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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57화 (57/191)

57화 은퇴

며칠 뒤.

오전 내내 건환이 얼굴이 줄곧 죽상이었다.

점심시간에도 건환이가 통 밥을 입에 대는 거 같지 않아 성환이가 한마디 건넸다.

"왜 기획한다더니 잘 안 되냐?"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밥맛이 없어서요. 잘 안 넘어가네요."

"무슨 일인데 안 어울리게 밥이 안 넘어간다고 하지?"

"제가 보는 방송이 멈췄습니다. 큰 문제가 생겨서 몇 주째 새 영상이 안 올라옵니다."

"뭐 먹는다는 거? 그거 못 봐서 밥맛이 없다고?"

"네."

"그 방송 누가 하는 건데?"

"람지라고 있어요. 꽤 어린 친구인데 장난 아니거든요. 먹는 스킬이."

"람지라면 아람이?"

"네? 누구요?"

"어? 아, 아니야. 말이 헛나왔네."

놀란 마음에 본명을 누설할 뻔했다.

개명도 하고 얼굴도 싹 바꾸고 새 인생 살겠다며 비밀 지켜달라고 당부했던 아람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한데.

건환이의 입에서 람지란 이름을 듣게 되다니.

기억하기로는 꽤 시간이 지난 후 유명해진 거 같은데 벌써 듣게 되다니 놀라웠다.

"건환아, 나도 그 방송 보여줄수 있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건환이 컴퓨터로 람지의 영상을 틀어 주었다.

화면으로 비친 아람이의 모습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래도 살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더욱 마른 듯했고 얼굴은 예전 아람이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굉장히 실력 있는 의느님을 만난 모양이다.

심지어 목소리도 방송용의 맑은 톤으로 싹 바꾼 듯했다.

"이제 막 인기 끌기 시작했는데, 뜨자마자 은퇴 각입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저도 기획한다고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어제 들었어요. 소속사가 날랐나 봐요. 광고비 챙긴 건 물론이고 지금까지 수익금도 분배 안 해 주고 다 들고 튀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친구 오빠가 매니저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나 보다.

이 시절은 크리에이터들이 막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초창기였다. 제대로 매니징할 업체도 인력도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틀도 갖춰지지 않은 기획사에서 장부도 없이 뒷주머니로 광고비 실컷 챙기고 출연료도 분배 잘 안 해줬을 게 뻔하다.

"그래서 지금 그 친구 어떻데?"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몇 주째 방송 안 하는 거 보니 강제 은퇴당한 거죠, 뭐."

확실하진 않지만, 회귀 전에 람지는 지금보다는 한참 뒤에 떴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데뷔 초창기에 이 사건으로 은퇴하여 몇 년 쉬다가 다시 나와서 인기를 얻은 것일 거다.

그래서 내가 과거 사건은 모르고 나중에 뜬 것만 기억하고 있는 것일 거다.

* * *

약속 시간까진 꽤 남았지만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에 설렜는지 중식당에 미리 도착해 조용한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여자가 드르륵하고는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잘못 찾으셨습니다."

한 손을 뻗어 정중하게 나가라고 했다.

그런데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안으로 들어서더니 철푸덕하고 맞은편에 앉아 버렸다.

"과장님. 저예요!"

아람이었다.

반년 만에 만난 아람이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바로 코앞에서도 못 알아볼 정도로.

명함을 건네받은 아람이는 팀장 직함을 보더니 마치 자기 일인 것마냥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난 데뷔하자마자 은퇴 기로에 서 있는 아람이에게 데뷔 축하도 건네지 못했다.

그저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밖에는 해 줄 게 없었다.

아람이는 억울한 듯 가슴을 두드리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는 땅이라도 꺼지듯이 한숨을 쉬었다.

허탈해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아람이의 얘기를 종합해서 대략 파악한 내용은 이러했다.

계약서 자체는 예전에 내가 직접 검토해 주었듯이 별다른 게 없었으나 문제는 실행이었다.

아무리 배분 비율을 계약서에 명시했다고는 해도 그건 정산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했을 때의 이야기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익이 100원이 발생했다고 해도 이를 숨기고 10원만 발생했다고 하면 아람이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법인계정을 통해서만 방송을 해서 채널 소유권 자체가 아람이가 아닌 법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 수익의 배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광고 수익에 있었다.

매니저는 아람이에겐 광고 사실을 숨긴 채 '내돈내산'을 빙자한 뒷 광고를 수주했다.

여러 업체들로부터 제품 노출 및 간접 홍보 등 광고 명목으로 수차례 금품을 수령하였으나, 매니저가 도박으로 다 날리고 사채까지 끌어쓰다가 결국 종적을 감춘 것이었다.

간접광고가 너무 티가 나서였는지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채널은 점점 외면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방송 수익까지 감소하는 상황에서 더는 못 버텼던 모양이다.

선급금을 내고 광고를 맡긴 광고주들이 계속 아람이를 찾아오면서 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아람이는 그 고통 속에서 모든 걸 포기하려는 듯했다.

혼자서는 해 본 적이 없어 매니저 없이 방송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설사 계속 방송한다고 하더라도 법인계정이라 정산받을 길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기란 건 가까운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는 의심하고 잔뜩 긴장하고 하니 당할 일이 안 생긴다.

아람이는 가장 친한 친구의 오빠라 믿고 의지했던 것이다.

또한 자기의 능력을 알아보고 발굴해 주었다는 고마움에 정산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크게 의문을 품지 않았었다.

그런데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

정산이야 안 받으면 그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광고 명목으로 수수한 금품을 빼돌린 책임까지 아람이가 지게 된다면 엄청난 금액을 뱉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과장님. 아니 팀장님 이제 저 어떡하죠?"

이 시련만 잘 넘어간다면 몇 년 안에 빵하고 터질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울고 있는 아람이의 얼굴을 보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울고 있는 와중에도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거였다.

난 최대한 잘 듣고 공감해준다고 과몰입을 하였는지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아람이는 쉬지 않고 먹고 있었는지 탕수육과 유산슬은 이미 그릇이 비어 있었고, 소스만 조금 묻어 있었다.

새우는 꼬리만 덩그러니 있어 칠리새우를 시켰는지 깐쇼새우를 시켰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팔보채와 유린기도 어느새 반도 안 남은 듯했다.

아람이는 속도나 양 모두에서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게다가 바로 앞 사람이 먹는 줄도 모르게 먹을 수 있다니 그 신출귀몰함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팀장님. 이제 전 어떡하냐고요?"

"어떡하긴. 요리 다 먹은 거 같으니까 이제 면 시켜야지. 짜장? 짬뽕?"

"아이!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아람이가 욕을 내뱉으려는 걸 간신히 참은 것 같았다.

"미, 미안. 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창창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살짝 귀띔해 줘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아람이가 다짐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결정했어요."

"그래 잘 생각했어. 아직 어리고 너무나 창창한데 앞으로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짜짱이랑 짬뽕이요."

"뭐라고?"

"아까 고르라면서요. 전 짜장이랑 짬뽕이요. 왜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죠?"

우문에 현답이다.

인생엔 or만 있는 게 아니라 and도 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둘 다 고를 수도 있는 거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뭔들 못할까.

우리 팀 신규 사업 추진 방향과 너무 어울리는 게 아람이도 우리와 함께할 수 있을 거 같다.

사이즈가 딱 나온다.

물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긴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팀원들의 몫이다.

"아람아. 아니 람지라고 부를게. 어디 가서 실수하면 안 되니깐."

"네. 편하실 대로 불러 주세요. 그리고 남들 있을 땐 아람이라고 부르진 마시고요."

"알았어. 내가 지금 엔터사에 있잖아. 우리 팀에 건환이란 친구한테서 연락이 갈 거야. 같이 만나서 그 문제 어떻게 해결할지 얘기해 보자. 그땐 내가 초면인 척할게.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아니 팀장님."

* * *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건환이를 불렀다.

"건환아. 지난번 람지인가 하는 친구. 네가 기획하는 사업으로는 딱인 거 같은데. 영입해서 매니지먼트 시작해 보는 건 어때?"

"에이, 팀장님. 저도 당연히 팬인데 그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 여기저기 몰래 광고 수주하고는 먹튀했다고 이 바닥 평판이 장난 아닙니다. 아쉽지만 끝났어요. 그 친구."

건환이 말을 들어보니 단순히 욕 좀 먹거나 돈 몇 푼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은퇴 각인 듯했다.

회귀 전과는 다르게 이렇게 은퇴해서 이 바닥에서 영원히 퇴출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정말 방법이 없겠나?"

"네, 가망 없다고 봅니다."

"한 번 만나서 얘기해 보는 건 어때? 팬으로서"

"에이 만나주겠어요?"

"혹시 알아? 우리 신규 사업 얘기도 할 겸 만나자고 하면 나올지."

* * *

아람이에게 미리 얘기해 놓은 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약속이 이루어졌다.

공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아람이 아니 람지와 미팅을 하게 되었다.

성환이와 건환이를 데리고 약속장소인 흑돼지 집에 도착하니 람지가 먼저 나와 있었다.

아람이는 성환이 얼굴을 알아보더니 놀랐다.

"어? 황태자?"

"네? 뭐라고요?"

그러고 보니 둘이 구면이었다.

작년 아람이가 퇴사하기 직전에 성환이 전입을 와서 근무 기간이 겹쳤었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 본 거 같아요."

"아니에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귀티 난다고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성환이 이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자뻑할 수 있다니 대단한 놈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람이를 알아본 것 같지는 않았다.

노크와 함께 종업원이 들어오더니 메뉴판을 건넸다.

"음 4명이니깐 우선 오겹살 7인분 주세요."

내 주문에 성환이 놀란 듯.

"뭐지? 무슨 계산법이 4명에 7인분이지?"

"우리 세 명 일인 분씩에 여기 람지씨 4인분이잖아."

내 대답에 성환인 뭔 개소리냐는 듯 쳐다봤으나, 건환인 당연하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게다가 팬으로서 동경하는 스타와 마주 앉아 식사한다는 게 여간 즐거운 게 아닌지 그저 먹는 모습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건환이 넌 왜 안 먹냐?"

"먹을 수가 없습니다."

"뭔 소리야?"

"지금 방송 현장에 있는 거 같아서요."

람지는 건환이가 찐팬임을 알고는 감사하다는 듯 눈짓을 보냈다.

몇 분 되지 않았는데 주문한 고기가 바닥났다.

이제야 성환이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알아서 7인분을 더 시켰다.

잠시 후 나와 람지를 번갈아 보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

"저기요. 자꾸 여기 팀장님한테 과장님 과장님 그러시는 거 같은데 예전부터 아시는 분인가요? 아니면 혹시 아는 분이 우리 회사 다녔어요?"

눈치 빠른 놈이라 그냥 넘겨짚으려는 건 아니었을 거다.

우물쭈물하는 아람이를 대신해 내가 대답해줬다.

"예전에 회사 근처 카페에서 알바했었어. 너 오기 전에."

"아, 그렇구나."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는 게 그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세 판째를 비우고서야 비로소 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람지가 수익배분과 뒷광고 문제에 대해 설명하자 성환과 건환이는 안타까운 듯 그저 탄식만 더할 뿐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방법을 찾아야죠."

건환이는 어젠 가망 없다고 끝났다고 하더니 오늘 말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팬으로서 스타를 직접 만나보니 돕고 싶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서였을 것이다.

듣고만 있던 성환이 들고 있던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다 내려놓는 겁니다."

"뭐?"

"은퇴하는 거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금 은퇴 안 하는 방법 찾으려고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거 아냐?"

"사람들은 다 알아요. 진정성 있는 사과가 뭔지. 지난번 회장님이 내 회사 청산한다고 기자 회견한 거 기억 안 나요?"

일감 몰아주기가 기사화되었을 때 조인철회장의 기자회견을 말한 것이다.

아예 싹을 잘라버리고 뿌리채 뽑아 버리는 대처였으며, 그 덕분에 들끊는 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었다.

이놈은 그때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실제로 은퇴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로 와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죠. 물론 그 기간이 너무 짧으면 안 되겠죠."

"그 동안엔 뭐하고?"

"나중에 무슨 컨텐츠를 가지고 방송할지, 그 컨텐츠를 가지고 어떤 사업으로 활용할지, 어떤 브랜드랑 협업할 수 있을지 등등을 준비하는 겁니다. 우리가 단순히 출연진들 방송 출연시켜서 그 수익으로 만족할 건 아니지 않나요?"

성환이가 건환이 기획에 반대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구상도 하고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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