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투자
오랜만에 찾은 강남 오피스타운의 커피숍.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스타일 자체가 우리 회사 근처와는 천양지차였다.
젊고 트렌디한 안목이 필요해 건환이를 데려왔는데, 이놈은 수학여행으로 서울 구경 온 학생마냥 연신 두리번거리느라 바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남에서 근무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대표님 몇 달 사이에 확 달라진 게 맞는 거죠?"
"그럴 리가? 네 눈이 달라졌겠지."
"완전 천지개벽을 했는데요?"
계속 두리번거리다 이제야 생각이라도 난 듯 시계를 쳐다봤다.
"약속 시간이 20분이나 지났는데 왜 안 오는 거죠? 지금 온다는 사람 투자받으려는 태도가 영 아닌 거 같은데요……?"
"사업하는 사람이 얼마나 바쁜데 고작 20분 가지고. 어! 저기 온다."
마침 카페 문이 열리면서 정영균이 시야에 들어왔다.
몇 년 전 천하제일 입사 면접 때 봤던 스타일 그대로였다.
이 동네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일어나서 눈 뜨기도 전에 손에 집히는 대로 입었는지 구겨진 티셔츠 한 장만 대충 걸쳤다.
꼭 담배 사러 나온 동네 백수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정영균씨 그간 잘 지내셨죠?"
"네. 과장님도 잘 지내셨죠?"
악수를 청하기 전 명함을 건넸으나, 정영균은 건네받은 명함엔 눈길 한 번 주지도 않은 채 주머니 속에 꾸겨 넣었다.
난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런 스타일인 걸 알고 있어서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건환이는 초면이라 당황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라는 듯 눈까지 흘겼다.
"지난번 명함하곤 달라졌습니다."
내가 명함 얘기를 하자 이제야 주머니 속을 뒤져 명함을 꺼내더니 살펴봤다.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투자자가 되셨군요? 전 명함이 회사에 있어서요."
건환이가 어이가 없었는지 한마디 했다.
"지금 회사에서 나오신 거 아닌가요?"
"네, 회사에서 나오긴 했죠. 명함까지 데려오진 못했습니다만."
저건 비꼬아서 도발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거다.
어쩌면 깨알 같은 유머일 수도 있고.
그러나 수년간 대기업에서 비즈니스 매너 교육을 알게 모르게 받아온 건환이로선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차마 대꾸는 하지 못하고 부글부글 속만 끓이는 것 같았다.
조용히 눈짓으로 괜찮다고 사인을 보냈다.
"정영균 님도 취업 안 하시고 바로 사업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요. 벌써 두 번 실패하고 이번이 세 번짼데요. 동업했던 친구들은 다 떠나고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동생하고 시작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죠, 뭐."
이전 생에서 얼핏 언론을 통해 본 기억으로는 형제창업 기업이라도 들었던 것도 같다.
이번이 그 타이밍이 확실한 듯.
그래도 예전 기억과 동일한 사업을 시작했는지 확인은 한번 해볼 필요가 있었다.
"무슨 사업을 구상하고 계신 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네, 저희는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쪽이라면 이미 글로벌 톱 티어가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물론 똑같은 서비스라면야 승산이 없겠죠. 그런데 저희는 확실한 차별화 포인트를 두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곳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설명할 기회가 많아서였는지 자료만 띄우지 않았지 PT하듯 청산유수처럼 사업계획을 쏟아냈다.
짧은 동영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짧은 시간에 잠시 보는 데 적합한 그런 동영상.
내가 기억하던 바로 그 사업이었다.
잘 달리는 말이 확실하다.
이제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초기 투자금이 필요하시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지금 단계로선 7천 정도 필요합니다."
"지분율은요?"
"10%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YK의 10%면 대박이다.
물론 사업이 구체화될 때마다 추가 투자가 계속 이루어지면서 지분율이 점점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지금 10%면 나중에 상장될 때쯤 최소한 3% 정도는 될 수 있을 거다.
그럼 천억도 넘을 수 있다는 얘긴데.
몇 년 안에 천억대 부자가 되는 거다.
지금 겨우 7천만 원으로.
"당장 투자하겠습니다."
쨍그랑!
건환이 녀석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람지랑 방송 몇 번 같이하더니 이제 효과담당 다된 듯 적재적소에 효과음을 터트려줬다.
뜨거운 커피를 바지에 쏟았지만 놀라서 뜨겁다는 생각도 못 한 듯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대놓고 뭐라 할 순 없고 그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회사 자본금의 반 이상을 처음 보는 백수 같은 사람에게 투자한다니.
그것도 사업계획서는커녕 대충 몇 마디 들어보지도 않았는데, 바로 투자하겠다고 하니 놀라 자빠진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앞으로 이 회사가 얼마나 클지는 상상도 안 될 테니까.
일부러 건환이의 시선을 피했다.
"언제 투자금을 입금해 드려야 할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건환이 얼굴이 급똥이라도 마려운 강아지마냥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건환이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입을 뗐다.
"저……. 대표님. 아무리 좋은 투자 기회라고 해도 다른 주주분들과 상의 한 번은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상의는 무슨 상의? 투표로 해도 내가 이길 텐데 내 지분율이면 뭐든 할 수 있는 거 몰라?"
"아무리 그래도 사업계획서도 한 번 안 보고 어떻게 투자하자는 말씀이신지 해서요."
"건환아. 지금 정대표님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결연한 의지가 너의 눈엔 정말 보이지 않는 거니? 사업계획서가 뭐가 중요해? 아까 무슨 사업인지 들었잖아. 그거면 된 거 아냐?"
둘이 티격태격하는 거 같아 난처했는지 정영균이 중재하듯 끼어들었다.
"저기 천대표님. 이 자리에서 바로 확답 안 주셔도 됩니다. 이번 주까지만 알려주세요. 다른 분들과도 상의 한번 해 보시구요."
"상의는 뭘요. 제가 하겠다면 하는 거죠."
"아닙니다. 어차피 다른 업체들한테 설명하려고 사업계획서 만들어 놓은 게 있습니다. 들어가서 바로 메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 제 명함도 같이 첨부드리겠습니다. "
다른 업체?
다른 놈들한테 투자 기회가 가버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밀려왔다.
이 눈치 없는 건환이 자식, 데려와서 괜히 분위기만 망친 거 같았다.
"아니, 정말 괜찮은데요. 다른 주주분은 지금 전화해서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나 건환이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정영균도 불편했는지 다음 날 내부회의 마치고 연락하자고 하더니 자리를 떴다.
정영균이 자리를 뜨자마자 건환이가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대표님! 원래 투자회사가 이렇게 사정사정하면서 투자하겠다고 해요? 이건 완전히 을. 아니지 아예 병이나 정이잖아요!"
"건환아! 돈을 버는 게 중요하지 갑질, 을질을 따질 때냐? 성공을 위해서는 똥 밭에서도 구를 줄 알아야지."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사업계획도 안 보고 말 한마디에 바로 투자하겠다는 말을 하실 수 있으세요?"
"종이 쪼가리가 뭐가 중요해? 저 친구는 투자 얘기는 안 하고 자기 꿈 얘기를 하잖아. 자기 사업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를 얘기하는데 그거면 끝난 거 아냐?"
"그래도……. 투자를 원한다는 생각이 없는 거 같잖아요."
"원래 혁신가들이 다 저런 거야. 게다가 유망한 사업이면 우리 아니어도 자금 구할 데가 널렸을 텐데 뭐하러 굽신굽신하겠어. 우리가 굽신대야지."
"그래도 3%에 안에 들지 확신이 잘……."
이 녀석 벤처기업 성공확률이 3%도 채 안 된다는 걸 기억하고 우리 회사가 망해 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거다.
"사업내용 들은 건 어때? 감이 와?"
"네, 사업 자체는 좋습니다. 트렌드에 맞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도 그런 서비스가 있으면 충분히 이용할 것 같긴 합니다."
"그럼 된 거야. 본인이 생각할 때, 나 같아도 이용할 거 같다 이러면 끝난 거 아닌가? 그냥 너의 감을 믿어. 3%는 물론이고 0.001% 안까지도 들 거야. 그야말로 초대박!"
건환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회사로 복귀하여 컴퓨터를 켜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정영균이 보낸 사업계획서였다.
카페에서 5분간 설명한 것과 내용 및 구성 전반에서 완전히 일치했다.
자기 사업 구상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니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도 설득력 있게 PT를 할 수 있게 된 것 일 거다.
김철수이사가 사업계획서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
"이사님이 보실 때도 가능성이 있어 보여요? 또래 친구분들도 괜찮게 생각하시겠죠?"
"왜. 내가 가능성 있다고 하면 노땅한테도 먹힌다는 거야?"
들켰다.
역시 눈치가 빨라.
"에이, 그런 건 아니지만 다양한 분들의 의견이 필요해서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나 같아도 할 거 같아. 어차피 종일 붙잡고 볼 것도 아니고 잠깐잠깐 짬 날 때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에 딱인 거 같은데?"
아주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천하태평 내부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바로 정영균대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며칠도 안 돼서 다른 업체들이 끼어들기 전에 곧바로 투자계약서도 체결하고 투자금액 7천만 원을 쏠 수 있었다.
이로써 천하태평은 YK의 주주명부에 10% 지분율의 주주로 등재하게 되었다.
* * *
첫 투자를 기념하는 회식 자리를 위해 강남으로 진출했다.
종업원이 건환이에게 메뉴판을 건네는 걸 재빨리 낚아챘다.
메뉴판을 펼치니 역시 강남은 강남이었다.
금액대도 차원이 다른 게 저절로 손이 떨렸다.
천하제일 같았으면 막내한테 메뉴 선택권을 넘겼을 텐데, 이제는 아니다.
건환이 놈 눈치도 없이 한우를 시킬 게 뻔하니깐.
"여기 세 명이니깐 우선 삽겹살 2인분 주세요."
종업원이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 믿겠다는 거였는지 다시 물었다.
"네? 2인분이요?"
"네. 2인분이요. 딱 받았을 때 이거 3인분 아니야? 라고 컴플레인할 정도의 2인분이요."
"아, 네. 그냥 2인분이요."
역시 강남이다.
응대 역시 시크하다.
건환이 주문받고 돌아가려는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첫 세리머니인데 삼겹살은 좀 그렇지 않나요?"
"왜? 삼겹살은 축하에 어울리지 않기라도 하냐? 요즘은 상갓집에 육개장 대신 삼겹살이라도 나오나 보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지난주 람지 방송메뉴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제가 처리 중이거든요. 일주일 내내 저녁마다 먹어서 냄새만 맡아도 토할 거 같아서요."
방송 한 끼 분량이 성인 남자 일주일 치 양을 훌쩍 넘다니 람지가 대단하긴 대단하다.
"에이, 그럼 진작 얘기하지."
종업원에게 주문을 수정해주었다.
"여기 삼겹살 2인분에 된장찌개도 하나 주세요."
"건환이 넌 삼겹살 못 먹는다니깐 된장찌개라도 먹어."
"네? 된장찌개요? 아뇨, 제 말은……."
"알았어. 자식아. 여기 공깃밥도 하나 추가해 주세요. 소주엔 밥 안주가 최고지."
불판에 고기가 다 익어가고 있었지만, 소심한 건환이는 진짜 안 먹어야 하는 줄 알고 된장찌개에 밥만 퍼먹고 있었다.
"소심한 놈. 눈치 보지 말고 먹어. 설마 고기 구우라고 시켜 놓고 한 점을 못 먹게 할까 봐?"
건환이가 이제야 젓가락을 들어 양파를 들추더니 밑에 깔린 큰 조각 하나를 가져갔다.
지가 먹으려고 일부러 크게 썰어놓고 숨겨 놓은 게 분명했다.
"아예 자르지 말지 그랬냐? 어차피 한입에 들어갈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우걱우걱 씹는 거 같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안 먹어?"
"아까 한 점 먹으라고 하셨잖아요."
"허, 이 자식. 이렇게 정직할 수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문득 구구절절한 건환이 인생사를 고려해 볼 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데 일주일 넘게 삼겹살만 먹었다는 놈치고는 젓가락질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람지랑 사귄 지 좀 되다 보니 먹는 양과 속도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일주일 동안 맨날 먹었다는 거 뻥이었지?"
"7일이나 8일이나 똑같죠, 뭐. 밥은 365일도 먹는데요."
부창부수가 맞았다.
건환이는 몇 판을 더 시키고 나서야 배가 좀 차는지 배를 뚜드리기 시작했다.
"대표님. 이사님 두 분 혹시 원모님 얘기 들으셨어요?"
"뭐? 원모? 원모가 왜?"
"그게……. 저도 며칠 전에 천하제일 들렀을 때 얼핏 들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