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시작
똑똑…….
소심한 듯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건환이가 들어왔다.
"저……, 여기가."
"건환이냐? 맞아, 여기. 잘 찾아왔어."
건환이는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소파에 주저앉더니 투정을 부리 듯 물었다.
"팀장님. 아니, 이제 대표님이시죠. 그런데 사무실은 왜 이렇게 높은 곳으로 구하셨어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싶어 짜증이 몰려왔다.
"이게 다 네가 출자한 자본금이 부족해서 그런 건데 누구 탓을 해?"
차마 대꾸하지는 못하는 건환.
그저 또 저런다라는 표정으로 흘겨볼 뿐이었다.
"그러게 강남 역세권 평지 천하제일엔터를 냅 두고 왜 이런 데를 따라와?"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자기만 들리게끔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러게요……."
이직 후 첫 출근에 마주한 현실이 적응하기엔 꽤 버거웠을 거다.
"그런데 혹시 설마 빈손이야?"
"네?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출근한 건데요."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농담이야. 앉아."
앉을 자리라도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대표님 혹시 제 책상은……?"
"쩌어기."
손을 뻗어 사무실 끄트머리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탕비실도 겸하는 자리.
커피포트와 종이컵은 물론이고 볼펜 같은 사무용품까지 한 무더기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건환은 저벅저벅 자리로 가더니 노란색 봉지 커피를 들어 올렸다.
"이게 다 뭐에요?"
"뭐긴 뭐야. 막내가 커피 타야지."
"아. 그렇군요."
풀 죽은 대답 뒤 다시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냥 누구처럼 눈 딱 감고 붙어 있을걸……."
원모를 말하는 거였다.
원모는 정말 결혼해야만 했다.
신혼생활이야 지금 사는 원룸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까지 생긴다면 적어도 투룸은 마련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미안했겠지만 도저히 대기업인 천하제일을 떠날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을거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삐걱거리더니 김철수차장이 들어섰다.
아니, 이제부터는 우리 천하태평주식회사의 김철수이사다.
"생각보다 아늑하고 좋은데?"
"오셨어요? 조만간 돈 좀 벌면 강남에 으리으리한 데로 옮기시죠. 그땐 방 따로 마련해 드릴 테니깐 조금만 참아 주시고요."
"강남은 굳이 뭐하러. 난 여기도 좋은데? 집에서도 가깝고."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게 보였다.
정말 의리도 있고 괜찮은 분이다.
이렇게 천하태평 3인방의 첫 출근이 시작되었다.
계속 만류했지만, 김철수 차장과 건환이는 내가 퇴사한 뒤 한 달도 안 되어서 천하제일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멋있게 따라 나온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팀도 와해되어 얼토당토않는 한직 부서로 배치된 데다 조성환 라인이라는 수군거림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혼을 앞둔 절박한 상황에다 맷집마저 좋은 원모와는 달랐다.
다만, 자존심 상할까 봐 자세히 묻지 않았었다.
회사 사정상 월급을 챙겨줄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주주로서 출자하겠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궁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엔 결국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비록 자본금으로 천만 원씩밖에 출자하지 않았지만, 정해진 미래대로 계속해서 터져만 준다면 나중엔 반드시 손꼽히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지금의 회사 자금으로는 제대로 된 사무실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다.
물론 구하려면야 강남에 삐까뻔쩍한 사무실도 구할 수 있었겠지만, 자본금으로 보증금을 모두 내버리면 안되니 할 수 없이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사십짜리 사무실을 구했다.
가파른 언덕위 주택가에, 그것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꼭대기층으로.
김철수이사와 건환이는 짐을 풀고는 자기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은 물론이고 자기 필요한 건 전부 자기가 준비해 오다 보니 짐이 상당했다.
건환이가 가방을 뒤집는데 볼펜이나 포스트잇 같은 게 쏟아졌다.
몇 달은 쓰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양이었다.
"뭐야 사 온 거야? 진작 말하지. 난 또 빈손으로 온 줄 알았잖아."
건환이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천하제일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런 게 돈 주고 사기 제일 아깝잖아요."
이놈이 회사 생활을 헛되이 하진 않았다.
"잘했어. 그런데 커피 같은 거도 좀 들고 오지. 딸랑 이런 것만 챙겼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쇼핑백을 들며 웃어 보였다.
"그럴 줄 알고 제가 챙겨 왔죠."
쇼핑백 안은 그야말로 보물단지였다.
봉지 커피는 물론 녹차, 보이차 등 온갖 종류의 차들이 몽땅 들어차 있었다.
건환이에게 엄지척을 날렸다.
"나이스! 이거 떨어질 때마다 천하제일 한 번씩 다녀와라."
"네. 그렇지 않아도 동기들한테 얘기해 놨습니다. 분기에 한 번씩 들르겠다고요."
자리 정리를 끝내고 각자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려는 때였다.
현타가 온 듯 건환이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대표님. 그런데 저희는 이제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몇 년을 대기업 조직안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주어진 일, 시킨 일만 해 왔었다.
뭔가 일을 새로 하려다 보니 막막해지는 건 당연한 거다.
시스템화되어서 냅 둬도 저절로 굴러가는 대기업과는 완전히 다르니.
"그러게. 이제부터 우리가 그걸 찾아야 하겠지?"
부서 회의를 위해 회의 시간을 잡고 모일 필요도 없었다.
좁은 사무실에 우리 3명 뿐이며 회의실도 따로 없고 그냥 자리에서 부르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투자회사입니다. 사업성은 좋은데 일시적으로 자금이 부족한 회사에 자금을 지원해서 크게 키워놓고 비싼 값에 파는 거죠."
"그러기엔 보유자금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
"네. 그래서 우리도 외부로부터 자금을 끌어 와서 레버리지 효과를 노리고 투자금 회수 기간을 짧게 가져가 회전율을 높이는 걸 고려해야 합니다."
김철수이사와 건환이 모두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힘들다. 그냥 두 사람 끝까지 설득해서 천하제일에 남으라고 할걸.'
도움은커녕 짐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재무, 자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좀 더 쉬운 설명이 필요했다.
원모라도 있었으면 설명해주라고 시키기만 하면 됐을 텐데…….
아니, 시키지 않아도 척하면 척 알아서 나섰을 것이다.
원모의 부재가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할 수 없이 자세를 고쳐잡고 천천히 또박또박 설명해 주었다.
"기술력은 좋은데 당장 쓸 돈이 없는 회사가 있어요. 냅 두면 몇 달 안에 망하는 거죠. 그런데 몇천만 있으면 바로 서비스를 출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회사를 찾아서 투자하는 겁니다."
건환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투자했는데 그 회사가 망하면요?"
"그럼 우리도 날리는 거지."
놀란 듯 건환이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대표님. 단 한 번의 투자로도 몇 달도 안 돼서 그렇게 망할 수도 있는 겁니까?"
"당근이지. 제대로 이해했네."
점점 더 불안했는지 얼굴빛이 새파래졌다.
"예전에 얼핏 뉴스에서 본 거 같은데요. 벤처기업 성공률이 3%도 채 안 된다고 한 거 같습니다."
"건환이 너 경제 뉴스도 보는구나."
"대표님 그러면 우리 회사가 투자한 회사도 성공률은 3%도 안 될 거고, 그 말은 곧 97%의 확률로 망할 수 있다는 얘기네요."
"exactly! 바로 그거야."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그라미를 그려 쏴주었다.
건환이 어이가 없는 듯 씹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한 대 피고 오겠습니다."
"응? 너 담배 안 피잖아?"
"아. 네……. 제 말은…… 커피 한 잔만 하고 오겠습니다."
건환이 멘붕이라도 왔는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나 보다.
조용히 문밖으로 나가더니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와 통화하는데, 복도라 그런지 조용하게 말하는데도 울리듯 귀에 때려 박혔다.
"인사팀이죠? 성과장님? 저 건환인데요."
…….
"네 혹시 며칠 전에 사직서 제출한 거요. 그거 번복할 수 있을지 해서요."
…….
"벌써 처리됐다고요? 혹시 재입사 같은 걸로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
"네……. 할 수 없죠.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후 한숨 소리와 함께 건물 밖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10분이나 지났을까?
건환이 어깨를 잔뜩 늘어뜨린 채 힘없이 사무실로 걸어들어왔다.
"커피 한 잔 했어?"
"근처에 커피숍이 없더라고요."
"그럼 뭐 하다 왔냐?"
"바람 좀 쐤습니다."
"건환아! 그러지 말고 다시 천하제일로 돌아가, 난 정말 괜찮으니깐. 나한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네 길 가라. 어쩌면 아직 사직서 처리 안 됐을 수도 있잖아. 설령 처리됐다고 해도 너 정도의 인재라면 충분히 재입사로도 받아줄 수 있을 거야."
건환이 자식 뜨끔했는지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아닙니다. 대표님과 이사님을 남겨두고 어떻게 저 혼자서……."
말은 그래도 시무룩한 표정을 숨길 순 없었다.
"아니야, 난 정말 괜찮으니까 넌 그냥 돌아가라고. 그저 분기마다 한 번 정도 놀러 와서 저기 커피랑 녹차 같은 것만 좀 채워 주고. 이왕이면 볼펜도."
그러자 갑작스럽게 결의에 찬 듯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아닙니다. 전 뼈를 묻을 각오로 온 겁니다."
뻔뻔한 자식.
복도 통화 소리를 못 들었다면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흘릴 뻔했다.
그래, 그래도 박차고 따라 나온 것만이라도 그게 어디냐.
대기업 연봉도 그렇고 할머니 병원비 등 그 많은 복지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놈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다.
아직 내 능력, 내가 향후 수년간의 역사를 꿰고 있다는 걸 모르니 앞날을 불안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김철수 이사와 건환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아무리 성공률이 3%라고 해도 우리 능력으로는 충분히 100%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천하제일 그룹까지 손에 넣을 수도 있고요. 제 안목 아시지 않나요?"
"넵."
"물론이지. 잘해보자고."
대답들은 시원시원하게 했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는지 떨떠름한 표정이 드러났다.
심금을 울리는 멘트까지는 아니었나 보다.
"자! 그럼 우선 주변분들 총동원해서 자금 유치할 곳 있는지 알아보고 적절한 투자처도 물색해 보시죠."
각자 인터넷도 뒤지고 과거 직장 동료들에게 연락도 돌리면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나도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려 창업했다는 소식과 함께 투자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화 결과는 처참했다.
물론 대부분 창업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기는 했지만, 예전에 차리기만 하면 발 벗고 도와 주겠다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싹 씻었다.
그래, 나 같은 놈을 뭘 믿고 선뜻 돈을 투자할 수 있겠냐.
그래도 자괴감이 들었다.
여기저기 돌리다 보니 전직 K대 교수이자 천하제일 총회꾼이었던 정교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창업 소식 전하면서 나중에 유니콘 기업 CEO가 될 조카의 소식도 들을 겸 연락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입니다. 지난번 세무조사는 잘 마무리됐다니 다행입니다."
"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천하제일 그만두고 투자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래요? 축하해요. 이제 천대표라고 해야 하나? 천대표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참! 예전에 제 조카 기억하시나?"
어떻게 물어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네 기억하다마다요. 정영균씨죠? 창업한다고 했던 거 같던데 잘 되고 있는지요?"
"두어 번 실패하더니 이번엔 꼭 터진다고 했는데, 자금이 좀 꼬였는지 요즘 어렵나 봐요. 혹시 큰 기업 말고 막 시작하는 작은 기업에도 투자하시나요?"
"물론이죠. 저희는 주로 그런 작은 기업에 소액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잘됐네. 조카랑 만나서 얘기 한번 나눠 볼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하죠. 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지난번에 들은 거 같은데 가물가물해서."
이번에 창업한 회사 이름을 대놓고 물어보기 뭐해서 살짝 돌려 물었다.
"음……. 그게 뭐였더라? 잠시만요."
"네, 교수님."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긴장이 되었다.
'제발 예전 생에서의 그 대박 기업, YK라고 말해 주세요. 제발!'
"아, 맞다. 지난번 그 회사는 이미 폐업했고 영균이가 자기 이니셜을 따서 지었다고 했는데……."
이니셜? 영균? 그럼 Y……K?
"교, 교수님, 이니셜이라 함은 혹시 그 기업 이름이 YK 인가요?"
"아! 맞다, 맞아. YK! 내가 요즘 가물가물해. "
"교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응? 뭐가? 이름 알려 주는 게 그렇게 감사할 일인……."
"아, 아닙니다. 제가 그럼 한번 조카분 찾아뵙도록 하죠."
됐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이번 사업은 분명 대박칠 거다.
마침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