"아, 내가 따로 부탁한 거예요. 배달 기분 나잖아요. 먼저들 드세요. 난 10분 정도 있다가 먹을게요."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