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또 합류
"경쟁사 중에 이제 막 뛰어든 업체 하나를 천하제일이 인수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네? 천하제일이 갑자기 왜요?"
"TV 쪽은 이미 시장이 포화상태이니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시장을 노린 거겠죠."
"천하제일이 경쟁사 인수하는 거랑 우리 투자 건이 철회된 게 무슨 상관이죠?"
"대기업이 들어오면 초기에 막강한 자금력으로 물량 공세를 퍼붓거든요. 게다가 천하제일은 연예기획사도 있어서 연예인들 동원하기도 쉽고요. 저희가 확실한 시장지배력이 없는 상태이니 머지않아 다 뺐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내가 불과 얼마 전까지 몸담고 있던 곳이었지만, 욕이 튀어나왔다.
양아치도 아니고 아무리 먹을거리를 찾는다고 해도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넘보다니.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는 냉정하다.
하겠다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아직 이런 산업에 규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처음에 투자의사를 밝힌 회사를 찾아가 다시 협상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벤처캐피털 대표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도 몇 번을 찾아갔지만 요지부동이더라고요."
* * *
광화문 오피스타운의 랜드마크인 F센터 20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입구부터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온통 황금 빛깔로 치장한 데스크 위에는 딱 봐도 억대는 될법한 그림 몇 점까지 걸려있었다.
방문객으로 하여금 신뢰감을 주기 위함이었겠지만, 과했는지 오히려 위압감까지 들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표님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하셨나요?"
"네. 방금 대표님과 통화했었는데 회의 중이니깐 일단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정말 회의 중이었다.
"네, 지금 손님과 회의 중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기다리겠습니다."
화려하기만 했지, 사무실 자체는 조그마했다.
전체 직원이라고 해봐야 열 명도 안 되는 듯.
대표이사 사무실에 귀를 기울이니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어디선가 굉장히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상현이었다.
어쩐지. 다 된 밥에 재 뿌려진 거 같더라니…….
저놈이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지난번 비라 투자 철회한 대가는 언제쯤 받을 수 있을지요?"
"거기에 투자했으면 바로 망했을 텐데 오히려 우리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알았어. 조전무님께서 챙겨주시겠다는 약속은 꼭 지키실 거야. 단 우리가 시키는 일을 한다는 조건하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선 천하태평인가 하는 것들이 오면 문전 박대해. 그리고 이쪽 업계에서 안 좋은 소문 퍼트려. 이 바닥에 얼씬도 못 하게 밟아 놔야 하니깐."
"네, 알겠습니다."
퇴사하면서 이제 다른 물에서 놀게 됐으니 당분간은 부딪히지 않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징글징글한 악연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쫓아다니면서 훼방만 놓을 거냐' 라고 면전에서 묻고 싶었다.
이미 천하제일도 나가고 조성환과는 일절 연락도 없는 날 이렇게까지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거다.
지난 시절 내재된 열등감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지금의 승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까지 쫓아 와 내 숨통까지 끊어놓으려는 것이다.
미팅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자리를 피할까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굳이 내가 피할 이유가 없었다.
대표이사실 문이 열리더니 대표와 이상현, 그리고 누군가가 같이 나왔다.
며칠 전 광화문 카페에서 옆자리에서 쳐다본 그자였다.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더니, 천하제일 법무팀 직원이었나보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표가 비서한테 고함을 쳤다.
"김비서! 내가 아무나 들이지 말라는 얘기 못 들었어?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약속 없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자기가 속았다고 밝힐 순 없었을 테니 이해는 간다.
이상현이 마치 그만하라고 하듯 손짓을 보냈다.
"이게 누구야. 투자 구걸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소문은.
지가 방금 지어낸 말이면서 아주 악질 같은 놈.
그러나 비아냥은 내 전공이다.
"그러게 누구처럼 마님한테 굽신거리면서 편하게 노비 생활이나 할 걸 주인행세 한번 해 보겠다고 이게 뭔 고생인지."
"뭐라고?"
"왜? 찔리는 거라도 있나 보지?"
"너……! 언제까지 그 주둥아리 멋대로 나불대는지 보자."
"그런 날은 안 올 거다. 네가 먼저 마님한테 버려질 테니깐."
이상현이 눈을 부라리고 멱살이라도 잡을 듯 덤비는 걸 옆 직원이 간신히 말렸다.
벤처캐피털 방문은 이렇게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며칠 뒤 정말 천하제일이 개인 라디오 방송 스타트업을 인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회사 이름은 라스타.
이름을 듣고 보니 이제야 떠올랐다.
그 회사는 크게 성공할 회사였다.
인기 연예인들을 섭외하여 프로그램을 론칭하고 다른 업종과 다양한 콜라보 방송을 진행하면서 무섭게 커갔다.
우리가 투자한 비라는 몇 달도 안 돼서 일일 접속자 수가 만 명대에서 천 명대, 백 명대로까지 곤두박질쳤고, 개발자들의 퇴사 러쉬가 이어졌다.
알고 보니 자본력을 무기로 천하제일 산하 라스타에서 연봉을 크게 높여서 빼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천하제일의 라스타는 빠르게 시장을 장악해 갔고 비라는 고꾸라졌다.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봐야 아무 소용없듯이.
승자독식 구조의 시장에서는 2, 3등에겐 미래가 없다.
비라의 이대표와의 미팅도 침울함 그 자체였다.
"저희는 가망이 없을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은 그저 실패했다고 인정하고, 새 사업으로 새 출발하시는 게 어떨지요?"
"그래야죠. 한두 번 실패는 경험이죠. 그나저나 원모랑 천대표님께 죄송할 뿐입니다. 믿고 투자도 해 주셨는데 실패를 안겨드려서요."
"실패라뇨? 아직 끝나지 않았죠. 대표님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이라면 다른 아이템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비라 투자금 회수는 일단 실패했다.
물론 다음 사업의 성공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번엔 나가리다.
이대표와의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모두에게 공표했다.
"이번 회수 건은 실패했습니다. 신규사업 추진한다고 하니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요. 그래도 사업성이 안 좋았다거나 우리의 안목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천하제일의 횡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나름대로 투자금 회수하여 장밋빛 설계를 했을 텐데, 그걸 무너뜨렸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원모가 더욱더 미안한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안 좋은 투자처 가져오는 바람에 폐만 끼쳤습니다."
투자안을 가져온 원모의 잘못이 절대 아니다.
이상현의 농간 때문이며 엄밀히 말하면 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네 잘못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내 잘못이 크지. 빨리빨리 진행했었어야 했는데 6억 불렀다가 괜히 시간만 끈 게 아닌가 싶다."
김철수이사가 나서서 한마디 덧붙였다.
"괜찮아. 천대표도 그렇고 원모도 그렇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이번 일을 계기로 한 뼘 더 성장했다고 생각하자고. 나중에 더 크게 한 건 터트리면 되니깐 너무 상심하지 말고."
오랜 경험에서 터득했을 지혜로운 발언이었다.
원모가 아직 죄책감을 벗어던지지 못한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원모야 이사님 말씀 못 들었어? 너 잘못 아니라고. 괜찮으니깐 이제 어깨 좀 펴."
"저기 대표님. 드릴 말씀이……."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뭐야 설마 고작 이딴 걸로 퇴사라도 하려고?"
"아닙니다."
"그럼 뭔데?"
"그게……."
"빨리 말해. 결론부터 아니 결론만."
"제가 돈 좀 만질 줄 알고 그전에 투룸 계약했었거든요."
"뭐라고?"
"대표님께서 본인 잘못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쪼금이라도 빌려주실 수 있을지 해서요."
그럼 그렇지.
괜한 걱정을 했다.
바로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돈 꿔 달라는 말까지 나오다니.
회복력 갑이다.
"잘됐다. 내 오피스텔 보증금 빼서 보태 줄게. 어차피 투룸이니까 방 하나씩 같이 쓰면 되겠네. 너 밥은 잘하지?"
원모는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 양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괜찮아, 이번 기회에 투룸으로 옮겨. 내가 보태준다니깐 그러네."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죽는다 아주."
원모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며칠 뒤 오후.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던 시각.
특별히 찾아올 사람도 없었는데 사무실 초인종이 울렸다.
원모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혹시 누가 짜장면 시키신 분 있으십니까?"
"아니? 없는데."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벨을 연거푸 눌러 댔다.
진상 잡상인이라도 온 듯했다.
"원모야 나가서 그냥 돌려보내라."
원모 표정이 조금은 황당한 듯 검지로 자기를 가리켰다.
마치 '건환이 말고 나?'라고 하는 듯.
건환이를 한 번 나를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네가 가깝잖아."
심판이라도 된 듯 판정을 내려주니 바로 꼬리를 내렸다.
"네."
마지못한 듯 시무룩하게 문 쪽으로 다가섰다.
"안 삽니다."
딩동딩동!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벨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울려 댔다.
"안 산다니깐요! 그리고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건너편에서 들리는 소리.
"나도 안 팔아!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데 소리는 왜 나는 거야?"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
바로 조성환이었다.
원모도 누구 목소린지 알았는지 부리나케 문을 열어 줬다.
영접이라도 하는 듯 두 손을 높이 치켜올렸다.
"조과장님! 아, 아 아니지 회장님! 아직 아니지. 음……. 회장님 아드님!"
원모 저 자식도 꼰대 아니랄까 봐 꼭 이름 뒤에 붙일 직함부터 찾는 놈이다.
"야 원모야. 도대체 회장님 아드님은 뭐냐? 그냥 조군이라고 불러. 나이도 어린 게."
"대표님이야말로 꼰대네요. 나이를 왜 따지십니까?"
"그럼 뭘로 따져?"
"돈, 사회적 위치 뭐 이런 거요?"
"그래. 미안하다. 맘대로 불러라 너 원하는 대로. 난 나대로 부를 테니. 조군! 오랜만이야."
조성환 이런 식의 응대가 전혀 뜻밖이었는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뭐지? 이런 건조한 분위기는? 오랜만에 보는 건데 좀 그렇네?"
"자자! 박수! 출소를 축하드립니다. 조성환군. 됐냐? 이제 좀 촉촉해졌어?"
김이사가 성환이 쪽으로 다가가 반겼다.
"주님, 얼굴 많이 상하신 거 같습니다."
아직도 주님이라니.
달라진 처지를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이사님. 이제 우리가 천하제일 소속은 아니잖아요. 주님은 무슨 개뿔 주님이요. 그냥 예전 직장 동료. 부하직원 뭐 그 정도로 대해 주면 안 될까요?"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분이 나중에."
"이사님. 천하태평의 대주주가 누구죠? 그게 바로 저잖아요."
"알았어."
특별히 반박하기도 어렵고 귀찮기도 했는지 김철수이사가 입을 닫았다.
성환이 못마땅하기라도 한 듯 투덜거렸다.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한솥밥 먹던 팀원인데 면회 한 번 안 오고."
"군대 갔냐? 면회는 무슨."
"면회는 그렇다 쳐도 출소하는 데도 아무도 안 나와 있습니까? 영화에서 보면 막 나와 있고 검정 봉지에 두부도 건네주고 그러던데."
"깡패영화만 봤나? 아님 독립운동이라도 한 거야? 뭘 잘했다고 나가, 나가긴."
사실 우리 모두 회사 그만뒀다는 얘기를 들었을 텐데 괜히 우리가 찾아가기라도 하면 자기 때문에 회사 그만뒀다고 미안해 할까 봐 나름 배려해 준 거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반가운 마음에 성환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고생했어."
"고생은 팀장님이 하시네요. 사무실이 이게 뭡니까? 도대체 왜 산꼭대기에 사무실 차린 거예요."
"그런데 왜 두 손이 가벼운 거 같지? 설마 빈손으로 온 거야?"
"출근하는데 선물 들고 가는 사람도 있나요?"
"뭔 소리야. 출근이라니. 누가? 어딜?"
"내가. 여길."
"네가 왜? 천하제일로 복귀해야지. 죗값도 다 치뤘겠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 회장님 판단이면 그렇게 하실 텐데?"
"못 갑니다. 완전히 쫓겨났어요. 집에서도요."
"집은 왜?"
"성북동 집에 누나랑 매형 들어왔어요. 거기 이제 내 방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