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56화 (56/191)

56화 사직서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도 되나?"

"좋은 데로 가려고요."

"지금 여기는 안 좋은 데니? 누가 스트레스 주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회사는 물론이고 동료분들도 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좋은데 어디로 가는데 알려줄 수 있어?"

건환이는 잠시 입술을 떼는 듯하더니 말을 삼켰다.

"나중에 결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직서를 쓸 정도면 그것도 첫 직장을 그만둘 땐 이미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거다.

아무리 내가 나서서 설득해 본들 쉽사리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게 뻔하다.

할머니도 보살펴야 해서 들어갈 돈도 많을 테니 경력 살려서 연봉도 높이고 자기 시간도 확보할 수 있는 포지션을 구했을거라고 막연히 생각될 뿐이었다.

연봉이나 시간 확보 이런 것들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놔줄 수밖에 없다.

"팀장님, 우리 팀 이제 막 궤도에 오르고 건환이도 이제 적응할 만해진 거 같은데 이대로 보내시는 거예요? 왜 안 잡으세요?"

"한 번 붙잡아보기는 하신 건가요?"

건환이 사직서 얘기를 꺼내자 원모와 성환이 성토하듯 따져 물었다.

그렇다고 개인 프라이버시인데 집안 사정까지 얘기해줄 수도 없고 마땅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 좋은 데로 간 데잖아. 어쩔 수 없어."

"아니,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데가 어딨어요?"

원모가 반박하면서 한쪽 눈으로 성환이 쪽을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찰나의 틈을 파고들어 딸랑딸랑을 시전한 것이다.

성환이는 그저 흐뭇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우리 회사보다 안 좋은 데를 찾는 게 더 쉽거든. 아무튼 좋은 조건으로 회사 옮기는 건 당연한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특이한 시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등 촉이 좋은 놈이라 더욱더 안타까웠다.

* * *

다음 날 아침.

건환이 사직서도 내고 새로운 팀원도 보강해달라고 요청할 겸 인사팀장 사무실을 찾아갔다.

직급이 상무이니 비서가 따로 있진 않았으나 집무실 바로 앞에 여직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아마도 막내 여직원이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본인 일도 할 겸 임원 사무도 봐주고 있는 것일 거다.

"인사팀장님 계십니까?"

"네, 계십니다. 잠시만요."

방으로 안내하려는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잠시 기다리라는 듯 눈짓을 보내더니 여직원이 수화기를 댕겨 받았다.

인사팀장이란 자가 직원을 직제에도 없는 개인비서처럼 부리고 있으면서 자기 전화까지 받으라고 하고 있는 거다.

"인사팀장실입니다."

"네, 계십니다.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

"네, 잠시만요."

인터폰으로 인사팀장을 찾아서 전화 연결을 했다.

"팀장님. 지주사 법무팀 이차장입니다. 전화 돌려드리겠습니다."

법무팀 이차장이면…….

몇 달 전에 차장으로 승진한 이상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호텔 중식당 앞에서 조윤경과 마주쳤을 때 일행 중에 인사팀장도 껴 있었던 게 떠올랐다.

통화를 엿듣기 위해 집중하니 또렷이 들려왔다.

더군다나 인사팀장이 스피커폰을 켜 놓아서 이상현의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상무님, 요즘 몇 주째 보고가 왜 안 들어오는 거죠? 무슨 일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전무님께 직접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 파일 작성하는 직원이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말이지. 벌써 자기 팀에다 사직서도 제출했다고 하고."

"네? 아니 왜요? 여기에 묶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더는 못하겠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어리바리한 놈인데 빨리 치워 버리고 다른 놈으로 섭외할게."

"네. 상무님. 그럼 이번엔 좀 빠릿빠릿한 놈으로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그리고 조전무님께는 심려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 좀 잘 전해드려."

"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어떻게…….

건환이가 스파이였던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성환이 아니 우리 팀 얘기를 인사팀장을 통해 조윤경한테 보고하고 있었던 거였다.

지난번 리애의 영입 때도 그렇고 스노우 공연 때 지유가 일부러 펑크낸 것도 그렇고 건환이가 흘린 정보로 이상현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팀장님 전화 끊으셨습니다.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아니요. 이제 볼일 없어졌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어이없어하는 여직원 표정이 흡사 '뭐야 저 새낀?' 하는 듯했다.

손에 쥐고 있던 건환이의 사직서 봉투를 짓이기듯 꾸겨 주머니 속으로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

왠지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게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건환이 집으로 바로 찾아갔다.

지난번엔 찾아가는 도중 건환이 할머니와 마주치는 바람에 계단까지만 갔었는데, 실제 집은 그 계단을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만 다다를 수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이 위태롭게 얹혀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대문도 어귀가 안 맞는지 제대로 닫혀지지 않아 반쯤 열려 있었다.

집 안쪽을 흘끔 보니 역시 건환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좋은 데로 옮긴다며? 여기가 좋은 데냐? 하긴 집이니까 좋은 데는 맞긴 하지만."

내 말소리에 놀란 듯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어? 팀장님? 어떻게 오셨어요?"

"걸어서 왔지. 이 땀 보면 몰라 이 자식아?"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전화 주시지 왜 직접……."

"그러게. 오다가 후회했다. 이렇게 높을지 알았으면 밑에서 그냥 전화할걸. 나오라고."

건환이는 차가운 물 한 잔을 내오더니 마루에 앉으라고 권했다.

"팀장님 무슨 일로?"

주머니에서 짓이겨진 종이봉투를 꺼내 건넸다.

"사직서 찢어져서 못 냈잖아."

"아니 그럼 다시 쓰라고 하시면 제가……."

"그거보다 직접 듣고 싶어서. 다 알고 왔으니깐 그냥 말해라. 스무고개 하게 할 생각 말고."

"그, 그걸 어떻게……."

건환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이내 다 내려놓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야! 그게 뭔 죽을죄라고. 하여간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었다니 다행이긴 하다만, 내가 궁금한 건 이유야.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자른다고 해서요. 죄송합니다……."

"뭐야 겨우 그거야? 잘리는 게 대수야? 딴 데 가면 되지."

"그게 아니라……. 전 잘리면 안 되거든요."

"왜 안 되는데?"

"할머니가 파킨슨병이라 보험이 된다고는 해도 이것저것 병원비가 꽤 많이 들어요."

"그게 잘리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 회사는 병원비는 물론이고 입원비에 약값까지 모두 지원해주거든요."

그래서 지난번에 내가 냈던 입원비도 돌려준 것이었다.

"다른 회사도 그럴 거 아냐? 그리로 옮기면 되지."

"좀 달라요. 우리 회사도 그렇고 다른 회사들도 입사 이후에 발병한 병에 대해서만 지원해 주는 게 원칙이라 다른 데로 옮기면 못 받아요. 전 비용이 많이 드는 직원이라 인사팀에서도 어차피 중점 관리 사원으로 찍혀있기도 하고 꼬투리만 잡히면 바로 아웃시키려고 할 거였어요."

"그래서 인사팀장이 그걸로 협박했어? 자른다고?"

"……네."

차마 눈을 못 마주치겠는지 그저 고개 숙인 채 기운 없이 대답했다.

파킨슨병은 완치가 되는 병도 아니고 계속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다른 직장으로 옮기면 병원비 지원도 안 될 테니 할머니나 건환이 모두에게 안 좋은 결과만 가져올 게 뻔했다.

"야! 그러면 계속 다녀야지 왜 사표를 내냐? 할머니 잘 보살펴드리려면 더더욱 회사에 악착같이 붙어있어야지!"

"죄송해서요……. 팀장님이나 다른 분들께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더 이상은 못 하겠습니다……."

정보를 흘렸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꽤 열받았지만, 이놈 나름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또 지금은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약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아니 더 심하면 심했지, 나라면 이 정도에서 그만두진 않았을 거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게 배신자, 스파이라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사직서 넣어 둬라."

"네?"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라고."

"어차피 인사팀장이 자를 텐데요. 협조 안 한다고."

"누가 잘라? 네 인사권은 팀장인 나한테 있는데. 네가 원해서 퇴사하는 것도 아니고 자르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아무튼 넌 내일부터 나오기나 해."

건환이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얼핏 비친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야근하지 말고 일찍 퇴근해서 할머니랑 저녁 먹어. 회식 있다고 붙잡지 않을 테니깐. 됐냐? 이 정도면?"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뭘 어디까지 보고한 건데? 인사팀장한테?"

건환이는 노트북에 USB를 꼽아서 보고자료를 열었다.

"이런 씨댕이!"

파일을 열자마자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리애의 캐스팅 계획과 스노우 내한 공연 때 듀엣 섭외명단은 물론이고 어떤 날엔 도무지 쓸 게 없었는지 중국집에 가서 누가 짜장을 먹고 누가 짬뽕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야! 이 자식아!"

"거봐요……. 제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했잖아요."

"아까 내가 한 말 취소다. 사직서 다시 줘 봐. 테이프로 붙여서 제출해 버리게."

건환이가 조용히 사직서를 꺼내 건네주었다.

사직서를 건네받고는 가로세로로 두 번 찢어 버렸다.

"농담이야 이놈아. 내가 자르면 몰라도 넌 내 허락 없이 그만두는 일은 없는 거다. 그리고 앞으론 회사 일을 이 보고서 쓰는 것처럼 체계적으로 하는 거야. 알겠어?"

"네……."

"팀원들한테는 오늘 일은 비밀로 할 테니깐 내일부터 출근해."

"네, 감사합니다."

건환이가 이제야 고개를 들고는 눈을 마주쳤다.

눈동자는 충성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좀 있으면 그만둘 회사인데 자꾸만 일이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발짝 내디딜수록 점점 더 바닥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늪처럼.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네, 말씀하십시오. 팀장님."

"인사팀장한테 할머니 병원비 때문에 도저히 그만둘 수 없다고 다시 보고하겠다고 해."

"네? 다시 보고를요?"

"대신 나한테 먼저 보고하고 넘기는 거지."

이중 스파이를 제안했다.

쓸데없는 정보는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

언젠간 중요한 순간에 역정보를 흘릴 기회가 분명히 생길 것이다.

* * *

금요일 주간업무회의 시간

팀원들과 함께 신규 사업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걸그룹의 해외 공연, 캐릭터 등을 활용한 상품의 수출 등 여러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와중에 건환이가 의견을 제시했다.

사무실로 복귀한 건환이는 이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음고생을 안 해서 한결 편해졌는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사 표현도 할 줄 알게 되었다.

"팀장님! 우리가 인터넷 방송 출연자의 매니지먼트를 하는 겁니다."

"크리에이터 말하는 거야?"

"네? 크리에이터요?"

아차.

이 시절은 크리에이터란 용어가 폭넓게 쓰이지 않았던 때였다.

"아무튼 1인 미디어 출연자들 말하는 거 맞지?"

"네."

옆에서 듣고 있던 성환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이해가 안 가는지 가우뚱거렸다.

"그게 예전에 네가 말하던 거야? 카메라 앞에서 얘기하면서 막 먹는 거 그런 거 한다고?"

"네, 맞습니다."

"장난하냐? 그런 걸 누가 봐. 설령 너 같은 애들이 많아서 많이 본다고 해도 그 사람들을 매니지먼트를 뭐하러 해? 스케줄이 빈번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요, 팀장님?"

건환의 아이디어도 그렇지만 성환의 우려 역시 나름 일리는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성환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대로만, 예전의 방식대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접근하기 쉽고 좀 더 재미있는 방향으로 순식간에 바뀌면서 간다.

트렌드를 주도하지는 못할망정 따라가지도 못한다면 영원히 뒤처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성환이 말대로 단순히 출연자들 매니지먼트만 하자는 건 아니겠지?"

"네. 조금만 생각해보면 할 게 많을 거 같습니다."

"일정 관리하고 방송 촬영해서 화면 잘 받게 해 주고 대본 만들어 주고 뭐 그런 거 말고도?"

"네. 일정 관리는 기본이고 컨텐츠도 잘 만들면 활용할 데도 많을 거 같습니다. 방송 자체가 좋은 광고매체가 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고요."

다른 팀원들은 영 탐탁지 않은지 불만스러운 얼굴을 내비쳤다.

"알았어. 그럼 네가 한번 기획해 봐."

"넵!"

건환이는 자기 아이디어로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는지 우렁차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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