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강아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언성을 살짝 높이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릎을 덮고 있던 냅킨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정확하게 잡지 위로 안착했다.
민망해할까 봐 더 이상 잡지 쪽으로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거듭 죄송합니다.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자네 누군가?"
"네. 얼마 전까지 지주사 재무팀에 근무했었던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세무조사 건으로 찾아뵙고 보고드린 적이 있었죠."
조회장은 기억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똥쌍피 자뻑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한참 뒤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답했다.
"맞군. 자네가 성환이 멘토였었지."
"네, 맞습니다."
"지금도 같이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분명 조성환이 우리 회사에 조인한 걸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찌 되었든 간에 조회장 귀에는 들어갔나 보다.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걱정은 되는지 가까운 사람한테 몰래 알아보라고 시키기라고 했을 거다.
"네. 지금은 같이 조그만 투자회사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환이가 보냈나? 왜 직접 오지 않고?"
"성환이는 만류했구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겁니다."
"뭔가 그게?"
"싱가폴 H사요."
조회장 깜짝 놀란 듯 눈빛이 흔들리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극히 소수만 알고 있는 게 내 입에서 나왔으니 놀라는 건 당연하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검찰에 넘긴다고 협박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거다.
"아닙니다. 제가 우연히 들은 게 있어서요."
"들었다니? 뭔가 그게?"
"강남 술집 일대에 소문이 파다하다고 하는데요. 사위이신 안치홍 상무와 회장님 수행비서 우전무가 자주 만나면서 돈을 물 쓰듯이 한다고 합니다."
"그 둘이 못 만날 이유가 없지. 돈이야 많은 사람들이니깐 많이 쓸 수 있을 테고."
"싱가폴 H사와 버진아일랜드 비자금 어쩌고 하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 그림 같아서 회장님께 알려드리려고 했습니다."
눈빛이 일렁거리는 게 살짝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주는 이유가 뭔가?"
"회사가 걱정되어서요. 비록 밀려나긴 했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까지 없어진 건 아닙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건가?"
자기 최측근과 사위가 짬짜미한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아십니까?"
"내가 이 판에서 희생양이라는 건가?"
"네. 고스톱판에선 호구라고들 하죠. 고스톱 자체를 친한 사람들하고만 치잖아요. 사기도 그런 거죠.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누가 사기를 당하겠습니까?"
조회장 고민에 빠진 듯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 이제 천하제일 사람도 아니어서 내용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성환이한테 회장님께 말씀드려 보라고 했었죠. 하지만 괜히 소문만 가지고 매형이랑 회장님 측근을 험담하기 싫다고 극구 거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제가 왔습니다."
이 정도 운을 띄웠으니 이제 조회장이 은밀히 알아볼 거다.
거래 내역만 살펴봐도 자기 비자금에서 그들이 상당 부분을 빼돌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참, 그리고 회장님. 구내식당이랑 청소용역 담당하는 두 회사가 우전무 차명회사란 얘기도 있습니다."
확인 사살이었다.
실망과 동시에 분노가 치미는지 테이블에 올려놓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으로의 일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우선 구내식당과 청소용역으로 우전무가 사익을 취한 걸 알아낸다.
그리고나서 싱가폴 H사와 버진아일랜드사와의 거래 내역을 파악해 우전무가 비자금을 빼돌리고 있다는 걸 밝혀낸다.
우전무한테 이를 추궁하면
우전무는 자기 비위를 빌미로 조윤경 부부가 협박하여 어쩔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조회장이 분노한다.
이로써 조윤경 부부는 out!
그때 내가 나서면 된다.
빈털터리로 쫓겨난 조윤경을,
인생의 벼랑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잡고 있는 그 손을 짓밟아버리는 것이다.
"자네. 이제 그만 나가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하시던 일마저 하십시오. 방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한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키자 조회장이 한쪽 눈을 치켜떴다.
이놈의 입방정.
다물어야 할 때 다물 줄 알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온다.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려는 찰나.
스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조윤경이었다.
"아빠!"
성환이 분명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 했었는데.
감옥에 있던 사이에 조윤경의 손아귀가 여기에까지 뻗치게 되었나 보다.
노크도 없이 혼자만의 공간에 아무렇게나 침범할 정도로.
조윤경이 조회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난 후에야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니 넌? 네가 여기 무슨 일이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눈을 치켜뜨고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다행히 조회장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방을 잘못 찾아서 들어왔다는데."
내가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화장실 다녀오다가 방을 잘못 찾았는데 마침 회장님께서 계셔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렸습니다. 회장님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방을 나가려고 몸을 돌리면서 조윤경을 쏘아봤다.
조윤경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썩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조윤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업원을 붙잡고 물어보는 소리였다.
"지금 나간 사람 손님 맞아?"
"네, 손님 맞습니다. 방금 계산 끝내고 가셨습니다."
"누구랑 왔어?"
혹시 조성환하고 같이 온 건지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혼자 오셨습니다."
바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차장 입구에서 먼 쪽에 세워놓은 차엔 조성환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밥은 먹었나?"
"지금 그럴 분위긴가요?"
"그래도 짬 내서 좀 챙겨 먹고 그러지. 기다리는 게 보통 피곤한 게 아닌데."
"뭐야? 지금 나 기사라도 된 건가?"
잠시지만 회귀 전과 뒤바뀐 상황에 살짝 흐뭇해졌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회장님은 만나 뵀어요?"
"뵙고 말씀드렸다."
"누나랑 우씨 아저씨가 빼돌린다는 걸 회장님이 정말 믿으세요?"
"물론 지금은 못 믿으시겠지. 근데 조금만 알아보시기만 하면 밝혀질 테니 기다려보자구. 회장님 성격에 듣고 그냥 넘기실 분이 아니잖아."
"그렇죠. 그런데 혹시 누나 못 봤어요? 누나도 이 호텔에 약속있는지 방금 전에 들어가더라고요. 저게 누나 차거든요."
손을 뻗어 앞에 주차된 흰색 차를 가리켰다.
"회장님 항상 혼자시라며? 그런데 아까 조윤경 전무가 들어오던데. 방으로?"
"누나가 거길 들어갔다고요?"
조윤경이 조회장의 개인 영역까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는 데 놀란 것이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 당황했지. 물론 그 전에 할 말은 다 해서 상관은 없다만."
"그러면 만난 거예요? 누나를?"
"만났지. 잘못 들어갔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더라고."
"너 그리고 회장님한테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고 말씀드렸어?"
"아니요."
"알고 계신 거 같더라고. 이제 곧 조윤경전무도 알겠지. 물론 곧 날아갈 테니 별 상관은 없다만."
그런데 갑자기 조윤경 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지더니 운전석 문이 열렸다.
눈이 부셔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면서 내리는 거 같았다.
터벅터벅 우리 차 쪽으로 다가왔다.
눈이 부셔 손으로 팔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자가 가까이 오더니, 보닛에 손을 얹었다.
자세히 보니 이상현이었다.
나와 조성환이 있는 걸 확인하더니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네. 전무님 맞습니다. 그 두 놈이 있네요."
조윤경이 확인해 보라고 한 것이다.
조성환이 있어 차마 욕지거리를 뱉을 순 없었는지, 이상현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삐딱하게 몇 번 흔들더니 뒤돌아서 가 버렸다.
"아니 저 새끼가……."
조성환이 분노가 치밀었는지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참아라, 성환아."
가까스로 손을 잡아 제지했다.
"방금 저 자식 표정 못 봤어요?"
재벌 2세로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을 거다.
"참아. 지금 욱한다고 뒤집어 봐야 우리만 손해야."
사실 지금 저런 식의 도발에 대응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저 자식도 조만간 조윤경과 함께 날아갈 것이다.
그때 나서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된다.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날이 머지않았다.
* * *
며칠 뒤.
성환이 김철수이사와 함께 문을 박차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성환도 내부 직원을 통해서 그리고 김이사는 예전 천하제일에서 같이 근무하던 선후배들을 통해 소식을 알아 온 것이다.
좋은 듯 나쁜 듯 아무튼 요묘한 표정이었다.
"뭐래? 알아봤어?"
"네. 제가 알아본 거랑 김이사님이 알아본 거랑 일치해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는데 뭐부터 들으시겠어요?"
"나쁜 소식부터."
"그럼. 좋은 거부터. 우선 회장님께서 내막을 다 파악하셨나 봐요."
"야! 네 맘대로 할 거면 도대체 왜 물어본 거야?"
아무튼 됐다.
기쁜 나머지 승리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조윤경과 이상현 이자들을 날려버릴 수 있게 됐다.
"비자금 빼돌리고 한 거까지 모두 다 아셨다는 거지?"
"네. 재무 경력도 있으시고 워낙 숫자에 빠삭하시니깐 빼박이었나 봐요."
"그래서 그자들을 어떻게 하신데?"
"우선 우씨 아저씨랑 매형은 이번 정기인사 때 옷 벗는다고 해요."
"뭐라고 파면이 아니라? 횡령했는데도 곱게 그냥 내보낸다고?"
김철수 이사가 거들었다.
"아무래도 그럴 만했을 거야. 천대표도 알 거 아냐."
비자금 조성하는데 깊숙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감방에 보내거나 파면시키는 등 불명예스럽게 퇴출시킬 순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한몫 챙겨줘야 했을 수도 있을 거다.
행여 혼자 죽기 싫다고 검찰에 가서 불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었을 테니.
"그랬겠죠. 입막음이라도 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네요. 그럼 나쁜 소식은 뭐지?"
"누나요."
"조전무가 왜?"
"누나가 빠져나갔어요."
"뭐라고? 조윤경이 몸통인데. 그냥 빠져나갔다니?"
"모든 걸 우씨 아저씨와 매형이 한 걸로 하고 덮은 거 같아요. 누나는 몰랐던 걸로 하고."
"아니 안상무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전무가 안 불었다고?"
김철수이사가 안타까운 듯 답했다.
"쉬쉬하고 있긴 한데 소문 들어보니 어차피 쫓겨나는 마당에 조전무가 뒤 봐주겠다고 한 거 같아. 서로 윈윈이었겠지. 둘 다 나가리될 바엔 하나라도 살아야 후사를 도모하지."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남편을 버릴 수 있지?"
"매형도 누나가 같이 휩쓸리면 완전 낙동강 오리알 되니깐 누나라도 살게 할라고 한 거겠죠. 어차피 나중에 언제라도 다시 합치면 되니깐 상관없잖아요. 지금 당장은 이혼 하더라도."
"조윤경전무 독하구나.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제가 그랬잖아요. 독한 여자라고. 누난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아무리 중요한 거라도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돼 있어요.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더 좋은 걸 얻기 위해서는."
조성환이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내가 아주 어릴 때고 누나가 중학생쯤 되었을 거예요. 누나가 키우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 날 애견숍에서 엄청 이쁜 강아지를 본 거예요. 회장님. 아니 아빠지 암튼 아빠한테 한 마리 더 키우자고 했는데, 아빠가 한 마리만 키울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며칠 뒤에 키우던 강아지 산책하다가 막 울면서 들어왔다는 거예요. 어떤 아저씨가 강아지 훔쳐 갔다고 하면서요."
"개장수가 훔쳐 갔나 보지. 예전엔 그런 일 흔했어."
안 좋은 일이라도 떠오른 듯 눈을 찡그렸다.
"아니. 버린 거예요. 내가 그때 놀이터에 놀고 있었어요. 누나가 줄 풀어놓고 집으로 뛰어가는 거 봤어요. 제가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미 어떤 사람이 주인 찾아주겠다고 하면서 데려갔어요. 그날이 뽀글이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에요.
나중에 제가 집에 와보니 새로운 강아지가 있었어요. 누나가 막 울면서 상심해 있는 게 안타까웠는지 아빠가 바로 애견숍에 가서 며칠 전에 봤던 그 강아지를 데려왔어요. 그런 사람이에요. 누나가."
조윤경의 악행을 떠올려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안치홍상무는 조윤경한테 그저 키우고 있던 강아지 정도였을 거다.
천하제일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을 텐데.
이혼이라도 하고 잠시 떨어져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닐 거다.
지금은 안상무와 우전무를 날린 반쪽짜리 승리에 만족할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회장이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을 거다.
조윤경이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조윤경을 날려버릴 기회는 언젠간 다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