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71화 (71/191)

71화 거절

며칠 뒤.

초록 창 포털뉴스에 천하제일 그룹의 임원인사 발표 기사가 조그맣게 실렸다.

성환이와 김철수이사 말 대로 승진이나 보직 변경 명단에 우전무와 안치홍상무의 이름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임원은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가 아니라 위임계약을 통해 업무를 위탁받은 자다.

언제든지 해임, 즉 자르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두 사람은 해임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사임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설령 버텼다고 해도 자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물론 비자금 조성을 협박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아무리 사위일지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동작대교 남단에서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조회장 입장에서는 분하겠지만 그냥 한몫 챙겨줘서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전무와 안상무도 돈 좀 챙겨서 입 꾹 다물고 그저 사라져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윤경은 이제 돈줄이 막혀서 천하제일그룹 주식을 야금야금 사 모을 수 없을 거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할 테지만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세를 키워야 했다.

흐뭇하게 인터넷 기사를 보던 중 갑자기 뒤통수가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성환이 얼굴이 확 들어왔다.

하마터면 얼굴끼리 부딪칠 뻔.

"아이. 깜짝이야. 뭐야 대가리 안 치워?"

"대가리가 뭡니까? 대가리가. 저렴하게."

내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씨익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뭐랬냐'라는 듯이.

"이게 뭐? 어쩌라고?"

"내 말 맞잖아요."

통상 인사 시즌보다 몇 달 빠르게 발표가 난 것도 그렇고 안치홍과 우전무가 나가리된 것도 그렇고 자기 말대로 됐다고 뻐기는 거다.

"그게 뭐?"

"비서실 안에 아직 내 사람들이 좀 있다구요."

"비서실 누구?"

"우전무 밑에 있던 최동욱 차장이라고 이번에 회장님 차 핸들 잡은 사람이 있어요. 입사한 진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왠지 친근한 게 끌린다고 할까? 아무튼 확실히 내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최차장 말고도 몇 명 더 있구요."

회귀 전에 우전무 밑에서 비자금 운영하던 최상무를 말하는 거다.

내 기억으로는 나와 조성환한테 그렇게까지 우호적이진 않았던 것 같았는데.

역시 이놈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다.

"그 사람들이 다 네편인 거 같아?"

"아니면?"

"안상무가 나가리될 분위기니깐 슬쩍 너한테 붙은 거 아냐.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조윤경 쪽으로 붙을 수 있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라는 말 몰라?"

"에이 어떻게 사람이 지조 없게 그럴 수 있어요?"

"먹고사는데 지조가 무슨 소용이야?"

"먹고사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물론이지. 인생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기본 중의 기본이니깐."

성환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태어나서 한 번도 돈에 대한 고민 비슷한 거라도 한 번 해 본 적 없을 테니 이해 못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넌 직장이 어떤 의미 같냐?"

"음……. 자아실현의 장이라고 해야 하나?"

수업 시간에 졸지는 않은 듯.

딱 교과서에 적힌 답변 그대로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되물었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직장은 먹이활동의 무대 뭐 그 정도 아닐까? 비둘기한테는 사람들이 먹을 거 던져주는 공원일 거고 기러기한테는 애들이 새우깡 던져주는 바닷가 모래사장일 테고."

"결국 직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거죠?"

"정확해. 이제 알겠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내 편인 듯한 사람들이 내 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

"항상 내편네편은 없다는 거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변할 뿐."

성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표님도 마찬가지?"

너도 내 편이 아닐 수도 있냐고 대놓고 물은 거다.

답변이 바로 나오질 않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지금 투자 건이나 빨리 진행하자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는데 하필 원모가 보이질 않았다.

"원모야!"

그러자 탕비실 봉지 커피 박스 뒤에서 원모 얼굴이 쓰윽하고 올라왔다.

고개 처박고 자고 있어서 못 봤던 거다.

안 자고 있었던 척 태연스럽게 답했다.

"네. 대표님."

눈을 똑바로 떠서 급히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왼쪽 얼굴에 눌린 자국까지 없앨 순 없었다.

"잠은 집에 가서 자라."

어처구니없다는 듯 두 손을 펼쳐 올렸다.

"안 잤는데요?"

성환이 원모쪽으로 돌아보고 조용히 왼쪽 빰을 가리켰다.

그제야 얼굴을 만져 보고선 자국난 걸 알았는지 둘러댔다.

"어제 늦게까지 야근했더니 깜빡 졸았나 봅니다."

"어제 일요일이었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지난주 내내 야근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난주 내내 내가 불 끄고 들어갔거든."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대표님."

"죄송하긴. 졸리면 휴게실 가서 자고 오든지, 나가서 사우나라도 다녀오든지 당당하게 자라고. 졸린데 억지로 앉아만 있다고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니깐."

원모가 사무실을 한 바퀴 훽하고 둘러보더니 답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 휴게실이 있었습니까?"

"꼭 휴게실이라고 적어놔야 휴게실이냐? 그냥 아무 데나 쉬면 거기가 휴게실이지."

"네, 알겠습니다."

원모가 조용히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뭐 하는 거지? 퇴근이라도 하게?"

"사우나 갔다 오려구요. 당당하게요."

"그냥 당당하게 집에 가지 그래. 내일부터 나오지 말고."

"아닙니다. 농담 한 번 해 봤습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외투를 옷걸이에 다시 걸어 두었다.

손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보였다.

"죽는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지난번 중고 거래 회사 투자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한동안 성환이와 함께 조윤경 날리는 작업하느라고 그 건을 원모에게 맡겼었다.

반쪽짜리 승리이긴 했지만 어쨌든 조윤경 일당을 내치는 데 전력투구했으니 당초 약속대로 성환이가 이 투자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네. 그쪽 대표랑 거의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싸인만 남았습니다. 헤헤."

꼬리만 안 흔들었지 꼭 칭찬이라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히죽거렸다.

칭찬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힘마저 거의 안 든다.

세 치 혀만 나불거리면 될 뿐.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굿잡!!"

"네?"

이 자식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설마 못 알아들었나?

"아냐. 그냥. 좋은 직업이라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제 적성에 딱 맞는 거 같습니다."

정말 못 알아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성환이 어이가 없었는지 턱이 빠진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금액이랑 지분율은?"

"네. 말씀하신 데는 5억 원 투자하고 5% 받기로 했습니다."

"우리 말고 다른 VC(Venture Capital)는 몇 군데나 들어오는지 알아?"

"네. 우리 포함해서 5억씩 모두 4개 업체가 투자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금액이나 지분율 모두 적정하다.

"대표님! 그렇지 않아도 싸인하기 전에 그 회사 박대표랑 만나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지금."

"아. 네."

대답만 있고 액션이 없다.

"뭐 해?"

"네?"

"뭐 하냐고?"

"네. 적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다이어리를 꺼내 적는 시늉을 했다.

"아니, 누가 받아적으래? 빨리 전화해서 시간약속을 잡아야 할 거 아냐?"

"아, 네."

어쩔 때 보면 눈치껏 빠릿빠릿한데 어쩔 땐 둔하고 느려터졌다.

일관성 없는 자식.

어쩌면 자기 유리한 쪽으로 바로바로 태세 전환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 같기도 하고 암튼 종잡을 수가 없다.

원모가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박대표님! 천하태평 김원모이사입니다."

직급 뻥튀기한 게 찔렸는지 곁눈질로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따로 직급이 있는 것도 아니니 대표이사 빼고 아무 명함이나 파고 다니랬더니 정말 이사 명함이라도 판 듯.

"저희 대표님께서 시간 괜찮으시다고 해서요. 당장 오늘도 괜찮고 내일이나 모레는 어떻십니까?"

"……."

원모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번 주에 가능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그렇군요. 할 수 없죠.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내 눈치를 살폈다.

"왜? 시간 없대?"

"네. 이번 주에 일정이 꽉 찼다고 다음 주에 뵙자는데요."

"분위기 왜 이러지? 투자하겠다는 회사 대표가 만나자는데 감히 튕긴다고?"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정말 바쁜가 보죠. 요즘 잘나가는 거 같더라구요."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이건 좀 예의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예의 좀 어긋났다고 쭉쭉 날아갈 이 회사에 투자를 안 할 수도 없고

자존심은 좀 상하더라도 참아야 했다.

돈을 위해서라면 똥 밭에서 구를 준비도 되어 있는데 이까짓 자존심 따위야 잠깐 접어놓으면 그만이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니.

* * *

다음 주 금요일 오후.

성환, 원모와 함께 투자대상 회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당초 수요일로 잡았던 미팅 약속을 상대측에서 당일에 펑크 냈다.

물론 참았다.

처음부터 내가 핸들링할 걸 괜히 원모에게 맡겨놨다가 갑을관계가 바뀐 듯했다.

하지만 갑이면 어떻고 을이면 또 어떤가.

돈만 많이 벌 수만 있다면야.

테헤란로 이면에 위치한 스타트업 사무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남구이지만 주변 분위기는 전혀 강남 같지 않은 동네였다.

명함에는 강남구로 박아놓고 싶지만, 임대료로 큰돈을 낼 수는 없을 때 딱 알맞은 입지 조건이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누구 찾아오셨습니까?"

"네. 천하태평에서 나왔습니다. 박대표님 계십니까?"

잠시 후 내선전화를 돌리더니 퉁명스럽게 답했다.

"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도 없이 그냥 들어가라는 손짓뿐이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대표이사실이라고 적힌 방이 보였다.

똑똑!

문을 두 번 두드렸으나 답이 없다.

귀를 기울여보니 안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알아서 돌려보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노크.

똑똑!

통화를 끊었는지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버선발로 뛰쳐나올 거까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푸대접까지 받을 줄은 몰랐다.

박대표란 사람은 책상 위로 두 다리를 올려놓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마지못한 듯 끙끙대며 다리를 내려놓았다.

기선제압이라도 할 요량인지 팔짱을 낀 채 맞이하는 그의 얼굴엔 퉁명스러움이 가득했다.

"들어오시죠."

"네 안녕하십니까. 천하태평의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안면이 있던 원모와는 간단히 눈인사만 나눴고 초면인 성환과는 악수를 나눴다.

박대표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앉자마자 입을 뗐다.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드리고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누가 오든 가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한배를 탄 후에 앞으로 어떻게 같이 노 저어 나갈지가 더 중요하죠."

박대표가 곤란한 표정을 거두질 않았다.

"네 그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분위기가 안 좋다.

조용히 원모 쪽을 돌아보니 자기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박대표 작심한 듯 헛기침 후 말을 꺼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천하태평의 투자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네?"

가뜩이나 기분 안 좋았던 성환이 빈정이라도 상한 듯 정색했다.

"뭐라고?"

내가 재빨리 손을 내밀어 성환이를 제지했다.

흥분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박대표님. 저희는 5억 자금 다 마련해놓고 내부적으로 이사회, 주주들 동의까지 모두 얻어서 의사결정 완료했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바로 송금해 드릴 수 있습니다."

돈 투자해 주겠다고 사정하는 꼴이라도 된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수십 배가 될 수도 있는데.

"죄송합니다. 저희 내부적으로는 그쪽 회사 투자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회사의 미래를 알지 못한 성환이 더 이상 참지 못한 듯 내질렀다.

"돈 싸 들고 보내 주겠다는데 이게 뭐야? 약속도 몇 번씩 펑크내질 않나. 이제 와서 꺼지라니 이게 무슨 경우야?"

갑자기 튀어나온 반말에 박대표가 매우 당황했으나 잠시 후 안정을 되찾고 말을 이어갔다.

"밸류를 더 쳐주겠다는 데가 있어서요."

"더 쳐주다뇨?"

"천하태평을 포함한 4개 업체에서 100억 밸류에 5억씩 5%로 얘기됐잖습니까? 그런데 다른 업체가 200억 밸류로 쳐주겠다는 데가 있어서요."

"뭐라고요? 두 배로요?"

"네. 20% 지분 다 들어가는 조건으로 40억을 투자해 준다는 업체가 있어서요."

같은 지분율을 내주고 돈은 두 배로 받는다면 회사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리상 어떻게 그러실 수 있죠?"

"천하태평이 시간을 끈 것도 있었고 워낙 조건이 좋아서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차마 같은 조건으로 우리가 두 배 금액을 투자하겠다라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아무리 비전이 좋다고 해도 향후 몇 년간 상장하지 않을 테니 투자금 회수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여유자금을 몽땅 쏟아부어서 투자할 만한 곳이 아니다.

아쉽지만 포기하고 다른 업체를 찾을 수밖에.

"박대표님. 그럼 하나면 여쭤봐도 될까요? 몽땅 투자하겠다는 VC가 어딘가요?"

"CH입니다."

"처음 들어봅니다만."

"네. 신생 업체라 못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대표가 아주 유명한 분이라고 하더라구요."

"대표가 누군데요?"

"안치홍대표라고 대기업 임원 출신에다가 이혼 소문도 있긴 하지만 천하제일 회장 사위라고 합니다."

아! 안치홍!

결국 또 조윤경 짓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