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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67화 (67/191)

67화 잠입

며칠 뒤.

성환은 주차한다고 며칠간 늦게 출근하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제시간에 왔다.

게다가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은 채 한껏 여유로웠다.

"이제 택시 타고 다니냐?"

"택시라뇨? 차 가져왔는데?"

"주차는?"

"주차장 한 칸 샀어요."

생전 처음 들어 본 멘트였다.

"뭔 소리야? 주차장 한 칸을 사다니? 월주차라도 한 거야? 주변에 주차장 없는 거 같은데."

"옆에 빌라요."

"빌라가 뭐?"

"주차장만 따로는 안 판다고 해서 그냥 하나 샀다고요."

주차장 쓰려고 집을 샀다니.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구나.

조성환의 출자금 19억 원은 목마른 대지에 단비가 되어 주었다.

쩍쩍 갈라진 강바닥은 어느새 물로 흠뻑 차오른 듯했다.

하루아침에 투자할 수 있는 회사가 부쩍 늘어났다.

최소 투자 규모가 몇억이나 되는 바람에 넘길 수밖에 없었던 많은 업체들이 드디어 투자 가능한 범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중 첫 번째 타겟으로 중고 거래 플랫폼을 계획하고 있는 한 업체를 점찍었다.

이전 생에서 상장까지 하진 않았으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회사였다.

장기적인 투자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조성환에게는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듯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다.

"중고를 누가 쓰겠어요?"

재벌 2세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환아. 네가 안 쓸 거 같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안 쓴다는 건 아니야."

"아니, 남의 거 쓰는데 안 찝찝해요?"

"무슨 소리야. 휴대폰도 중고로 쓰는데 찝찝하다니."

"에이, 설마 휴대폰을 어떻게. 드럽게."

"아니, 이 자식이 정말."

"정말 안 땡긴다니까."

회사 정관상 3억 원 이상의 투자에는 주식 수 2/3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다.

즉 35%를 가지고 있는 조성환이 거부한다면 투자할 수 없다는 얘기와 같았다.

33%로 할 걸 괜히 35%로 해준 바람에 비토권까지 줘버린 꼴이 됐다.

"그냥 너 지분 2% 나한테 팔지 않을래?"

"그러죠. 뭐. 까짓거 2% 그냥 19억 주시면 바로 넘길게요."

개새끼.

욕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다. 내 말 잘 들어 봐. 이 사업을 설명할 테니깐. 우선 집에 물건이 너무 많아. 그런데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그때 남한테 파는 거지 물건도 빼고 돈도 벌고."

"버리는 게 왜 아깝죠? 버려야 새 거를 살 수 있는데."

"됐어. 그러지 말고 성환님. 그냥 나만 믿고 5억 그냥 투자하면 안 될까요?"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 없다.

이 좋은 기회를 허망하게 날릴 순 없었다.

"정 그렇다면 동의는 해 드릴게요. 내 거 하나만 들어주면."

대박이 눈앞인데 뭔들 못할까.

"그래 뭐든 말해 봐. 무조건 들어준다."

"우리 매형이요. 아니, 매형도 아니지. 하여간 그 사람 요즘 여기저기에 엄청 돈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 있던데, 아무래도 뭔가 있는 거 같아요. 무슨 꿍꿍인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혹시 누나랑 같이 날려 버릴 기회가 될 수도 있잖아요."

"야! 내가 네 비서실 직원이냐? 왜 이런 걸 나한테 시키냐고."

"여기고 저기고 다 누나 사람들인데 어떡해요. 방법이 없잖아요."

조윤경의 남편 안치홍.

이 기회에 조윤경과 엮어서 같이 날려 버릴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내가 부탁해야 할 일을 이 자식이 먼저 나서주다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무슨 소문인데?"

"룸살롱 같은 데 다니면서 엄청 쓰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지주사 재무팀장이니 대관업무다 뭐다 핑계 대기도 좋고 법카 한도까지 빠방할 것이다.

"당연히 지주사 CFO니까 그러겠지. 게다가 너도 알겠지만, 재벌마다 비자금 창구가 있어. 거기에 관여하니까 여기저기 접대가 많겠지."

"비자금 창구라뇨?"

이 자식이 모른 척 하나?

회사 일에 깊숙이 관여도 안 했을뿐더러 주요 보직도 아니었으니 정말일지도 모른다.

"회장님이 정관계 로비 자금으로 쓰시거나, 하다못해 나중에 상속세 재원으로 쓰려고 따로 챙겨 놓으시는 거 있어. 그것도 재무팀장의 역할이야."

이전 생에서 재무팀장이었던 내 일이라 빠삭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난 내 역할에만 충실했을 뿐 그 돈에 손대지는 않았다는 거다.

물론 몽땅 뒤집어쓰고 죽음까지 당했지만.

조윤경 부부는 분명 다를 것이다.

마치 자기 거라도 된 것마냥 비자금 창구로 쓰이는 파이프에 구멍 하나 뚫어놓고 몰래 빼갈 게 틀림없다.

"그럼 매형이 그룹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거네요."

"그렇지. 조윤경 부부가 회장님 비자금을 몰래 빼돌려서 지주사 지분을 몰래 야금야금 담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 이것들이."

성환이 눈빛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럼 그걸 밝혀서 회장님께 알려야겠네요."

"그래야지. 회장님이 아신다면 바로 아웃이야.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방법을 찾으실 거잖아요. 여기 계신 대표님께서."

기분이 묘했다.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긴 했으나 이전 생에서 이놈이 나한테 은밀한 일 시킬 때 주로 쓰던 멘트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되새기자 그 기분을 떨칠 수 있었다.

* * *

천하제일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커피숍.

보는 눈 피한다고 밖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손님도 거의 없는 곳으로 정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회색 정장을 빼입은 한 여자가 들어왔다.

지금도 그렇고 내가 재무팀장인 시절까지 수십 년을 줄곧 출납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차장님. 잘 지내셨죠?"

반가운 척 인사는 꺼냈지만 못마땅한 표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협박이 아니었다면 분명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출납 담당 직원의 역할 중에 하나는 경조사비 명목으로 현금을 따로 빼놓는 거였다.

아무 청첩장이나 붙여서 축의금으로 현금 지급했다고 가짜로 전표를 만들어 놓고 그 현금은 따로 빼놓는 거다.

물론 빼놓은 돈을 재무팀장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시킨거 이상으로 빼놓는단 거였다.

회귀 전 이 직원이 가끔씩 내 싸인 따라 해 가면서 따로 챙겨 놓는 걸 알고 있었다.

금액이 크지도 않았을 뿐더러 평상시 일처리도 말끔해서 그냥 모른척 넘어갔었다.

한두 해 해 본 게 아니었을 테니 지금도 분명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경조사비 야금야금 빼돌리는 거 다 안다고 한마디 툭 던지니 순순히 나왔다.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민정 씨도 잘 지냈지?"

"네. 근데 무슨 일이시죠?"

다짜고짜 왜 불렀냐고 따지는 투다.

"재무팀장 안상무 말이야. 그자에 관한 모든 걸 알려 줘."

"네? 상무님은 갑자기 왜요?"

"그자 얘기를 다 해주면 민정 씨 건은 입 다물고 있을게."

"제가 그걸 어떻게 믿죠?"

"왜 그래? 나야, 나. 나 못 믿어?"

영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안상무 요즘 무슨 일 해?"

"대관업무 하시는 거 같아요. 매일매일 약속도 있는 거 같고. 하여간 재무팀 일은 뒷전이에요. 다 파트장들한테 넘겼어요."

"씀씀이는 어때?"

"법카 엄청 쓰세요. 그래도 조윤경 전무님 눈치 보는지 한도 1억에서 더 늘리진 않더라고요."

"뭐라고? 일억? 한 달에?"

역시 로열 일가이니 내가 재무팀장할때 쓰던 금액과는 단위가 달랐다.

"네, 현금도 많이 만들라고 시키고. 하여간 요즘 엄청 피곤해요."

"민정 씨가 안상무 법인카드 사용 내역도 볼 수 있지?"

"네."

"제일 많이 쓰고 자주 가는 술집 알아봐 줘. 무슨 요일에 가고 몇 시에 주로 결제하는지 그리고 금액은 얼마인지 등등 전부 다."

"그거면 되나요? 정말 믿어도 되는 거죠?"

"좀 믿으라니깐."

입에 자크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진 않았다.

다음 날, 출근 시간.

출근하자마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출납직원에게 문자가 왔다.

청담동 OO번지, 업장 이름 스타일, 매주 금요일, 11시 30분쯤 결제

그래도 성북동 안가엔 보는 눈이 많으니 자정 안에는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성환이를 불러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여기가 가장 많이 들른다는 곳인데 아무래도 가 봐야 하지 않을까?"

"가서 뭐 하려고요? 엿듣기라도 하게요?"

이 자식이 내 능력을 간파하기라도 했나.

속으로 뜨끔했다.

"룸인데 어떻게 엿들어? 그냥 맨날 들어가는 방이 똑같을 테니 방 알아놓은 다음에 녹음기라도 숨겨 놓으려는 거지."

성환이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라도 하자는줄 알았는지 조용히 손을 내밀어 맞부딪쳤다.

"미친놈."

"뭐지? 해 달래서 해 줬더니 갑자기 욕을 왜 하는 거지?"

"카드 달라고."

"카드라뇨?"

"그럼 술집 가서 그냥 앉아 있다 올까? 술이라도 한잔 해야 할 거 아냐."

"나도 안 가는데 술값을 왜 내가?"

"내가 놀러 가냐? 네 일 때문에 가는 거지. 그럼 나보고 회삿돈 쓰라고?"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더니 지갑을 꺼냈다.

"적당히 끊어 주세요. 이제 용돈 받는 처지도 아니니깐."

"알았어. 걱정하지 마. 적당히 할 테니깐."

재벌 사위가 다닐만한 곳이면 보나마나 저세상 가격일 텐데.

가격은 내 알 바 아니다.

그냥 출장 갔다 생각하고 맘 편히 놀면서 살짝 엿듣기만 하면 그만이다.

고개를 들어 원모를 불렀다.

"원모야."

"네, 대표님."

금요일 오후에 부른다는 건 안 좋은 소식인 걸 직감이라도 한 듯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오늘같이 야근 좀 할까?"

"선약 있습니다."

마치 준비라도 한 듯 대답하는 데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쉽네. 야근 룸살롱에서 하는 건데."

말 끝나기 무섭게 의자를 박차듯 벌떡 일어났다.

"같이 가시지 말입니다."

"선약 있다며?"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죠."

"죽는다."

"죄송합니다."

"빨리 짐이나 챙겨. 저녁은 네가 사라."

"당근이죠."

원모가 웬일로 순순히 응했다.

룸살롱을 가자는데 저녁 정도를 못 살까 하는 마음이었을 거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일 차로서는 제격이다.

원모 자식 자기보고 사라고 하니 일 인분씩만 먹었는데도 배부르다고 젓가락을 놓았다.

룸살롱에서 안주 집어 먹기만 해 봐라.

아주 손모가지를 두 동강 내버릴 테다.

일 차를 마치고 문자에 찍힌 주소에 도착했다.

전혀 유흥가스럽지 않은 분위기의 청담동.

주변 간판이 하나같이 모두 심플해서 들어가야지만 어떤 업종인지 알 수 있을 듯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스타일이란 간판이 통 보이지 않았다.

"잘못 온 거 같은데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둘러보니 맞은편에 검은 정장을 빼입은 어깨 두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우리가 두리번거리는 걸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잔뜩 경계하는 듯.

"원모야. 저기다 가자."

"네? 저기요?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 간판도 없는 술집은 처음이었다.

얘기만 들었었지, 임원할 때도 이런 곳을 와 본 적은 없었다.

"저기가 확실해. 가드 서 있잖아. 쫄지 말고 어깨 좀 펴."

당당하게 목을 바짝 세우고 들어가려는데, 가드 두 명이 가로막았다.

몇 년 만이던가.

이렇게 입뺀 당한 게.

난 나름 괜찮게 빼입은 거 같으니 분명 원모 이 자식 때문이다.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너 때문이잖아. 이 촌놈아."

"뭐라고요?"

원모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가드 한 명이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멤버십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입구 컷이 아니었다.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나보다.

잘못 찾아왔다고 말하려는데, 원모 대답이 조금 빨랐다.

"아, 통신사요? SKT 멤버십 있습니다."

내 쪽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 이래 봬도 VIP입니다. 요즘은 술집도 할인되나 봐요. 좋은 세상이네요. 하하."

가드 두 명이 차마 소리까지 내진 못하고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차라리 입구 컷이 낫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가겐가 보네요."

원모 팔을 붙잡아 끌고 나왔다.

"아니, 왜 안 들어가시고 나온 거예요?"

"안된다잖아. 자식아!"

"아니, 할인 좀 안 받으면 되지 그렇다고 그냥 나와요?"

설명하기 귀찮다.

이 자식한테 멤버십 술집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백 마디의 말로도 부족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KT만 되나 봐. 비싸서 꼭 할인 받아야 하거든."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죠. 그럼 야근은요?"

"다음 주에 하자. 그때까지 카드 만들어 놓을게."

"네. 그냥 넘어가기 없습니다. 제가 밥까지 샀으니까요."

* * *

다음 주 금요일.

다시 그 술집에 왔다.

빈손으로 돌아간 후 술집 이름을 들은 조성환이 전화 몇 통을 돌리더니 아는 사람 중에 회원을 찾았다.

결국 D사 둘째 아들의 추천을 받아 그 술집 멤버십에 가입할 수 있었다.

입구에는 지난주에 그 가드 둘이 역시 서 있었다.

원모 녀석 작정하고 온 듯 오늘따라 잔뜩 외모에 신경 썼다.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어찌나 처발랐는지 참기름 바른 김밥마냥 반들거렸다.

클럽이었으면 무조건 뺀찌 각이다.

"멤버십니까?"

자초지종을 들은 원모가 다행히 입을 열지 않았다.

멤버십도 가입하고 예약도 한 덕에 무사히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에서 가드 둘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지? 지난주에 통신사 그것들 아냐?"

"그러게. 여기도 이제 슬슬 맛 가나 보다. 저런 것들까지 들락거리고."

이럴 때는 내 능력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말까지 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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