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68화 (68/191)

68화 들켰나?

안내를 받아 들어선 내부는 의외로 아담했다.

방이 수십 개인 일반적인 고급 룸살롱과는 달리 대여섯 개 정도밖에 안 돼 보였다.

취객의 고성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역시 소수 고객을 위한 회원제다 보니 이런 조용한 분위기가 나오는 거다.

제대로 마시면 천 단위도 나올 듯했다.

잠시 후 마담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우리 처음 뵙는 거 맞죠?"

"네. 친구가 소개해줘서 왔습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문자 받았어요. 그럼 술은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원모가 다리를 꼬면서 타박하듯 답했다.

"메뉴판 아직 안 왔는데요?"

마담이 손뼉을 마주치며 배꼽을 잡았다.

"하하. 정말 웃겨요. 신선하네."

원모가 농담한 줄로 안 것이다.

진심을 듬뿍 담아 물어본 건데.

원모 몇 마디 더하게 하면 쪽팔릴 거 같아서 내가 나섰다.

"제일 싼 걸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쿨하다.

역시 이런 곳은 강요, 강매 같은 건 일절 없다.

다행히 룸이 많지 않아 집중하면 모든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안상무.

지금은 비록 한 번도 만난 사이가 아니지만, 회귀 전에는 내 직속상관이었으니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방 어디에서도 안상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 안 온 것일 수 있으니 귀 기울이고 놀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오늘 안 오면 다음 주에 또 오면 되니깐.

양심상 젤 싼 걸로 마시면서.

술이 차려지고 잠시 후 부르지도 않았는데, 도우미 두 명이 옆에 앉았다.

잠시 술 따라주고 얘기 들어주고 하다 나가더니 한참 있다가 다른 여자들이 들어왔다.

룸마다 돌아다니는 시스템인가보다.

옆자리 빨간 원피스를 입은 도우미가 나가려 하자 원모가 아쉬운 듯 투정 부렸다.

"계속 앉으면 안 되나?"

"안 될 게 어딨어요? 수고비가 들 뿐이지."

"얼만데?"

두 팔을 소파에 얹으며 호기롭게 물었다.

빨간 원피스의 그녀는 검지를 쭉 펴서 들어 보였다.

그러자 원모가 지갑을 꺼냈다.

"그 정도면 가뿐하지. 앉아있어."

지갑을 펴고는 5만 원권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 장을 더 꺼냈다.

호기롭게 뽑으면서도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지갑에 5만 원짜리를 한 장도 아닌 세 장이나 들고 다닐 놈이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절대 그럴 놈이 아닌데.

"자, 받아. 한 장 더 넣었어."

그녀는 입을 가리며 웃다가 한마디하고는 방을 나갔다.

"됐어. 그냥 오빠 택시비해요. 재밌게 놀다 가세요."

"원모야 그게 뭐냐?"

원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양어깨를 들어 올렸다.

"왜 그런 거죠? 한 장 더 얹어줬는데 왜 나가는 거지?"

"몰라서 물어? 네가 못생겨서지."

"에이, 거울 좀 보고 얘기하시죠. 그나저나 다행이네요. 정말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왜?"

"원룸 월세 낼라고 갖고 다녔는데, 며칠간 주인집 아줌마를 볼 수가 없어서요. 괜히 목돈 들고 다니다가 오늘 실수할 뻔했네요. 정말."

검지를 펴서 보였다.

"그래. 그런데 너는 이게 10만 원으로 보였냐?"

"네."

"그거 백만 원이야. 그래서 그냥 나간 거야. 착한 분이네. 창피도 안 주고."

"네? 백이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긴 다른 세상이야."

공짜로 다른 세상 경험을 하는 거라곤 하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이런 델 안 와 봤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잔 두 잔 술이 술술 넘어가는데, 밖에서 드디어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안상무님 오셨어요? 오늘 좀 늦으셨네요."

"어. 우전무님 모시고 오느라고."

"오랜만이네요. 차마담."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

분명 우호정전무 그 사람이다.

조회장의 가신이라 불리는.

검찰 조사받으러 갈 때 휠체어를 밀거나, 개인적인 일을 볼 때 운전대를 잡는 등 조회장이 유일하게 믿는다는 그 사람이다.

기사이자 수행비서인 동시에 비자금 라인까지 담당하고 있는 측근 중의 최측근이다.

비자금을 만드는 안상무와 그 비자금을 운영하는 우전무가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로지 쏘맥만 마신다는 우전무가 이런 곳에 나타나는 건 조금 의외였다.

한동안 쓸데없는 얘기를 주고받다가 안상무가 주위를 물렸다.

우전무가 기다렸다는 듯 따져 물었다.

"왜 자꾸 불러내나? 회장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역시 조회장의 최측근이다 보니 아무리 회장 사위라고 해도 반말 투척이다.

"그럼 회사에서 봅니까?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요?"

"아무튼……. 오늘은 왜 부른 거지?"

"물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넘겨주는 게 얼만데 겨우 그 정도만 돌려주시는 거예요?"

"따로 빼는 것도 한계가 있어. 회장님께서 숫자에 얼마나 빠삭하신지 몰라?"

그림이 그려졌다.

안상무가 비자금을 조성하면 우전무가 그 돈을 조회장의 여러 차명계좌로 뿌리는데, 그중 일부를 빼돌려서 안상무에게 돌려주고 있는 거다.

일종의 캐쉬백인데 그 금액이 적다고 따진 거였다.

"우전무님! 그 늙은이 맛탱이 간지 한참이라니깐요. 사대 독자 처남 새끼 감옥 간 이후로 멘탈 아주 나갔다니깐 그러네."

"아니야! 내가 보고 들어갈 땐 아주 말짱하셔. 절대 그럴 분이 아니야."

"우전무님! 지금 제가 부탁하는 걸로 보입니까?"

"뭐라고?"

"당신이야말로 수십 년 동안 몰래 삥땅쳐 온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확 그냥 노인네한테 가서 다 불어버릴까?"

"무슨 소리야 삥땅이라니?"

"당신이 차명으로 회사 차려서 단체급식이랑 청소용역으로 삥땅치는 거 모를 줄 알아?"

"아니……."

우전무 정곡이라도 찔린 듯 대답을 잇지 못했다.

내가 재무팀장을 하던 시절에도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었다.

공개입찰 같은 경쟁 한 번 없이 수십 년 동안 수의계약을 통해 구내식당과 청소용역을 특정 업체에 몰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개선이 필요하다거나 업체를 바꾸자는 의견을 내질 않았다.

단가도 높을뿐더러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여기저기 쑤셔보던 중 우전무한테 연락을 받았다.

오랜만에 식사나 한번 하자고.

식사가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지나가는 듯 슬쩍 흘렸다.

임원이 뭐하러 힘들게 들쑤시고 다니냐고.

그때 알게 되었다.

우전무가 수십 년간 해 먹고 있었다는걸.

연간 해봐야 십억 정도밖에 안 됐을뿐더러 어쩌면 조회장의 묵인하에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땐 그냥 덮었었다.

이제 보니 조회장 모르게 단독으로 해 먹고 있었던 거였다.

정말 세상엔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는 측근이 자기 돈 빼돌려서 사위한테 넘기는 것도 모자라 수십 년간 딴 주머니까지 차고 있었다니.

우전무는 한동안의 침묵 후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자네 이러는 거 윤경이가 알고 있나? 자네가 회장님 돈에 손댄다는 걸 알면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윤경이 성격에 가만 냅 둘 거 같지는 않은데?"

우전무도 똑같은 놈이다.

조윤경한테 고자질하겠다고 협박하는 거다.

"지금 저 협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협박이 아니라 충고하는 거네. 더 이상 회장님 돈에 손대지 말라고."

"와이프가 가만 냅 두는지 아닌지는 당신이 한 번 확인해 보시지."

이어서 스피커폰을 켰는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뚜루뚜루.

"자기? 오늘 우씨 아저씨 만나러 간다더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조윤경의 목소리였다.

우전무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조회장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서인지 사적으로도 막역한 사이인 거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전무님 뵙고 있는데 당신한테 할 말 있으시데. 스피커폰이니깐 말해. 들릴 거야."

이어서 우전무에게 쏘아붙였다.

"직접 한번 말해 보시지."

우전무 말은 안 하고 '큼큼'하고 헛기침만 뱉어댔다.

나이 먹고 고자질이나 하는 게 창피했는지 망설이고 있는 거다.

"아저씨? 무슨 말씀인데요. 뭐든 말해 보세요."

"그래, 윤경아. 난데.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방금은 망설인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한 거였다.

초등학생이 선생님한테 짝꿍 고자질하듯 일거수일투족을 다 일러바쳤다.

한참을 듣고 있던 조윤경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말인가요, 그게?"

"윤경이 너 앞에서 남편 욕한 거 같아서 내가 미안하다. 하지만 회장님께 더는 우를 범할 수 없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회장님께 우라니. 우를 범하는 건 아저씨 아닌가요?"

"뭐라고?"

"아저씨! 지금까지 회장님 모르게 얼마나 해 처먹은 지 우리가 모를 거 같아?"

"아니, 뭐라고?"

"그리고 아직 내가 어린애로 보여? 어따 대고 반말이야 반말이? 내가 자꾸 아저씨 아저씨 라고 해주니깐 막 친한 거 같고 맞먹으면 될 거 같고 그런 거야 지금?"

"아니, 그게 아니라."

"똑바로 안 해? 안상무가 시키는 건 내가 시키는 거니까 쫑알대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빈털터리로 쫓겨나서 콩밥 먹기 싫으면. 알겠어? 알겠냐고?"

"……."

"대답 안 해?"

한참을 가만있다 마지못한 듯.

"……응."

"우전무 똑바로 좀 하자고."

"네. 전무님."

설마 우전무는 안상무가 조윤경 몰래 혼자서 꾸민 거라고 생각했었나.

수십 년 동안 정말 조윤경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었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꼬맹이 정도로만 여겼었던 듯했다.

심리적인 충격이 상당한 듯 통화를 끊은 후 우전무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몇 분 후 터벅터벅 술집을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계속 멍만 때리실 겁니까?"

원모가 답답한 듯 투정 부렸다.

옆방 소리 들으려고 집중한 탓에 이놈하고 같이 있다는 생각을 못 했었다.

"아. 미안하다. 마셔."

"저 혼자 한 병 다 마셨거든요. 한 병 더 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알았어. 시켜. 같은 걸로."

"네. 젤 싼 거요."

그러더니 테이블 위아래 여기저기를 뒤졌다.

"너 혹시 설마 벨이라도 찾는 건 아니겠지?"

"그쪽에 있습니까? 이쪽엔 아무리 봐도 없네요."

동네 호프집도 아니고 벨을 찾고 있다니.

설명하기도 귀찮다.

"여긴 없으니까 나가서 마담 불러 봐."

문을 열고 나간 원모가 잠시 후 누군가와 얘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은 마담이 아니었다.

"잉! 안치홍 상무님이시죠? 안녕하십니까."

"……누구신지?"

저 눈치 없는 자식.

안상무와 복도에서 마주치자 아는 얼굴이라고 무턱대고 인사한 거였다.

오늘 여기 온 이유를 대충이라도 알려줄걸.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네. 전 예전 지주사 재무팀에서 근무하던 김원모입니다. 얼마 전까진 천하제일엔터 재무팀에서도 근무했었고요."

"아, 그렇군. 그런데 자네가 이런 덴 어떻게?"

무슨 일로 왔냐라기보단 월급쟁이 주제에 이런 덴 어떻게 왔냐고 물어본 거다.

"네, 지금 다니는 회사 대표님 모시고 왔습니다."

'그만 좀 닥치고 들어와라.'

'제발 들어와!'

텔레파시를 쏘아 보냈다.

그러나, 역시 저놈과는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아 맞다. 우리 회사에 얼마 전에 조……."

저 자식이 상대방은 묻지도 않았는데 처남인 조성환하고 같이 다닌다고 얘기 꺼내려는 거다.

하여간 이놈의 혈연, 학연, 지연 찾기

정말 지긋지긋하다.

다행히 원모 입에서 조성환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다 튀어나오기 직전에 문을 열고 막을 수 있었다.

"김과장. 안 들어오고 뭐 해?"

눈치 없는 원모는 서로 소개라도 시켜 주려는 듯 번갈아 쳐다봤다.

"대표님. 마침 잘 나오셨네요. 여기는 천하제일 지주사 안치홍상무님."

이어서 안상무에게 내 소개를 하려 했다.

"여기는 천하태……."

원모 말을 자르고 내가 답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조그만 무역회사 하고 있는 천대수라고 합니다."

"엥? 대표님……."

눈치 없는 자식 또 나서길래 발을 지르밟았다.

이제야 눈치챈 듯 입을 다물었다.

"아, 그렇군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네. 저희 직원이 상무님께 무례하게 아는 척한 거 같네요. 불편하게 해 드린 점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재무팀 예전 직원도 보고 저도 반가웠습니다."

말을 그렇게 해도 전혀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뭔가를 물으려는 거 같아 급하게 인사하고 원모를 끌고 룸으로 들어왔다.

"원모야. 그냥 나가자."

"네? 방금 한 병 더 시켰는데요."

"그냥 가자니깐."

잠시 후 마담이 양주 한 병을 들고 들어왔다.

"미안한데, 그거 취소하고 그냥 계산해 주세요."

"네. 미안하긴요. 잠시만요."

조성환이 준 신용카드를 건네자 쿨하게 들고 나갔다.

잠시 후 마담이 들고 온 계산서엔 상상하기 힘든 금액이 적혀 있었다.

따질 시간도 없고 또 내 돈도 아니니 그냥 영수증에 사인했다.

얼마 안 있어 핸드폰이 울렸다.

조성환이었다.

"지금 한창 바쁘거든."

"바쁘겠죠. 600이나 긁으려면. 적당히 하라니깐 아주 그냥 뽕을 뽑았나 보네."

일부러 제일 싼 거 시켰는데 욕도 먹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일일이 말다툼할 시간이 없었다.

빨리 벗어날 생각만 들었을 뿐.

"끊어. 나중에 말해 줄 테니깐."

이 자식도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게 못 맞춘다.

문자에 찍힌 금액 보고 놀라서 바로 통화버튼을 누른 듯했다.

마담이 나가고 급하게 외투를 걸치는데 옆방에서 안상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마담. 혹시 옆방 사람들 누군지 알아?"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에요. 계산도 했는데 아마 지금쯤 가셨을걸요?"

"그래? 계산했다고?"

"네, 방금이요."

"영수증에 사인한 거 있으면 가져와 봐."

헉!

조성환 카드여서 별생각 없이 서명란에 정자로 조성환이라고 쓴 게 떠올랐다.

새됐다.

원모를 끌고 술집을 도망치듯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