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60화 (60/191)

60화 1억

시간이 흘러 1심 판결 선고일.

사무실에서 TV를 켠 채 뉴스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앵커가 헤드라인 뉴스를 전달했다.

"법원에서는 천하제일그룹 조성환씨에게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였으며, 그룹에서는 사주 일가의 사생활이라며 공식 입장 표명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조성환씨는 지난주에 이미 천하제일엔터에서 퇴사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대기업 후계자가 실형까지 받게 된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보다 더한 사건 터트린 놈들도 다들 집행유예로 풀려났었는데.

조성환이 끝내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실형을 면한다면 결국 재벌 봐주기 아니냐면서 역풍을 맞을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말도록 조회장이 지시했다는 후문까지 들려왔다.

물론 조윤경과 그녀 수하의 임원들이 꼬드겼을 것이다.

뉴스를 지켜보던 원모가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팀장님 이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집행유예도 아니고 실형이라니."

"마약을 한 건 맞잖아."

"이건 누가 봐도 당한 거잖아요. 조성환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닌 거 잘 아시잖아요. 상습투약도 아니고 단 한 번에, 게다가 초범인데 실형이라니."

"당한 걸 입증 못 하니 어쩔 수 없지."

원모 자식.

엔터사로 전입온 후 조성환에 대한 충성심이 더 굳세어졌는지 여간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떡하긴. 일 년 콩밥 먹고 나오는 거지 뭐."

"아니, 그거 말고 우리요. 조성환님 없으면 우리도……."

충성심은 개뿔.

혹시나 했는데 역시 자기 밥그릇 걱정이었다.

"우리 팀 역할이 있고 실적도 좋은데 뭔 걱정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마."

"팀장님 내년에 저 결혼하는 거 아시죠?"

"그래? 몰랐어. 정말 축하해!"

원모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봤다.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걱정하지 말라니깐!"

강한 어조로 답해줬는데도 원모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듯했다.

충분히 이해는 갔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자기 밥그릇이 위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할 거라는 걸.

잠시 후 건환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불렀다.

"팀장님! 본부장님께서 찾으신다고 합니다."

"응? 왜 직접 나한테 전화 안 하고 너한테 전화했대?"

"글쎄요……."

본부장, 그 교활한 인간.

일부러 저런 거다.

팀원들이 심리적으로 동요할 수 있도록 내가 본부장실에 불려 가는 걸 알린 거다.

* * *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집무실로 들어가 인사를 건넸는데도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자리에 앉은 채 계속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었다.

직급 차이를 상기시키면서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다.

한참 뒤 눈을 치켜뜨며 그제야 본 척했다.

"어, 천팀장 왔어? 이제는 부르니까 재깍재깍 오네?"

그간 조성환 빽으로 기세등등하더니, 꼴좋다 뭐 이런 정도의 뉘앙스가 풍겨져 왔다.

여전히 앉으라는 말은 없었다.

'가만있자. 내가 이 인간이 앉으라고 해야 앉는 건가?'

왠지 짜증이 나서 회의 테이블 의자를 하나 빼고는 앉아 버렸다.

본부장은 황당했는지 미간을 좁혔다.

"자네 글로벌사업팀은 내일부로 해체될 거야."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어차피 대부분 업무가 다른 팀과 중복되고 신규 기획은 다른 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팀 역할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거지. 정상적인 구조조정의 일환이야."

"조직도상 편제도 되어있고 올해 실적도 초과 달성했는데 갑자기 해체라뇨?"

"왜 이래?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잖아?"

"본부장님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정도면 부당해고 소송감인데? 지금이라도 당장 노동부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역시 그 말이 맞았군. 그렇게 나올 거라고 하더니."

자연스럽게 한 명이 떠올랐다.

"누구 말이죠? 이상현이 그러던가요?"

본부장은 그저 건조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의 표시다.

강단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진작에 조윤경 쪽에 붙은 거였다.

회귀 전에 엔터사 대표까지 승승장구한 건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조윤경 빽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을 거다.

"자네 팀원들은 무슨 잘못이야. 팀장 한 명 잘못 만난 것 때문에, 쯧."

원모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한지 채 1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예상치 못하게 빨리 그리고 더 세게 왔다.

"무슨 말이죠?"

"팀원들 컴퓨터도 없이 휴대폰도 물론 소지 못 하고 화장실 옆 창고 같은 데서 쭈그리고 벽만 보고 있게 할 거냐고."

이런 비열한…….

이건 분명 이상현 그 새끼 생각이다.

"아니, 어떻게 후배들을……. 본부장님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그냥 너만 조용히 나가주면 후배들이 사는 건데. 자네 팀원들은 원한다면 다른 계열사로 발령내든지 해서 인사 불이익은 없도록 보장할게."

다시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집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고 살기 시작했다는 김철수차장.

내년에 결혼 계획 잡았다는 원모.

할머니 병간호까지 병행해야 하는 건환

모두의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러나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차피 며칠 전에 그만두려고 굳게 마음 먹고 어떻게 말을 꺼낼지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다.

팀원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아름답게 퇴장하는 팀장의 모습.

이 그림 제법 괜찮다.

나중에 발간할 내 자서전에도 한 꼭지로 삼을 만하다.

그러나 하나 걸리는 건 조성환이 제대로 사고 친 바람에 꼬라박은 내 주식이었다.

사고 전날 주가로는 분명 1억이었는데, 며칠 하한가 맞더니 서서히 반등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8천만 원이 채 안 되었다.

그 후로 받은 월급 모아 놓은 거에, 예상 퇴직금까지 다 합쳐도 9천만 원 될까 말까.

목표한 종잣돈에서 천만 원이 모자랐다.

"본부장님. 정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할 수 없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애들 걱정은 하지 말라니깐? 나 역시 그 친구들한텐 직속상관이니까."

"그게 아니라."

"그럼 뭐?"

"퇴직위로금은 없을까요? 명예퇴직금까진 바라지 않습니다만."

말해 놓고 살짝 쪽팔리긴 했다.

그러나 쪽팔리는 건 잠시일 뿐 종잣돈은 영원하다.

나중에 몇천 배까지 불어날지도 모르는데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본부장은 어이가 없었는지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퇴직금 좀 나올 거 아냐?"

"얼마 전에 중간정산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회사 주식에 몽땅 쏟아부었었다.

"천 만원. 네고 없습니다."

"내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고 인사팀장하고 얘기해 볼게."

역시 닳고 닳은 직장인 아니랄까 봐 원칙 한번 읊으면서 책임을 쓱 넘겼다.

"아 참! 그리고."

본부장은 귀찮다는 듯 짜증 잔뜩 섞어서 말을 끊었다.

"또 뭐?"

"세후 기준입니다."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퇴직위로금은 퇴직소득이 아닌 근로소득이라 세금을 많이 떼니까.

* * *

다음 날 오전.

"팀장님 정말이세요?"

원모가 어디서 소식이라도 듣고 왔는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럴 땐 한껏 멋있게 너그럽게 모든 걸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한다.

비교적 성공이었다.

"그렇게 됐어. 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저희 정말 괜찮은 거죠? 다른 데로 발령내준다는 말 믿을 수 있는 거죠?"

개자식. 자기 얘기 한 거였다.

잠깐이나마 내 걱정이라도 해 줄지 알았던 내가 바보지.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며 역성을 냈다.

"괜찮다니까! 어제 내가 걱정하지 말랬지?"

"네, 그렇지만……. 저 정말 결혼도 해야 해서……."

"야 이 자식아! 몇 년 전부터 만날 곧 결혼한다더니 정말 결혼하는 거 맞아? 너 혹시 여자친구도 없는 거 아냐?"

갑자기 풀이 죽은 듯 울상이 되었다.

"전셋값이 계속 오르는 바람에 신혼집을 못 구해서요……. 원룸에서 시작할 수도 없고."

더 이상 갈굴 수가 없었다.

그저 되도 않는 위로의 말 한마디나 던져 줄 수밖에.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고충이 있고 또 그게 가장 중요한 법이다.

"팀장님, 그래도 우리 회사 진짜 너무하네요. 아무리 조성환님 멘토였다곤 해도 어떻게 실적도 초과 달성하고 제일 잘 나가는 팀장을 자를 수 있죠?"

"뭐라고? 자르다니? 누가 누굴 잘라?"

이 자식이 어디서 잘못 듣고 왔는지 상당히 오해한 듯했다.

"네? 전 또 퇴직위로금 지급한다길래 권고사직이라도 당하시는지 알았죠."

바로 잡아야 했다.

이대로 나간다면 나중에 이렇게 될지 모른다.

세월이 흐른 뒤 내 자서전이 출판되어 불티나듯 팔릴 때, 이상한 댓글이 하나 달릴 수도 있다.

[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희생하고 나갔다고? 그거 다 뻥이에요. 제가 그때 팀원이라 확실히 기억하는데, 그때 이 사람 그냥 잘린 거예요!]

이 자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옆에 있던 건환이가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과장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우리 팀 해체되면서 팀장님께서 우리들한테 인사 불이익 안 준다는 조건으로 그만두신다는 얘기 못 들으셨어요?"

내 입으로 말하기 상당히 곤란했는데, 건환이가 바로 잡아줘서 다행이었다.

"정말이십니까? 팀장님 죄송합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원모가 사죄라도 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팀장이라고 제대로 한번 챙겨 주지도 못하고 나가는 거 같아서 내가 더 미안하지."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 등 한 번 토닥여 주려 했는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이 자식이 안 보이게 테이블 아래로 휴대폰 열어놓고 문자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본부장을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원모 이놈은 잘라도 된다고.

아니, 제발 잘라 달라고 하고 싶었다.

김철수차장도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천팀장 그만두고 뭐할 거야? 다른 데 갈 덴 정해 놓은 거지?"

"아니요. 전 그냥 조그맣게 투자회사 하나 차릴까 생각 중입니다. 벤처 캐피털 같은 거요."

벤처 캐피털은 기술력은 있는데 자본이 없는 벤처회사에 투자하는 곳을 말한다.

자본을 지원해주고 나중에 그 회사가 크게 성장하면 증권시장에 상장시킨 후 팔아서 큰 이익을 가져간다.

지금 종잣돈이라고 해 봐야 1억밖에 안 되니 바로 벤처 캐피털을 설립할 수는 없을 테지만, 우선은 자금이 부족한 창업 초기 회사에 소액으로 자금 지원하는 일은 시작할 수 있다.

이미 앞으로의 트렌드를 알고 있으니 제대로 옥석을 가려서 몇 배씩 튀길 수 있을 거다.

원모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팀장님. 벤처 캐피털이 뭐예요?"

"재무팀에 몇 년을 있었는데 어떻게 그걸 모르지? 너 신문도 안 보지?"

"보는데요."

"본다고? 뭐 보는데?"

"스포츠신문이요."

그렇지. 그래야 네 교양 수준에 딱 맞지.

"그래도 돈 주고 신문시켜 본다니 의외네."

"돈 주고 보다뇨?"

"그럼?"

"비서실에서 아침마다 팀장님 책상에 올려놓잖아요. 퇴근할 때 들고 가는 거죠. 우리 아버지가 매일 석간신문 볼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조간이잖아."

"아버지는 석간으로 알고 계세요."

아무튼 다음날 출근하면 어제 신문은 사라지고 오늘 자 신문만 있길래 당연히 비서실에서 회수하는지 알았는데.

이놈이 가져가는진 꿈에도 몰랐었다.

"그래? 이제 아버님은 어떡하시냐?"

"그러게요. 이제 못 보시겠네요. 인터넷도 못 하시는데."

내가 퇴사한다고 할 때보다 훨씬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김철수차장이 뭔가라도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투자회사라고 해도 직원이 필요하진 않을까?"

"직원이요? 에이 당장 월급 줄 형편도 아닌데 어떻게요."

"꼭 월급이 아니더라도 주주로는 참여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자금도 보탤 겸."

좋은 생각이긴 했다.

자본금이 더 커지면 그만큼 운영자금도 더 크게 굴릴 수 있고.

"얼마 정도 여유가 있으신데요?"

"한 천만 원 정도?"

도움 될만한 금액이 아니다.

거기다 결국은 투자에 성공한다고 해도 언제 그 이익금을 분배할 수 있을지 기약하기 어려웠다.

가정 꾸려서 돈 들어갈 곳 많은 사람한테는 아무래도 무리다.

"차장님. 다시 직장 나간다고 사모님께서 많이 좋아하신다면서요. 이 회사 최대한 오랫동안 다니십시오. 안정적이고 성장성도 있고 좋은 회사잖아요."

"우리 와이프 다 나아서 이제 병원비도 안 들고 새로 직장도 구한다고 해서."

"차장님.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돈 들어갈 데도 많으실 텐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건환이도 걱정스러운 듯 눈꺼풀을 잔뜩 늘어뜨린 채 쳐다봤다.

"팀장님……."

"돌아가면서 왜 이래 정말. 눈 똑바로 못 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좀 마."

"사업을 그렇게 준비 없이 하셔도 될지 해서요. 천천히 다른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아. 난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어."

미래를 알고 있는 거 자체가 완벽한 준비이고 땅 짚고 헤엄만 치면 된다.

"팀장님께서 제 사직서도 찢고 여기 남을 수 있게 해주셨는데 전 도움드릴 게 없어서……."

예전에 자기 집 찾아가 사직서 돌려준 걸 말한 거다.

"혹시 나한테 빚진 마음이 있다면 조성환과장 돌아왔을 때 옆에서 도우면서 힘을 키워 놔. 그게 빚 갚는 거라고 생각해."

"네? 그게 무슨 말씀……."

"오늘이 끝이 아니란 거지. 다음엔 직원이 아닌 다른 관계로 만날지 모르잖아."

"네."

건환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안 돼도 내 다짐에 걱정만큼은 살짝 내려놓은 듯했다.

그렇게 며칠 뒤 천하제일을 떠났다.

퇴직위로금까지 포함해 목표 종잣돈 1억 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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