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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58화 (58/191)

58화 망했다

"광고주들 배상은 어떻게 하고? 방송이라도 나와서 난 그냥 출연자였을 뿐이다. 그러니 배상 책임 없다. 뭐 이 정도로 끝낼 수 있을 거 같아?"

내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성환이 바로 반문했다.

"람지씨가 반드시 뜰 거라고 확신합니까?"

아람이가 고개를 돌려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궁금했을 거다.

"당연하지. 리애나 Jay를 보면 내 안목은 이미 충분히 입증한 거 같은데?"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성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됐습니다. 계약하죠."

"계약은 계약이고, 지금은 그 전에 배상 문제를 얘기하고 있잖아."

"계약금으로 배상하면 되지 않나?"

"계약금으로? 그게 얼만데. 회삿돈을 네 맘대로 쓰겠다는 거야?"

특A급 연예인도 아닐뿐더러 아직은 생소한 크리에이터였다.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정도인데 내부 결재가 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언제 컴백할 수 있을지, 아니 컴백이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를 판에 몇억이나 되는 계약금을 지급한다?

아무리 성환이 밀어붙여도 힘들 듯했다.

"제가 가불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해볼게요. 몇 달 월급 안 받으면 되죠 뭐."

뜻밖에 비장한 멘트였다.

약간 핀트가 빗나가긴 했지만.

"조과장! 너 솔직히 월급 얼만지 모르지? 급여명세서는 보기나 했냐?"

성환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입술을 다물었다.

"네 월급 한 푼도 안 쓰고 5년을 모아도 안 될 걸."

"에이,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과장인데 설마 이삼천도 안 되려고요?"

쨍그랑!

건환이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람지도 놀랐는지 하마터면 씹고 있던 고기까지 뱉을 뻔했다.

먹방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잃을 뻔한 것이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 자식 정말 급여명세서는커녕 통장 한 번 안 쳐다봤나.

하긴 궁금하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었을 테니.

매일 같은 사무실에서 얼굴 마주하고, 같은 테이블에서 같은 점심 메뉴를 먹어서였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성환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음을.

건환이 얼굴에 우울감이 퍼졌다.

"팀장님, 저 잠깐만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그래. 가서 좀 풀어."

그리 멀리까지는 가지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회의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이런 X같은 세상!!!!"

볼륨 조절에 살짝 실패했는지 나만 들린 게 아니었나 보다.

성환이가 뻘떡 일어났다.

"뭐지? 팀장님, 저 자식 지금 욕한 거 맞죠?"

"아니야. 난 욕으로 들리지 않았어."

"아니야, 저건 욕이야. 분명 욕일 거야."

"사레라도 걸렸나 보지. 설령 욕이었다 쳐. 너한테 한 건 아니야. 뭣 같은 세상에 한 거지."

성환은 이해가 안 가는지 되물었다.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저런 거죠?"

"이삼천."

"아하!"

성환이 화가 살짝 풀렸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건환이가 차분한 모습으로 나왔다.

"시원하냐?"

"네. 팀장님."

"아까 어디까지 했지? 아, 맞다. 성환이 너 월급 가불해 봐야 안 된다고."

성환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럼 월급 더 오래 안 받죠 뭐. 일이천 아니 그냥 미니멈 천만 원이라고 치고. 한 2년 안 받으면 되겠네."

건환이가 땅이라도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또 나갔다 와도 됩니까?"

"아까 다 들렸어. 그냥 여기서 해."

차마 대놓고는 못 하겠는지 고개만 푹 숙였다.

성환 어이가 없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설마 천도 안 되는 거야?"

내가 눈짓으로 대답해 줬다.

"그럼 어떻게 살지?"

도무지 해줄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겸사겸사 분위기도 바꿀 겸 해 성환에게 물었다.

"넌 건환이가 기획안 내놓을 때부터 일인 방송에 대해서 회의적인거 같더니 갑자기 적극적으로 바뀐 이유가 뭐지?"

람지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경험해봤잖아요."

"경험이라니?"

"방금 눈앞에서 생방송을 지켜봤잖아요. 혼자 20인분은 먹은 것 같은데 한 2인분 먹은 줄 알았다고요. 건환이 말이 맞았어요. 그냥 넋놓고 보게 되네요."

이렇게 한 명이 더 입덕했다.

* * *

람지와 친구 오빠와의 계약관계는 몇 번의 내용증명을 보내면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정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신뢰 관계 손상 사유로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잠적한 매니저가 답변은커녕 끝끝내 나타나지도 않아 자연스럽게 계약이 종료되었다.

람지는 본인 계정의 방송을 통해 전격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이전 매니저의 야반도주 등 핑계로 비칠만한 사항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모든 피해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광고주들에게 받은 광고비를 모두 변상하겠다고 했다.

톱스타급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대처가 신선했는지 언론에 보도까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오히려 람지의 인지도가 상승하게 되었다.

* * *

3개월 뒤.

천하제일엔터에서의 람지의 데뷔 방송일.

첫 방송이라 긴장된 마음에 성환이와 같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광고 사실을 숨기고 제품을 노출하거나 언급하는 것은 물론, 광고임을 표시하는 정식 광고도 일체 방송하지 않겠으며 오로지 질 좋은 컨텐츠만 제공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람지는 복귀 첫 방송에서 당당히 무광고 원칙을 선언했다.

복귀 첫 메뉴는 즉석 떡볶이.

장소는 스튜디오가 아닌 람지의 집 마룻바닥이었다.

직접 조리해서 먹는 컨셉이었다.

간접광고라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포장 박스 같은 건 모두 치워 버렸다.

오로지 음식 내용물만 보이게 했다.

꽤 신선했는지 긍정적인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식탁에 앉아서 대화하는 느낌이다]

[마치 여자친구랑 연예하는 느낌이다]

예리한 감상평이었다.

실제로 방송 중 카메라 맞은편엔 건환이가 앉아있었다.

람지가 마주 앉은 건환이에게 그윽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다정한 말을 건네면서 방송을 한 것이었다.

저 표정과 말투는 연출된 게 아니었다.

은퇴 후 3개월 동안 컨텐츠 준비하고 복귀 계획을 짜라고 했는데.

연습 핑계로 법카 들고 매일같이 맛집 찾아다니더니 아예 눈까지 맞았나 보다.

"팀장님. 맞죠? 저 둘 붙어먹은 거."

"그러게. 나도 방금 알았어."

"아, 건환이 자식 람지 론칭한다고 열심히 일하는지 알았더니. 완전 연애질만 했고만?"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왜 상관없어요? 저 자식이 법카를 얼마를 썼는데! 우리 팀 아마 예산 초과됐을 걸요. 회삿돈으로 연애질하느라고."

"법카가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누굽니까? 최.대.주.주! 저 자식이 쓴 돈의 30%는 내 돈이나 마찬가진데."

주인의식!

반박하기 어려웠다.

람지 방송은 첫 방부터 터졌다.

성공이 예정되어 있었다곤 해도 이에 뒤따른 노력까지 부인할 순 없을 거다.

물론 람지의 능력이 가장 중요했지만.

건환이의 기획력도 그렇고 성환이의 안목까지 삼박자가 딱딱 맞은 덕분에 더 크게 성공한 것이다.

람지의 성공 덕분에 천하제일엔터는 많은 크리에이터들과 전속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사업 방향은 단순 방송 제작에만 머물지 않았다.

대형 광고주들 섭외하여 크리에이터와 외부 브랜드간 협업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콘텐츠 공급 및 라이센싱 사업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세가 확장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주가도 자연스럽게 우상향했다.

* * *

천하제일엔터로 쫓겨나듯 합류한 지 어느덧 일 년.

직급은 차장 그대로였으나 팀장이라 직책 수당까지 더해지니 일 년 전보다 월급이 살짝 늘어났다.

거기다 퇴직금까지 중간 정산해서 천하제일엔터 주식에 쏟아부었는데, 마침 주가까지 오르는 바람에 예상보다 빨리 종잣돈 목표에 도달했다.

1억 원.

이제 모두 팔아서 현금화하면 당장 1억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물론 기분이야 날아갈 듯 좋긴 했지만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첫 팀장으로서 같이 고생해서였는지 성환이는 물론이고 원모, 건환이까지 알게 모르게 정이든 것 같았다. 단순한 직장동료 그 이상의 친밀감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결심해야 했다.

이제 난 내 길, 위대한 투자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이놈들은 나 없이 놔둬도 잘 클 수 있다.

성환이도 마찬가지고.

설령 지금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성환이 멘토 역할은 계속할 수 있다.

조윤경과 이상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그래야만 했고.

하지만 굳은 결심과는 다르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도통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도록 판을 깔아주긴 했는데.

날 믿고 잘 따라오기만 하라고는 못 해 줄 망정 이제 와서 나만 쏙 빠진다고 말하기가 너무나도 미안했다.

얘기할 타이밍만 엿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새로 부임한 실장에게 보고할 업무보고 자료를 만드느라 팀원들이 저녁도 못 먹고 야근을 막 마친 중이었다.

"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좀 늦긴 했지만 가볍게 반주 겸 한잔하고 갈까요?"

"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는데 역시 성환이는 안 보였다.

"조과장은?"

"에이, 지금이 몇 신데요."

원모가 뭘 새삼스럽게 묻느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성환이는 내일 따로 불러서 얘기해야겠다.

마음속으로 회사에서의 마지막 회식이라는 생각에 주변에서 가장 비싼 요리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철수차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상한 듯 물었다.

"천팀장,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무슨 일이라뇨?"

"갑자기 야근 끝나고 한잔하고 가자고 하질 않나 게다가 또 이렇게 비싼 집으로 데려오질 않나.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데?"

역시 김철수차장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올해 우리 팀 실적도 달성하고 많이들 고생하셨잖아요. 겨우 이정도 가지고 뭘요. 건환아! 막내가 맘대로 막 시켜 봐라."

건환이가 종업원을 부르더니 메뉴판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주세요."

이 자식이 람지랑 사귀더니 변했다.

"뭐 하는 짓이야? 너 다 먹을 수 있어?"

"이정도야 뭐 30분 각이죠."

순진한 얼굴로 헤헤거린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얼굴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것 같았다.

세 달간 람지랑 사귀며 사육이라도 당한 듯.

"부창부수네 아주."

"네? 부추곱창 시키라고요?"

"이런 씨……. 아니다."

"네. 시킨 거 먼저 드시고 나중에 또 시키시죠."

"너 다 먹어. 뱉기만 해 봐 아주 아작을 내 줄 테니깐."

"넵!"

사람 좋은 웃음으로 실실거렸다.

주문한 안주가 연이어 나오기 시작하더니 술도 술술 들어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었다.

"여러분들. 올해 계열사로 전입 오면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고생은 팀장님이 다 하셨죠."

원모 딸랑딸랑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들어왔다.

흐뭇한 맘에 원모 쪽을 슬쩍 봤다.

개자식. 처먹느라고 정신없었다.

그럼 그렇지.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영혼없이 그냥 털어낸 말이었다.

마지막 회식이니 너그럽게 참는다.

"올해는 걸그룹 레이블도 갖춘데다, 공연 사업은 물론이고 일인 방송 매니지먼트와 컨텐츠 사업까지 잘 확장하였습니다. 다 여러분들이 고생해주신 덕분입니다."

평상시 농담이나 욕만 늘어놓다가 웬일로 안 하던 칭찬을 늘어놓으니 팀원들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뭔가 싸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제 저는……."

퇴사의 변을 늘어놓으려는 찰나에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 번호는 조성환.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이 시간에 이놈한테 전화가 온건 2년 만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X……됐습니다."

"뭐라고?"

"망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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