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주주
불과 6개월 뿐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변해있는 듯했다.
햇볕 한 번 안 보고 살다가 강제로라도 볕을 쬐니 까무잡잡해진 거 같기도 하고.
콩밥 덕분인지 규칙적인 생활 덕분인지, 몸은 한결 좋아 보였다.
성환이 탕비실 자리를 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천하제일하고 똑같은데요?"
"당연하지. 거기서 가져왔으니까."
"네?"
손가락으로 건환이를 가리켰다.
"우리 보급병이야."
"아하."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화내지 않는 걸 보니 못 보던 사이 주인의식이 상당히 옅어졌나 보다.
조용히 커피 한 잔 청하면서 사무실 구석으로 안내했다.
"집에서 쫓겨난 거면 여자친구 집에라도 들어간 거야?"
"유라랑은 헤어졌죠. 주위에서 뽕쟁이 여친이라고 대놓고 뭐라 하니 처음 몇 달은 참고 견디는 거 같더니,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낙인은 싫다고. 말리진 않았습니다. 좋은 친구인데 좋은 사람 만나야죠."
"회장님은 만나 뵙고?"
"뵙기는 했죠. 제가 감옥 가는 바람에 충격이라도 받으셨는지 건강이 좀 안 좋아지셨어요. 특별한 일 아니면 회사도 잘 안 나가시고 웬만한 보고는 집에서 받으신 대요."
강인한 척은 해도 강인하게 보이고 싶어서였을 뿐 사실은 여린 사람이었나 보다.
근데 집에서 보고를 받는다고?
어쩐지 조윤경과 그 남편이 성북동 안가로 들어갔다더니.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지분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대리청정이라도 하듯 눈과 귀를 막고 회사를 멋대로 좌지우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벌써 작업이 끝났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놈은 이제 빈털터리?
그럼 복수는?
"혹시 벌써 지분도 다 넘기신 거 아닐까? 조윤경 전무한테?"
"그건 아닐 거에요. 변호사 통해서 몇 년 전에 이미 유언 공증해 놓으셨다는데 내용은 아무도 몰라요. 어떻게 유언 남기셨는지 엄마한테도 얘기 안 했나 봐요."
아직까진 최악은 아니다.
그러나 불리한 형세인 것만은 확실하다.
"조윤경 전무가 바빠지겠네. 그럼?"
"이제 누나가 같이 살면서 작업하겠죠. 당연히 유언장 바꾸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 성격에 한다면 하는 사람인데? 물불 안 가리고."
"그러게 그때 내가 그냥 죄 인정하라고 했을 때 말 좀 듣지 그랬냐. 집행유예 받았으면 집에 계속 있었을 거 아냐?"
"아니에요. 그래도 그때 내가 떳떳했기 때문에 결백하다는 걸 회장님께서 아셨을 거예요. 만약 집행유예 받겠다고 인정하고 반성문이라도 제출했으면, 그때 바로 유언장 바꾸고 호적에서도 파였을걸요."
조회장의 강직한 성품을 봤을 땐 아마 조성환 얘기가 맞을 것이다.
옥살이 피하자고 천하제일 그룹 넘겨받을 가능성을 스스로 걷어찬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결백하다고 생각하신다면서 왜 회사 복귀를 못 해?"
"누나가 작업했겠죠. 그룹 이미지에 안 좋다고요. 이 기회에 독립이라도 하라는 듯이."
어쩌면 성환이를 테스트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면 그룹을 경영할 깜냥도 안 될 테니 이 기회에 그릇 크기를 재보려고 함일 것이다.
성환이가 사무실을 쭉 둘러보더니 물었다.
"내 책상이 어디죠?"
"뭔 소리지?"
"내일부터 출근하려고요."
지금은 직원이 아닌 자금이 필요할 때다.
빈털터리는 절대 사절이다.
"안 돼. 너 지금 돈 없잖아. 유언장도 회장님 돌아가셔야 깐다며."
내 기억으로는 앞으로 한참 동안은 큰일 치르진 않을 거다.
"지금 돈이 없긴 하죠."
"우린 직원 따윈 필요 없다. 돈이 필요하지. 잘 가라."
성환은 황당했는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돈 없다고 꺼지라고 한 건가?"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냐. 그래도 같이 근무한 정도 있는데, 가끔 차 마시러 놀러 와라. 밥 한끼 정도는 사줄 수 있어."
"나한테 아직 천하제일엔터 지분 있는 거 몰라요?"
맞다.
감방 갔다고 줬던 거 도로 뺏어간 게 아니라면 아직 최대 주주일 거다.
꽤 올랐을 텐데 지금 가치로 하면 얼마야 도대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앉으시죠. 회장님 아드님."
"진작 그렇게 나오시지."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돈 많다고. 내일은 무슨 내일. 그냥 오늘 놀러 온 김에 출근한 걸로 하자. 가만 보자……. 출자히려면 주식을 얼마나 팔아야 하지?"
"에이. 그 주식을 팔 수는 없죠. 천하제일 그룹 차지하려면."
하긴 주식 팔았다가 조회장 귀에라도 들어가면 테스트 통과는커녕 바로 아웃이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그리고 당장 먹고살 게 없더라도 파는 건 아니다.
작은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회장에게 증여받은 지분을 판다는 건 절대 납득할 수 없을 테니.
"그런 거구나. 그럼 그만 가 줄래?"
"뭐지? 갑작스러운 이 전개는?"
"차 마시러 오기만 해 봐. 아주 그냥 얼굴에 소금 뿌려 버릴 테니깐."
성환이 답답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급해 가지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니깐."
"뭐? 빨리 말해."
"내 명의로 청담동 빌라 두 개 있거든요. 하나는 거기서 살아야 하니깐 냅 두고 남는 거 하나 팔아서 출자할 순 있는데."
"미안해. 좀 아깐 농담인 거 알지? 진작 말하지. 사람은 항상 결론부터 말해야 해. 아니 결론만 말해. 주저리주저리해 봤자 어차피 안 들으니깐."
"얼마면 됩니까? 여기 주인되려면."
이 자식이 돈 좀 있다고 날름 먹어 버릴 심산인가?
첫 제안을 던질 때다.
바로 콜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싶지만, 그렇다고 거부하자기엔 쪼금 아쉬운 딱 그 정도의 제안을.
"잘 들어. 이게 파이널 오퍼다. 금액은 19억, 지분은 35%."
"잉? 이 회사가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성환은 두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사무실을 빙 둘러봤다.
인터넷 삼매경인 원모, 게임 중인 건환이를 보더니 더욱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이야 겨우 그 정도지. 조금만 더 있으면 190억으로도 안 된다. 35%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해야 해."
"그럼 팀장님은요?"
"나? 너 들어오면 50% 되지."
"얼마 넣었냐고요?"
"우린 전부 전 재산을 갈아 넣었어."
"아니, 그러니깐 얼마냐고."
이 자식이? 흥분했는지 또 말이 짧아졌다.
"얼마가 그렇게 중요해? 전 재산이란 게 중요하지."
"그러니깐! 그게 얼마냐고요?"
"1억."
"뭐라고? 전 재산이라면서요?"
"그래 내 전 재산 1억."
성환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못내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묘하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 그렇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는 1억에 50%고 난 19억에 35%라고? 이거 완전 날강도 아닌가?"
"그럼 너도 작년에 출자하지 그랬냐?"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받을게요. 이런 쪼끄만 회사 최대 주주 해 봐야 좋을 게 뭐 있다고. 아무튼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협상 하나로 세계 1위와 2위 부자가 결정되었다는 걸 모를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다.
아니지.
사실 단돈 19억으로 세계 2위 부자가 될 수 있는 건데 오히려 내 덕을 크게 본 거다.
"조건이 뭔데?"
"천하제일 차지할 수 있게 힘 좀 보태 주세요. 누나랑 매형, 아주 밟아 버리게요."
표정을 보아하니 단순히 경쟁자를 제치겠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야! 비서실 사람들 놔 두고 왜 나한테 그래."
"못 보던 사이에 누나 사람들로 싹 다 물갈이됐어요."
"아무리 그래도 누나를 밟아 버리다니 뭔 일이라도 있어?"
"감옥에서 생각해 보니 답은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조윤경 전무가 그때 너 친구 섭외했다는 거 말이지?"
"그거 아셨어요?"
"그 일로 가장 이득을 볼 자가 누구겠어. 당연한 거 아냐?"
"얼마 전에 예전 LA에서 알던 친구 녀석한테 연락받았어요. 클럽 같이 갔던 그 친구 죽었다고요. 작년에 도박 빚으로 쫓기고 있다가 어느 날 빚 다 청산하고 당당하게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조윤경이 준 돈으로 새 출발을 했던 것이다.
"근데 도박은 절대 못 끊나 봐요. 다시 들락거리다 결국 길거리에서 총 맞았대요. 수술하고 정신 있던 마지막 날 나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나 봐요. 답 나왔죠 뭐. 누나 짓이지."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한데, 가능하겠어?"
"참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감옥까지 처넣는데 더 이상 어떻게 더 참습니까?"
이 정도 각오면 됐다.
정에 이끌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손을 짓밟는 순간이 오면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돈보다는 옅지. 오늘부터 출근이다. 빌라 빨리 팔아버리고."
팀원들을 향해 큰소리로 소식을 알렸다.
"조성환님이 오늘부터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출자도 빠른 시일 내에 할 거고요."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성환이 답례 인사를 건넨 후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자리는 어디죠?"
갑자기 원모가 일어나더니 자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환이 눈치라도 챈 듯 눈을 치켜떴다.
"왜 그러시죠, 원모님? 설마 거기가 내 자리?"
"아, 네. 원래 저희가 입사순서 어드밴티지가 있어서요. 신규입사하시는 분이 여기 탕비실 겸용 자리 차지하는 게 룰이라서요."
성환이 손바닥을 자기 귀 쪽에 대며 짜증 내듯 물었다.
"뭐라고요? 잘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요."
"네. 여기가 신규 입사자 자리…… 이긴 하지만, 2대 주주님이시니 당연히 좋은 자리로 만들어드려야죠."
상황이 변했다곤 해도 지난 습관까지 모두 떨쳐 버릴 수는 없었을 거다.
원모는 들었던 짐을 다시 내려 놓았다.
그러더니 도와 달라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19억을 출자하는 사람한테 커피 당번을 맡길 수는 없는 법.
그저 받아들이라고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천하제일엔터 글로벌사업팀 멤버가 한자리에 모였다.
* * *
다음 날 출근일.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성환이 땀을 뻘뻘 흘린 채 사무실로 들어왔다.
"감방에서 운동 안 했어? 뭐가 힘들다고 땀을 그렇게 삐질삐질 흘리냐?"
"아니, 어떻게 주차장도 없는 데다가 사무실을 구합니까? 옆 동네까지 갔잖아요."
아무도 차를 가지고 다니질 않아서 주차장은 생각조차 못 했었다.
"빌라 두 개 팔아서 출자하면 주차장 있는 데로 바로 옮길 수 있을 텐데……."
"뭔 소리? 난 어디서 살라고."
"아니다, 됐다. 조금만 참아. 한 방 터지면 바로 옮길 테니깐."
"어느 세월에……."
성환이 구시렁거리며 자기 자리에 앉더니 두리번거렸다.
저건 몇 해 전 재무팀으로 발령받은 첫 출근날 모습 그대로였다.
자기도 모르게 월스트리트저널을 찾고 있는 듯했다.
"왜? 누가 신문이라도 갔다 놨을 줄 알고?"
"아……. 아니요."
설마 설마 했는데 역시나다.
전담 비서가 없어진 현실을 깨달은 듯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12시가 넘어가자 성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드시러 안 갑니까?"
원모가 조용히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면서 답해 줬다.
"가고 싶어도 식당이 멀어서 못 갑니다. 식당 가려고 아랫마을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기가 싫어서요. 하루에 등산 두 번은 도저히 못하겠어요."
"그럼 다들 도시락 싸 오시는 거예요?"
건환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전 저녁 한 끼만 먹습니다. 여자친구랑 같이요."
다이어트에 그렇게 좋다는 1일 일식이지만, 이놈은 계속해서 살이 찌고 있다.
횟수보다는 무엇을, 얼마나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증거다.
내가 조용히 손을 뻗어 전단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여기 중국집 짜장면 괜찮아. 하나도 배달되니깐 걱정하지 말고 시켜."
"배달이요?"
"왜 그래? 짜장면 못 먹어 봤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배달을 시켜본 적이 없어서."
원모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배달을 시켜본 적이 없으시다고요?"
"네."
"태어나서 한 번도요?"
"네. 정말 전화 한 통화면 갖다 줘요?"
"당연하죠. 배달인데."
"코스로 시키면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해 줘요?"
이 자식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배달 한 번 안 시켜 본 거다.
"그러지 말고 나도 오늘 도시락 안 가져왔으니깐 네가 그냥 쏴라. 탕수육도 같이 시켜 봐."
"내가요?"
못 들을 거라도 들은 표정이었다.
원모가 전단지를 가져가더니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주문하기 시작했다.
"너 도시락 싸왔다며?"
"저녁 싸 왔습니다. 오늘 야근할 거 같아서요."
점점 순발력이 늘어간다.
30분도 채 안 되어 오토바이 세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배달원이 두 개의 철가방에서 탕수육, 양장피, 팔보채 등 요리를 바닥에 꺼내 놓았다.
"9만 6천 원입니다."
성환이 놀란 듯 되물었다.
"네?"
원모가 한 끼에 10만 원 가까이 쓰게 한 게 미안하기라도 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좀 많이 시켰죠?"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싸네. 이렇게 많이 시켰는데 딸랑 9만 원이라니."
성환은 지폐를 꺼내다가 뭔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군만두였다.
"저건 안 시켰는데요."
배달원이 뭐 이런 것도 물어보냐는 식으로 답했다.
"서비스인데요."
이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원모 쪽을 바라봤다.
옛날에 원모와 함께 간 호텔 중식당에서 군만두 오천 원어치 서비스 달라고 했던 게 떠올랐을 것이다.
'아. 군만두가 원래 서비스였구나.'라고 깨달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