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69화 (69/191)

69화 안녕하십니까

"참나, 거기다가 도대체 왜 내 사인을 하는 거야? 매형이 얼마나 치밀한데."

술집에서 맞부딪친 얘기를 늘어놓자 성환이 내뱉은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냥."

"스마트한 줄 알았더니 아주 그냥 꽝이야."

꼭 예전 생에서 갈굼 당하는 기분이 살짝 들었다.

마음속으로 이제는 달라졌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야 임마! 이게 적진에 다녀온 스파이한테 할 말이냐? 고생했다고는 못할망정."

"고생은요. 아주 600만 원 쓰시느라 신났겠구만."

"젤 싼 거 시켰대도?"

"술만? 그럼 안주는?"

"안주는 서비스 아닌가?"

"군만둔가? 서비스로 주게. 따로 얘기 안 했으니 젤 비싼 걸로 내왔겠죠."

당했다.

쿨한 마담인 줄 알았더니 눈 뜨고 코 베인 거였다.

"얌마. 이게 다 내 잘못이야? 얼굴 아는 사람 봤다고 인사한 원모 놈이 잘못한 거지."

"그러게 원모님을 왜 데려가 가지고. 차라리 김이사님이랑 가시지."

어차피 내 돈 쓸 것도 아닌데 선배랑 갈 수는 없었다.

수족같이 부리는 놈을 놔두고서.

"그건 그렇고 우씨 아저씨랑 누나 부부가 짜고 회장님 비자금 빼돌린다는 거 확실하죠?"

"그렇다니깐."

"증거는? 엿들었다는 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녹음한 것도 없는데."

"술집이 워낙 조용하기도 했고, 문 열어 놔서 복도에서 다 들렸다니깐."

사실대로 내 능력을 말해줄 수도 없어서 적당히 둘러댔다.

나 같아도 믿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정황상 딱딱 들어맞으니 반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네가 회장님 찾아가서 말씀드려 보는 게 어때?"

"증거도 없이 회장님께 어떻게요. 누나랑 이간질한다고밖에 생각 안 하실 텐데. 녹음이라도 해 놓았으면 몰라도."

내가 조회장이라도 그랬을 거다.

집에서 쫓겨난 탓에 누나한테 해코지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듯.

"그럼 내가 말씀드려볼까?"

"증거는요?"

"지금부터 찾아야지. 그건 그렇고 회장님은 어떻게 뵙지?"

"회사에 잘 안 나가시고 안가에 주로 계셔서 힘들 거에요. 누나랑 매형도 있는 데다 다른 보는 눈도 많을 테니."

지금 내 사회적 지위로는 조회장과 약속을 잡을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잡는다고 하더라도 조윤경의 검열이 있을 테니 안가에서는 불가능하다.

"밖에는 아예 안 나가시나?"

"나가시더라도 언제 나가실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잠깐, 가만 보자. 그게 있었네."

"뭔데?"

"회장님 루틴이 있어요. 매주 수요일 점심을 L호텔 중식당에서 드세요."

"지난번에 그때 거기? 단무지 안 주는 데?"

"네. 거기요."

원모와의 에피소드가 떠오른 듯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혼자 드시는데 아마 거동이 불편할 정도만 아니면 가실 거예요."

"혼자라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야?"

"20년 전쯤 일 년간 그 호텔에서 매주 수요일 점심마다 불도장 반값 행사했거든요. 그때 한 주도 안 빠지시고 가시니깐 호텔에서 행사 끝나고도 회장님께만 계속 할인해주셨대요. 동반인은 할인 안 된다고 해서 계속 혼자서만 가세요. 그때 잘하면 뵐 수 있겠는데요?"

역시 조크루지다.

예전 세무조사 결과 보고할 때 낡은 책상, 누런 컴퓨터 앞에서 허름한 공장 점퍼 하나 걸치고 인터넷 고스톱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꼭 자기 혼자서만 할인된다고 혼밥하러 가는 건 아닐 거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식사와 함께 명상은 물론 경영 구상도 할 겸.

"식사하시는데 들어가라고?"

"네. 두 시간 동안 혼자 식사하면서 아무도 안 들이고 종업원도 못 들어오게 하시거든요."

"수행비서도?"

"다른 데서 식사하다가 회장님 나오실 때쯤 다시 모시러 올라갈 거에요."

"알았어. 그때 해 보자."

조용히 성환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 하자는 거 아니다."

"알았어요. 그냥 갖고 있지. 다시 달라고 할 거면 왜 준 거야 도대체."

툴툴거리며 마지못한 듯 신용카드를 건네주었다.

* * *

조회장한테 들고 갈 증거를 찾기 위해 예전 재무팀장 시절 기억을 떠올리자 머릿속에서 여러 회사 이름이 스쳐 갔다.

그중에서도 싱가포르 H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조회장이 차명으로 보유한 회사다.

천하제일이 직접 해외바이어에게 판매해도 될 것을 일부러 H사를 한번 거치게 한다.

동시에 H사는 조세회피처(세금이 면제되거나 경감된 국가/지역)인 버진아일랜드에 소재한 페이퍼컴퍼니 C사(역시 조회장의 차명 보유회사)에 허위로 중개수수료를 지급한다.

이 중개수수료가 곧 비자금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천하제일 -> H사 수출금액 $100

H사 -> 바이어 수출금액 $110

H사 -> C사 중개수수료 $7(이게 바로 비자금)

천하제일이 바이어에게 직접 $110에 팔았다면 지금보다 $10의 이익이 더 남았겠지만,

H사를 한번 거침으로써 천하제일은 $10의 손실을 보고 대신 H사가 $3, C사가 $7의 이익을 가져가게 된다.

천하제일의 돈을 조회장이 빼먹는 구조다.

조회장의 천하제일 지분이 20%니, 결국 20%에 불과한 회장 개인이 80%의 대다수 소액 주주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게 바로 횡령이다.

H사 같은 빨대 기업들을 우전무가 관리하는데, 조윤경 부부가 여기에 손을 뻗친 것이다.

내가 천하제일에 근무했다면 단지 클릭 몇 번만으로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을 거다.

건환이라도 천하제일에 남았다면 이중스파이 노릇이라도 계속할 수 있었을 테니 작은 기회라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믿을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치사하지만 출납직원에게 한 번 더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민정 씨 잘 지내?"

"또 왜요?"

수화기 너머 퉁명스러운 목소리.

오랜 회사 생활을 통해 직감적으로 알아챈 거다.

약점을 빌미로 또 부탁을 해 올 거라고.

"정말 미안한데 부탁 한 번만 더 하자."

"네? 분명 지난번에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지난번 경조사비 빼돌린 거 눈감아 주기로 했는데, 그새 잊어버렸냐는 거다.

치사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말 면목이 없는데.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야."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말이죠?"

"정말이라니깐."

"뭔데요?"

"싱가폴 H사 알지? 거기와 거래한 내역 좀 봐 줘. 납품단가가 다른 업체들이랑 차이가 있는지. 민정 씨 권한 정도면 접근할 수 있을 거 아냐."

고졸 사원으로 직급은 낮더라도 중요한 보직이라 그런지 권한이 꽤 높은 편이다.

재무팀 과장보다도 오히려 더 높다.

팀장이 시키는 일도 많으니 웬만한 데에 다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을 테니.

"정말 그거뿐이죠?"

"그래. 나 좀 믿어 봐. 정말 이게 마지막이야."

"쳇, 맨날 믿으라는 사람이."

자기 컴퓨터로 확인만 하면 되는 거니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몇 번 투덜거리기만 했을 뿐 결국 받아들였다.

H사 회계장부를 직접 보면야 가장 좋겠지만 천하제일과 H사는 겉으로는 지분 관계가 일절 없으므로 같은 시스템을 쓰지 않는다.

게다가 H사 관련한 건 모두 우전무가 따로 관리하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저 천하제일과 H사와의 거래를 보고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 성환이와 함께 출납직원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어 휴대폰이 울리자 스피커폰을 바로 눌렀다.

"차장님. 전데요?"

"그래 알아봤어?"

"말씀하신대로 H사에 납품한 단가를 보니깐 다른 업체와 차이가 좀 있어요."

"차이가 얼마나 큰데?"

"대충 계산해도 15% 정도는 높은 거 같아요."

"그래? 아예 대놓고 해 먹는구만."

이걸로 장난치는 게 확실하다.

"거래금액은?"

"연간으로는 몇백억은 될 거 같은데요."

"뭐라고? 몇백억이나 된다고?"

이런 업체가 한둘이 아니니 거래금액을 다 합치면 몇천억이 될 텐데.

대충 15%이라고 하면 최소 수백억 원을 빼돌린다는 거다.

통상 비자금으로 빼돌리는 걸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단가 차이를 10% 미만으로 해서 티 안 나게 관리하는데 이건 그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조회장 파이프에 조윤경 부부가 빨대까지 꽂아 더 빨아먹으려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민정 씨 알아봐 줘서 고마워."

"앞으론 전화 안 하시는 겁니다."

"알았어."

"그런데 차장님 혹시 김원모 과장 소식 들은 거 있으세요?"

"뭐? 원모는 갑자기 왜?"

"며칠 전에 안상무님이 물으시더라고요."

"원모에 대해서 물었다고?"

"네. 예전에 근무하던 사람 중에 원모님이라고 있었냐, 지금 뭐하고 있냐 뭐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시더라구요."

안상무 술집에서 원모가 인사 건네면서 이름 얘기한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기억력도 좋고 두뇌 명석한 자다.

"나도 모르지. 근데 왜 물어본 건데?"

"글쎄요. 별말씀은 안 하시더라구요. 맞다. 그리고 조성환님하고도 어떤 관계냐고 물어보시던데요?"

조성환이 자기 이름이 나오자 옆에서 움찔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그냥 예전 재무팀에서 잠깐 같이 있었다고 했죠."

"더는 안 물어보고?"

"네."

"알았어. 민정 씨 고마워. 특별한 거 있으면 전화 주고."

"이제 통화 안 한다니깐요."

"그래, 미안해. 잘 살아야 해."

대답이 없다.

뚜뚜뚜뚜…….

끊어버렸다.

"컥컥……."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해댔지만, 성환이 표정을 보니 왠지 모르게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 봐. 매형 보통 눈치가 아니라니깐. 그러니깐 우리 누나같은 사람하고도 살지."

조윤경 생각에 불쾌했는지 몸서리쳤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겠지."

"아니야. 눈치 빠른 자니깐 조심해야 한다니깐요."

"알았다니깐. 그건 그렇고 이제 증거 확실하게 잡은 거 같으니깐 회장님 뵈면 되겠는데."

"잡다뇨? 그냥 정황증거 아닌가? 장부를 본 것도 아닌데."

"장부는 우리가 직접 볼 필요가 있나? 회장님한테 귀띔만 해 드리면 본인이 찾아보시겠지. 회장님 성격 알 거 아냐? 게다가 숫자에 얼마나 밝으신데."

성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회장님은 아무도 안 믿으시죠. 본인 자식도 못 믿으시는데 아무리 수십 년을 모셨다곤 해도 남인데 믿을 수 있겠습니까?"

* * *

수요일 11:30분.

천하제일 앞 L호텔 중식당.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에서 성환이 기다리고 난 혼자 식당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조회장이 매주 예약한다는 5번 룸과 멀지 않은 룸으로 잡을 수 있었다.

메뉴판을 들고 종업원이 룸으로 들어왔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카드 내밀며 적당히 쓰라던 성환이 얼굴이 떠올랐다.

"짜장면 하나 주십시오."

"네?"

"짜장면 하나요."

"손님 룸으로 예약하시면 메인디쉬를 꼭 주문해주셔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짜장면 하나를 메인디쉬에 담아주시면 안 될까요?"

"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말문이 잠시 막힌 듯했다.

"그러시면 홀로 안내해 드릴까요?"

짜장만 먹을 거면 홀에 나가서 먹으란 얘기다.

홀에 갔다가는 보는 눈이 많아 조용히 조회장 방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전 룸이 좋아요. 탕수육하고 팔보채도 주세요. 대신 한꺼번에 주시고요. 방해 안 받고 천천히 먹을 테니 다시 안 찾아 주셔도 됩니다."

정중하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알아들었는지 종업원이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는 룸을 나갔다.

이어서 주문한 요리들이 한 번에 등장했다.

폭풍 흡입을 하고 있는 중 식당 밖에서 특이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밑창이 닳았는지 쓰윽쓰윽 신발을 땅에 끄는 소리와 걸음을 내딛는 느릿느릿한 속도를 볼 때 조회장이 확실했다.

얼마 안 돼 마치 미리 준비라도 된 듯 음식이 들어가고 숟가락 뜨는 소리가 들렸다.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더 이상 음식 소리는 들리지 않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경영구상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대기업 총수는 역시 뭔가가 다르다.

조용히 방을 나와 조회장이 있는 5번 룸 앞에 섰다.

똑똑!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작은 소리로 노크를 했다.

문을 열자 라운드 테이블 창가 쪽에 앉은 조인철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음음."

너무 뜻밖의 방문이었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혼자 계신데 방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렇게 밖에는 뵐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다행히 조회장이 고함을 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났다라기보다는 짐짓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오해였다.

경영구상은 개뿔.

수영복을 걸친 여성들 사진으로 가득한 잡지를 넘기고 있던 것이었다.

회장님의 은밀한 취미.

남한테 피해를 주지도 않을뿐더러 차라리 아주 건전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어디든지 언제든지 여러 사람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어서 이렇게밖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성환이에게 안가에 인터넷이라도 하나 놔 드리라고 얘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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