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64화 (64/191)

64화 뒷작업

원모의 출자분까지 포함해 자본금 총 (+) 1억 3000만 원.

보증금 및 기타 경비 사용 (-) 1,000만 원.

YK에 대한 투자금 (-)7,000만 원.

현재 천하태평 법인통장에 남아 있는 돈은 (+) 5,000만 원.

YK가 상장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거다.

남은 금액으로 빨리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투자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물색해 봐도 적당한 투자처를 고를 수 없었다.

팀원들이 서칭해서 들고 온 회사 대부분은 사업계획이 너무 허황되거나 이전 생에서 두각을 내지 못한 사업모델뿐이었다.

이전 생에서 이름을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 회사였으면 바로 투자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회사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제신문이라도 열심히 볼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여러 회사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원모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제 회사 동기가 사업한다고 천하제일 나갔는데요. 곧 어플도 출시할 거라는데 창업자금이 조금 부족한가 봅니다."

"업종이 뭔데?"

"인터넷 라디오라고 합니다."

김철수이사는 자기 전문 분야라 궁금한 듯 질문을 던졌다.

"라디오면 이미 인터넷으로 다 들을 수 있는데? 다시 듣기도 있고."

"그런 정규방송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채널로 방송하는 거래요."

"이미 동영상 일인 방송이 넘쳐나는데 라디오가 경쟁력이 있을까?"

"틈새시장을 파고들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이전 생에서 회사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어플을 사용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그런 어플이 있다는 건 들어 본 적 있었다.

그것도 꽤 잘나가고 성공한 기업이었던 듯.

아무래도 이런 쪽 전문가인 건환이 의견이 필요했다.

"건환아, 네가 볼 땐 어때? 너라면 이용할 거 같아?"

"네. 저는 이용할 거 같아요. 밤에 누워서 폰 들고 있으면 팔도 아프고 눈도 부시고 해서 어떨 땐 그저 듣기만 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래도 기존 라디오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라디오는 편성 프로도 적고 너무 천편일률적이라 소재가 다양하지 못해요. 그래서 재미도 없고 심의나 규제 같은 것도 심하고요."

김철수 이사도 긍정적인 의견을 덧붙였다.

"기존 라디오처럼 방송 시간도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깐 짬을 낼 수 있는 시간이 제각각인 요즘에 딱일 거 같네."

오랜만에 전부 의견일치를 봤다.

원모가 조인하자마자 한 건 제대로 터트릴 모양이었다.

"원모야 그런데 회사 이름이 뭐래?"

"비욘드라디오, 줄여서 비라라고 합니다."

못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왕이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회사 이름이었다면 더없이 좋았을 테지만 내 기억에 없다고 꼭 성공 못 한다는 건 아닐 거다.

내가 큰 관심을 갖지 않던 분야라 기억에 없을 수도 있으니깐.

* * *

천하제일을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였는지 비라의 이태성대표와는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대표 역시 빨리 돈만 만들어오면 머지않아 몇십 배로 튀게 해주겠다는 허황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자기가 만들 서비스가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해 주로 얘기했다.

사업계획서도 대기업 출신답게 삐까뻔쩍하게 작성해 놓아서 흠잡을 데가 전혀 없었다.

몇 번의 만남 후 투자계약을 체결하고 지분 취득 대가로 5천만 원을 쐈다.

이로써 회사 자금은 완전히 바닥났다.

외부에서 추가로 자금을 투자받으려 했으나 아직 신생인데다, 실적도 보여주지 못해서였는지 쉽지 않았다.

* * *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출근해서 특별한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게 머쓱했는지 건환이가 물었다.

"대표님, 무슨 수로 투자금을 마련하죠?"

"글쎄……. 집에 돈 좀 없냐?"

건환이 집 사정 뻔히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말이 헛나왔다.

"미안. 오죽 답답하면 그랬으려고. 네가 이해해 줘."

죄진 것도 아닌데 건환이 괜히 미안한 듯 축 처졌다.

"원모야! 너 고시원으로 옮기고 원룸 보증금이라도 빼는 건 안 되겠니?"

"절대 안 됩니다."

"혼자 사는 놈이 뭔 상관이야?"

"고시원은 방음도 안 되고……."

맞다. 결혼을 미룬 거지 헤어졌단 얘기는 아니었지.

"할 수 없네. 너 참 수고가 많다."

"수고라뇨. 헤헤."

원모가 웬일로 알아들었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천대표. 내가 어떻게라도 마련해볼까? 와이프 직장도 안정적이고 아들 놈도 이제 군대 갈 때 됐는데 집 좀 줄여서 가도 되거든."

김철수이사가 꽤 오래 고민한 듯했다.

그냥 해 본 소리는 아닌 거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까지 마다하고 쫓아 온 사람한테 집 평수를 줄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사님. 그저 농담 한 번 해 본 거예요. 우리가 투자한 두 건이 곧 터질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죠. 투자자금은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 테니 걱정마시고요."

"아니……. 괜찮은데 정말. 요즘……."

"정말 괜찮습니다. 걱정마시라니까요."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며칠째 잘못 걸려온 전화 말고는 울려 본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쩌렁쩌랑한 전화 소리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됐다.

"여보세요?"

"천대표님이시죠? 비라의 이태성입니다."

"아, 네. 이대표님 요즘 잘 나가고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모두 투자해 주신 덕분이죠."

"그런데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죠?"

"네. 다름이 아니라 벤처캐피털에서 연락이 와서 논의드릴 게 있어서요."

벤처캐피털에서 연락을 받았다면 투자의사를 밝힌 건데, 분명 좋은 소식이다.

그렇다고 성급히 기분 좋은 티까지 낼 필요는 없었다.

짐짓 태연한 척.

"그래요? 무슨 연락인데요?"

"네, 저희 사업에 관심이 있다고 투자하고 싶다고 해서요. 마침 저희도 가입자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서버도 늘리고 채용도 많이 해야 해서 추가자금이 필요하거든요."

"그거 잘됐네요. 마침 필요할 때 투자받을 수 있고요."

"잘됐죠. 그런데 그게 좀……."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쪽에서는 투자하는 조건으로 천하태평이 가지고 있는 지분까지 사들이고 싶다고 해서요. 가격은 3억 정도까지 쳐줄 수 있다고 합니다."

5천을 넣었는데 몇 달 만에 3억이라니?

이 정도면 정말 대박이었다.

아무래도 새로 투자한다는 업체에선 먼저 박혀있던 우리가 걸렸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지분을 내세워 회사 경영에까지 간섭할지 모른다고 걱정했거나, 아니면 더 크게 성장한 이후에 과실을 나눠주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무조건 따라야 합니까?"

"물론 지분을 넘길 생각 없으시면 이번 투자안 거부하셔도 됩니다. 다른 업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거든요. 다만 천하태평의 의중이 어떤지 여쭤보는 겁니다."

나름 우리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거였다.

지금 오른 가격으로 손 털고 나갈 건지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같이 갈 건지.

생각해보겠다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팀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몇 달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건환이가 모두 털고 나가자는 의견을 냈다.

"마침 잘됐네요. 우리 자체적으로 투자받기 힘든데, 이번에 현금화해서 그 돈으로 다른 데 투자하시죠."

"그 말은 일리가 있는데. 이 회사가 더 성장해서 3억이 아니라 30억을 쥘 수도 있어. 지금 털고 나가는 게 그 기회를 날리는 것일 수 있다고."

김철수이사도 자기 의견을 밝혔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선 지금 3억 손에 쥐고 다른 데 투자해서 30억은 또 얼마든지 만들 수도 있잖아. 한 일 억 정도 배당하고 나머지를 투자하는 것도 괜찮고."

방금까진 집을 줄여서라도 투자금을 마련하겠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바꿨다.

몇 달간 집에 한 푼도 못 가져서 땅바닥에 떨어진 위신을 조금은 세우고 싶은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갔다.

"네. 그럼 저도 투룸으로 옮길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원모까지 당장 손에 현금을 쥘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듯.

모두의 의견이 그러하니 기분 좋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럼 비라 지분 넘겨 버리고, 배당으로 조금 나눠 갖은 다음에 나머지로 재투자하죠."

"와~!"

"예!!"

나를 포함한 네 명의 파트너들 모두 두 손을 번쩍 들고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첫 성공적인 투자 결과에 흥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성공의 길만 가다 보면 몇 년 안 돼서 세계적인 투자회사가 될 수 있을 거다.

천하제일그룹까지도 집어삼킬 수 있는.

* * *

협상을 위해 투자하겠다는 벤처캐피털의 대표와 비라 이대표와의 삼자 미팅을 했다.

변변한 사무실도 없는 탓에 만나기 편한 광화문의 카페를 방문했다.

천하제일 지주사 근처라 예전엔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방문하곤 했었는데, 그만둔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좋지 않게 그만둬서 그랬는지 근처를 지나갔어도 쉽게 발걸음이 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벤처캐피털 대표가 궁금한 듯 몇 가지를 물어왔다.

"이대표님과는 무슨 인연으로 투자하게 되신 거죠?"

"이대표님하고 제 회사 후배랑 동기입니다."

"천하제일 동기시군요. 그럼 천대표님께서도 천하제일에 계셨겠네요?"

"네, 저도 얼마 전까지 천하제일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어쩐지 관계가 좋아 보여서요."

천하제일이란 말이 나오자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 손님이 고개를 홱 돌려 우리 쪽을 쳐다봤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별거 아니겠지.

아무래도 회사 앞이라 직원들 또한 수시로 들르는 곳이니 아마도 자기 회사 이름을 듣고는 그저 한 번 쳐다본 것일 거다.

"천하태평이 보유한 지분 전량을 저희한테 매각하실 의향이 있으시다고요?"

"맞습니다. 비라의 창창한 미래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저희 내부적으로도 사정이 있어서요."

"네, 그 결정 충분히 존중합니다. 금액은 이대표님을 통해 전달드린 그 금액으로 하시면……."

"그렇지 않아도 그거 때문에 뵙자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더 좋은 가격으로 매각할 수 있다고 다른 주주분들이 자꾸 언성을 높여서요. 금액을 조금 올려주시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돈 얘기는 다른 사람 핑계 대는 게 최고다.

3억만 돼도 5배가 넘게 남는 장사였으나, 막상 사람 맘이 또 그렇지는 않았다.

밀당을 좀 해서라도 조금만 더 올릴 수 있다면 그게 어딘가?

"그럼 얼마를 생각하시는지요?"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이러쿵저러쿵할 필요 없다.

이럴 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질러야 했다.

"6억입니다."

"네?"

화들짝 놀라는 게 연기력이 보통 좋은 게 아니었다.

5억이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4억이라도 받을 생각에 세게 불러 봤다.

역시 반응이 좋진 않았다.

그렇더라도 바로 물러날 순 없었다.

"긍정적으로 검토 부탁드립니다."

"네. 제가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서요.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대표라고 해도 단독 의사 결정권은 없었을 거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답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을 테고.

이것저것 더 이상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 * *

사무실로 복귀하자 김철수이사가 꽤 조마조마했었는지, 보자마자 물었다.

"뭐래? 그 금액으로 하겠대?"

"아니요.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3억이나 4억이나 마찬가진데, 쪼잔하고만."

"제가 6억 불렀습니다."

"헉? 뭐라고? 왜 갑자기 6억을……. 그러다 깨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안 깨져요. 6억을 불러야 네고해서 4, 5억이라도 받죠. 아무튼 기다려보세요."

"알았어. 천대표만 믿을게."

답변이 올 때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답변은 투자회사가 아닌 비라의 이대표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벤처캐피털 쪽에서 투자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당연히 천하태평이 가진 지분도 매입 안 하고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친 듯.

신세계에서의 최민식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이러면 완전히 나가린데.'

"아니 갑자기 왜요? 제가 6억 불러서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얘기를 안 해 주네요. 아무튼 여긴 그렇게 됐으니깐 다른 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할 수 없죠. 회사는 잘 나가니까 자금 유치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네. 제가 투자회사 나타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김이사는 물론이고 원모나 건환이 모두 안색이 어두워졌다.

괜히 세게 불러서 깨진 거 같아 미안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래. 천대표만 믿을게."

그러나 설상가상.

나쁜 일은 절대 혼자 오는 법이 없다.

일주일도 안 되어서 비라 이대표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비통한 목소리였다.

"큰일 났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서로 투자하겠다고 난리였는데, 다들 갑자기 입을 싹 씻었습니다. 투자하겠다는 데가 한 군데도 없어요."

"네? 갑자기 왜요……?"

"그게 천하제일 측에서 경쟁업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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