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합류
분기마다 천하제일 가서 챙겨 오라고 했더니 정말 다녀왔나 보다.
이렇게 덤으로 소식까지 전해 오고.
어쩐지 며칠 전부터 사무실에 커피와 녹차가 가득 차 있긴 했었다.
건환은 상해 임시정부 명으로 조선이라도 다녀온 밀정마냥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조용히 보고했다.
"며칠 전에 커피 챙기러 천하제일 갔었거든요. 그때 인사팀 동기랑 접선하면서 전해 들었습니다."
"잘했어, 동지. 그런데 좀 크게 얘기해 주면 안 될까? 역모라도 꾸미는 줄 알겠다."
"아, 네. 원모님 옮긴 팀에서 성과평가 D로 깔았다고 합니다. 성과급은 당연히 없고 내년 연봉도 삭감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원모가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D라니. 이거 완전 양아치잖아? 결혼도 앞둔 놈을."
"그러게요. 그뿐만 아니라, 과장인데도 업무에서 배제되고 퇴사 종용당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돈다고 합니다."
본부장 그자한테 당한 거다.
나만 나가면 팀원들한테 불이익 주지 않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니었다.
"그럼 본부장이 약속을 어겼다는 건데……."
김철수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천대표. 회사 생활 한두 해 한 것도 아니고 상사 약속을 정말 믿었어?"
"아니, 자기가 팀원들도 모두 자기 직속 부하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땐 무슨 말이든 못해? 그리고 이젠 천대표도 나가고 없는데 무슨 약속을 지키겠어?"
그래, 나도 퇴사한 마당에 굳이 원모를 챙겨줄 필요는 없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퇴사 압박까지는 너무 심했다.
완전 쌩 양아치다.
"제가 본부장 한 번 찾아가 보겠습니다."
"아서. 그게 통하겠어? 성과평가는 원모팀 팀장이 준 거라고 하겠지."
하긴 자기가 직접 성과평가를 준 게 아니라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다 큰 어른 점수 좀 안 나왔다고 따지러 가는 것도 모양새가 좀 이상하고.
"그렇네요. 방법이 없네요."
"원모는 잘 버틸 수 있을 거야. 눈치도 빠르잖아."
원모 성격에 책상 치우고 컴퓨터까지 뺏긴 채 벽보고 앉으라고만 하지 않으면 참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만나서 소주 한잔은 사줘야겠다.
예전 재무팀에 있었을 때 날이면 날마다 억지로 술자리 끌려다니면서도 불평 한 번 안 했던 게 떠올랐다.
* * *
다음 날.
통화버튼을 누르자 첫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받았다.
"네, 팀장님."
일단 목소리는 경쾌한 게 나쁘지 않다.
"그래 나야. 내 번호는 아직 안 지웠나 보네. 한 번도 전화 안 하길래 번호 지운 줄 알았다."
"지우는 것도 일인데요. 뭘 굳이."
"뭐라고? 이 자식이."
"농담입니다. 그냥 팀장님 사업하시느라고 바쁘실까 봐 선뜻 전화드리기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어떻게 한 번을 안 놀러 오냐?"
"정리한다고 바쁘실까 봐 그랬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도 놀러 와서 자기 빼고 팀원이 전부 모여 있는 걸 보면 괜히 미안해질까 봐 그랬을 것이다. 마치 혼자 배신이라도 한 것마냥.
"어느 팀으로 옮긴 거야?"
"재무팀이요. 십 년 넘게 쭉 숫자만 봐 와선지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럼 적응하기는 쉽겠네."
"적응은 필요 없죠. 지주사도 아니고 쪼그만 계열사인데요."
"누가 보면 에이스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럼 아니었습니까?"
말투나 뉘앙스가 생각보다 괜찮다.
건환이 말만 듣고 괜한 걱정이라도 한 듯했다.
"알았어. 오늘 시간 돼? 저녁이나 먹자. 오랜만에 둘이."
어떻게 된 게 물음과 동시에 답이 튀어나왔다.
"등심이요."
"그래."
오랜만에 과거에 수족처럼 부리던 놈 등심 하나 못 사줄까.
저렴한 무한리필 집도 널렸는데.
생각나는 식당을 말해 주려는 찰나, 원모가 어떻게 알았는지 선수를 쳤다.
"무한리필 말고요. 장소는 제가 정합니다."
"너 혹시 내 생각이 들리냐?"
"아니요."
"근데 어떻게?"
"팀장님은 참 올곧은 분이시잖아요. 일관성 있게요."
"야.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대천하제일 다니는 놈이 회식으로 매일 좋은 거 처먹을 거 아냐. 그냥 나랑은 저렴한 거 먹으면 안 되냐?"
"전 아닙니다."
"뭐가?"
"회식이요."
그 한마디가 다해줬다.
적응 못 하는 건 둘째치고 대놓고 따를 당하고 있다고.
"알았어, 네가 정해."
* * *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약된 방으로 안내해주는데 식당 유리 바깥쪽에는 인공폭포까지 있고 아주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앞서가는 종업원을 잠시 멈춰 세웠다.
"여기 등심 얼마에요?"
여차하면 뒤돌아서 나가버리면 그만이다.
자리 안내하다 말고 가격 물어본 손님은 처음이었는지, 종업원이 꽤나 당황한 듯 속마음 그대로를 내뱉어버렸다.
"비싸요……. 아, 죄송합니다. 손님."
마치 너 같은 사람은 올 데 아니다라고 한 듯.
기분은 좀 나빴지만 참았다.
맞는 말이긴 하니깐.
"괜찮습니다. 얼만데요?"
"7만원입니다."
"물론 1kg 아니고 1인분이겠죠?"
"네 1인분 120g입니다."
원모 이 개새끼.
정하라고 했더니 제일 비싼 곳을 예약했다.
이런 일관성 있는 놈.
안내받은 자리에는 원모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똑같으시네요."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본 지 알겠다."
"네. 말투도 여전하시네요. 하하. 주문 먼저 하시겠습니까?"
메뉴판을 넘겨주는데 이미 가격을 들어서 열어볼 필요 없었다.
멋있게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바로 내려 놓았다.
"등심 먹고 싶다며. 여기 등심 2인분, 된장찌개에 공깃밥 두 개요."
"네, 알겠습니다."
주문받고 돌아가려는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된장찌개랑 공기밥 먼저 주세요."
그리고는 원모 쪽을 돌아봤다.
"밥이 먼저 들어가야 건강에 좋대."
원모가 어처구니가 없는 듯 눈을 흘겼다.
"아, 팀장님. 쫌! 저 여기 상품권 선물 받은 거 있으니깐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여기는 제가 쏘겠습니다."
나쁜 새끼.
미리 말하지 모양 빠지게.
"그러자. 공깃밥은 무슨. 탄수화물이 건강에 젤 나빠. 여기 그냥 등심 4인분으로 주세요."
고기와 술잔이 오가고 제법 취기가 올라왔다.
"팀장님. 혹시 회사에 일손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부족하긴 하지만 월급 줄 형편도 아니니 채용은 못 하고 있어. 왜 누구라도 소개해주게?"
"네.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합니다."
"누군데?"
"저요."
이놈 취했는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왔다 갔다 했다.
"아니, 대기업 잘 다니는 네가 갑자기 왜?"
"팀원분들 다 모여서 고생하시는데 저만 편하게 살겠다고 천하제일에 붙어 있는 게 좀 그래서요. 같이 고생하시는 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드릴까 합니다."
자존심은 있어서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생각만으로도 고마워. 마음만 받을게."
혀 꼬인 목소리로 두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팀장님께서 삼고초려해 주시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까 하는데요."
"에이……. 내가 미안해서 안 되지. 그럴 순 없어."
"김철수차장님이나 건환이는 숫자도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관리 쪽으로는 영 아닐 텐데. 아무래도 재무 에이스인 제가 합류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꼭 재무 업무가 아니더라도 오랜 수발 생활로, 척하면 척 눈치도 빠르니 수족처럼 막 부리기 편한 놈이 필요하긴 했다.
건환이는 숫기도 없고 빠릿하지도 못한 데다 그렇다고 한참 대선배인 김철수이사한테 시킬 수도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원모가 딱이긴 한데…….
말은 안 해도 분위기 보아하니 건환이 말대로 퇴사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근데 삼고초려는 무슨.
빌어도 고민해 볼까 하는 판에.
"결혼도 꼭 해야 한다며. 안 돼."
술이라도 깬 듯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결혼 미뤘습니다. 조그만 아파트라도 장만해서 프로포즈하겠다고 미뤘어요. 천하제일에 있으면야 물론 안정적이라 좋긴 하지만 아파트 장만하려면 마흔도 넘을 거 같아서요."
얼마 차이 안 나는 세대인데도 현실을 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깨달았다.
점점 더 힘들어져 갈 세상을 생각하니 한층 더 안타까웠다.
"원모야 그럼 뭐든 감수할 수 있겠어?"
"네. 뭐든지요."
"내가 대표고 김철수 이사에, 건환이는 부장이거든. 과장 자리가 하나 비는데, 그 자리라도 올 생각 있으면 오고."
"네? 건환이가 부장인데 저보고 과장하라고요?"
"어떡하지? 지금 필요한 포지션이 그런데. 그럼 딴 사람 알아볼게. 넌 부장 자리 주는 데 찾아보든지."
"잠시만요. 과장하겠습니다. 지금도 과장인데요. 뭘."
그 정도 각오면 충분했다.
더 이상의 테스트는 필요 없었다.
"그래, 그럼 빨리 정리되는 대로 출근해. 그리고 아까 농담이야. 우린 직급 같은 거 따로 없어. 그냥 너도 관리 이사라고 명함 하나 파고 다녀. 물론 네 돈으로. 나중에 회사가 커져서 일 많아지면 그땐 직원들 네가 알아서 뽑고."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원모가 상품권을 건넸다.
상품권을 받아든 종업원 계산기를 한참 두드리더니.
"상품권 10만 원권 제외하고 28만 3천 원 계산해 주시면 됩니다."
원모가 당황한 듯 반문했다.
"네? 그럼 38만 원이나 나왔다고요? 한 근에 7만 원이던데 설마 둘이 다섯 근이라도 먹었으려고."
이 자식 농담이 아니다.
설마설마했는데 메뉴판 잘못 읽은 게 확실했다.
"얌마. 일 인분에 7만 원짜리 고깃집 데려오면서 딸랑 10만 원 상품권 한 장 들고 오냐?"
"네? 일 인분에 7만 원이라고요?"
메뉴판도 못 읽는 놈을 관리이사라고 영입하려 했다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가져와. 내가 산다. 대신 아까 얘기는 취소다. 그냥 천하제일에 남는 걸로 하자."
"아이! 대표님!"
내 팔을 붙잡고 늘어져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이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원모는 일주일도 안 돼서 일사천리로 퇴사 절차를 마무리하고 합류했다.
첫 출근일.
열심히 하겠다는 놈이 9시가 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20분이나 지났나.
집중하니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에서부터 씩씩대며 내뱉는 욕설과 함께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가.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원모가 들어왔다.
컴퓨터 가져오랬더니, 노트북도 아니고 데스크톱을 가져왔다.
"헉헉……. 오랜만입니다. 차장님. 아니 이사님. 건환이도 안녕."
"네, 안녕하세요. 과장님."
건환이 녀석 인사는 건넸지만, 표정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윗사람이 들어왔으니 당분간 막내 생활 벗어나기 힘들겠구나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날부터 지각이네."
"아니 회사를 왜 이런 데 잡았습니까? 매일 이렇게 등산하듯이 출근하십니까?"
"그러게. 힘들면 그냥 돌아가지 그랬냐?"
내 말에 빈정이라도 상했는지 투덜댔다.
"그렇지 않아도 계단 올라오다가 돌아갈까 했었는데, 다른 분들 눈에 밟혀서 그냥 왔습니다. 사람 필요하다고 사정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선 큰맘 먹고 따라나선 사람한테 이러시깁니까?"
모두들 자기 사정 다 아는지도 모르고 허세 한 번 부린 거다.
그래도 김철수이사와 건환이는 티는 안 내고 그저 그러려니 했다.
김철수이사가 데스크톱을 가리키며 놀란 듯 물었다.
"그걸 다 들고 온 거야?"
"네, 노트북은 가지고 나오기가 어렵겠더라고요."
"가지고 나오다니?"
"천하제일은 노트북 리스기간 지나면 반납해서요. 챙길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럼 천하제일에서 가져온 거야? 그 데스크톱을?"
"네. 비싸잖아요. 컴퓨터."
히죽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 뒷면 스티커엔 천하제일 비품 번호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이 자식 나중에 우리 회사 퇴사할 때 잘 봐 둬야겠다.
"그럼 모니터는?"
"내일 들고 오려고요."
"야, 그냥 택배로 보내. 내가 줄게 택배비."
"괜찮습니다. 택배 기사님들 욕해요. 이 정도 위치면."
끙끙대며 컴퓨터 놓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제 자리 어디에요?"
"쩌어기요."
건환이가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 자리였던 탕비실 겸용 책상을 가리켰다.
원모 출근한다는 소식을 듣더니 어제 퇴근 전 자기 자리를 싹 비워놓고는 옆자리로 이사해 버린 것이었다.
딱 봐도 막내 자리인 걸 느꼈는지 원모가 한마디했다.
"잉? 내가? 대표님, 저기 탕비실 같은데요?"
"그렇지 딱 알아보네. 관리이사 자리이기도 하고."
"다른 자리들 냅 두고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여긴 직급도 직함도 없고 그저 조인한 순서대로 어드밴티지가 있을 뿐이야. 아무리 과거 직급이나 나이를 고려해도 먼저 조인한 건환이에게 이 정도 어드밴티지는 줘야지."
"네."
처지가 그래서인지 별다른 저항 없이 꼬리를 내렸다.
"대신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 있으면 지금 자리 넘겨줘."
"언제요?"
"글쎄……. 회사가 좀 더 커지면? 그전에 이사 가긴 하겠지만."
결국 이 건물에 있을 동안은 쭉 네 자리다라고 얘기해 줬다.
그런데 못 알아들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원모님. 우리 차나 한잔하지 말입니다."
건환이가 군대 선임 행세라도 하는 양 군대 말투로 내뱉었다.
"뭐라고? 대표님 여기 손찌검해도 됩니까?"
"가능은 하지만, 가능할까?"
원모가 건환이를 쓱 한 번 스캔하더니 그냥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