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죄송합니다
성공적인 해외스타 공연과 리애의 대박을 기념하는 팀 회식 일정을 잡았다.
원모는 역시 원모였다.
한우랑 회 빼고 어떤 메뉴든지 괜찮다는 말에 한우보다 비싼 장어 구이집을 예약했다.
"제가 요즘 영 시원치 않아서요."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그래서 어쩌러고 그러냐?"
"헐, 젊은 게 무슨 상관이에요. 많이 쓰니까 장어가 필요한 거죠"
원모 녀석이 말대답하는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 실컷 먹고 열심히 써라."
"넵."
실컷 먹으랬더니 한 젓가락에 두 개씩 집어 들었다.
"많이 먹으랬지, 두 개씩 먹으란 건 아니다. 한 조각에 얼만지나 알아?"
"네."
시무룩하게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더니 한 번에 한 개씩 두 번 입에 가져갔다.
입속에 두 덩이씩 넣는 건 결국 똑같았다.
맘 같아선 덜 익은 장어까지 입속에 쑤셔 넣고 싶었지만,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해서 참았다.
잘 참았다.
하마터면 예전 꼰대들처럼 될 뻔했다.
예전에 회식 때면 엄청 먹어 대던 모직원이 얄미웠는지 김병국부장이 회식 날 오후 그 직원을 불러 손에 천 원 한 장을 쥐여주며 오뎅 두 개 사 먹고 오라고 했다.
다들 농담인지 알았으나 진심이었다.
차마 부장 말을 거역할 순 없어서 그 직원은 정말 길거리 오뎅을 두 개 사 먹고 들어와서는 저녁 회식에 참석했다.
물론 그 친구에게 그날이 마지막 회식이었다.
그 친구는 얼마 안 돼서 바로 사표를 던졌다.
옛날 꼰대들은 회사 월급에는 당연히 상사의 모멸감을 인내하는 대가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맘속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몸에 배어있을 거다.
앞으로의 창의적인 인재들과 어울리려면 빨리 몸에 밴 나쁜 습관을 거둬내야 한다.
"원모야"
"네. 팀장님 하나씩 집고 있습니다."
"아까 농담한 거야. 왜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 세 개씩 먹든지 한 마리씩 먹든지 알아서 해 신경 쓰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원모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옆에 있던 성환이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니 꼭 내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뒤 전화가 왔는지 건환이 수화기를 들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멀리 가지는 않았는지 살짝 집중하자 통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네? 뭐라고요? 할머니가 또 사라지셨다고요?"
"……."
"아니, 파킨슨 환자를 이 밤에 혼자 마실 다니시게 두면 어떻게 해요?"
편찮으신 할머니가 안 보인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해가 갔다.
어디 보는지 도통 모르겠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잠이 부족해서였을 것이었다.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분에게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는 건 건환이가 보호자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부모님과는 같이 안 살고 있고 할머니와 둘이서만 살고 있다는 건데…….'
낮에는 사회복지사분이 돌봐 주신다고는 해도 밤에는 홀로 간호해 왔을 거다.
종일 초점 없이 멍 때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둔한 놈이 아니라 단지 피곤했던 것이었을 뿐.
건환이가 통화를 마치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나를 찾았다.
"팀장님. 집에 일이 생겨서요. 지금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아니다. 일단 얼른 들어가 봐."
무슨 일인지 꼭 물어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꼰대 습관이 또 튀어나올 뻔했다.
심지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건환이 손에 쥐여주었다.
"택시 타고 얼른 가라."
건환이 미안했는지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는 듯했다.
"괜찮다는 데도? 얼른 가라니깐."
여전히 갈 생각을 안 했다.
"저……."
"왜?"
"집이 멀어서 이걸로는 반도 못 가는데요."
역시 물건이다.
다급한 와중에도 이런 말을 꺼낼 수 있다는 게.
하필이면 지갑 안에는 만 원짜리가 마침 그거 한 장뿐이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성환과 원모, 김철수차장을 차례로 둘러봤지만 다들 못 본 척하거나 고개를 절레절레할 뿐이었다.
할 수 없이 5만원 짜리를 꺼내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건환이는 아까 만 원 한 장은 돌려줄 생각은 않고 두 장 다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어! 만 원은……."
거슬려 받을까 하고 손을 뻗었지만 건환이는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휙 달려 나갔다.
뻘쭘한 듯 뻗은 손을 조용히 거두었다.
내일부터는 지갑에 5만 원짜리는 안 넣고 다녀야겠다.
이상하게 5만 원짜리만 있으면 꼭 뭔 일이 생기면서 훅훅 나간다.
* * *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건환이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 원모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내 자리로 찾아왔다.
"팀장님 건환이 오늘 일 있다고 연차 쓰겠다고 합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봤어?"
"네? 팀장님이 연차 쓸 때 이유 같은 거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맞다.
처음으로 팀장이 되면서 팀원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연차 쓸 때 이유 같은 건 묻지 않겠다. 당연한 권리이니 타당할 만한 이유를 대면서 허락받지 말고 그냥 신청하고 당당하게 가라.'라고 말했었다.
건환이는 다음 날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아침에 역시 원모한테 전화를 했었나 보다.
"팀장님 건환이 오늘도 연차 쓴다고 합니다. 이유는 당연히 안 물어봤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누가 물어보랬어?"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하여간 괜히 신경질이셔."
회식 때 통화 중에 파킨슨병이라고 하는 거 같더니 아무래도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팀원들보고 가 보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슬쩍 한 번 다녀와야겠다.
* * *
건환이 인사카드에 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집까지는 차로 진입할 수 없어서 근처에서 내렸는데, 택시비가 정말 2만 원도 넘게 나왔다.
아직 서울에 이런 동네도 있었나 싶은 언덕배기를 걸어서 올라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였다.
좁은 골목길 모퉁이를 도는데 계단 밑에서 빨간 고무줄 바지를 두른 할머니 한 분이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부축하려고 두 팔을 잡아 드리려는데 할머니는 아픈 와중에도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임자. 왜 이리 늦게 오셨수?"
황당한 마음에 손을 놔드리고 그냥 갈 길을 가려는데 뒤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으으윽!"
계단 옆 난간을 잘못 짚어서 구른 듯 고무줄 바지에는 바닥에 쓸린 자국이 선명했다.
"괜찮으세요? 할머니?"
"임자. 아, 왜 이리 오래 걸렸나니깐?"
"할머니 사람 잘못 보신 거 같아요. 전 임씨가 아니라 천씨에요."
"거봐. 임자 천씨 맞잖우."
계속 아니라고 하는데도 아는 사람을 본 것처럼 반쯤은 다정하게 반쯤은 원망하듯이 툴툴댔다.
도저히 할머니 혼자 일어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닌듯하여 두 팔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는데 갑자기 팔을 뿌리쳤다.
"아니. 이 양반이 어디서! 누구신데 갑자기 팔을 붙들어 매?"
아깐 임자라고 하더니 이제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할머니는 잠시 일어서는 거 같더니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마침 지나가던 청년이 있어서 같이 할머니를 부축하고는 도로까지 나올 수 있었다.
차마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억지로 택시를 태워서는 병원 응급실로 데려다주었다.
엑스레이 사진을 유심히 보던 응급실 의사는 사진을 가리키며 연세가 있어서인지 살짝 넘어졌는데도 바로 부러졌다며 수술할 것을 권했다.
까딱하면 보호자 될 분위기였다.
"할머니! 집 주소랑 전화번호는 아세요?"
"아니."
"자녀분들은 같이 안 사세요?"
"몰라. 어디 갔는지."
할머니는 주소나 전화번호는 모르지만, 다행히 본인 이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만났던 지역의 주민센터로 연락하여 이름을 알려드리니 바로 보호자와 연락이 되었다고 했다.
곧 보호자가 온다니 안심이 되었다.
"할머니. 보호자가 곧 오신대요. 전 이제 그만 갈게요. 건강 조심하세요."
내 인사말에 할머니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임자. 이제 가면 또 언제 오시려구?"
또 사람을 잘못 봤다.
잠시 동안 옥신각신하던 중 응급실로 보호자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할머니! 괜찮아?"
설마설마했는데, 건환이었다.
"총각 왔어? 오늘 우리 서방 찾았어."
"어? 할아버지 찾았다고? 어디 계시는데?"
할머니가 검지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이제야 나를 쳐다본 건환이는 눈이 왕밤빵만큼 커졌다.
"팀장님. 어떻게 여길……."
휴게실로 잠시 자리를 옮겨 건환이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티비에서는 흔하디흔한 소재였지만, 실제 주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가정사였다.
실직 후 매일 술독에 빠져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더욱 건강이 악화되어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건환이는 할머니 손에 자랐지만, 세심한 보살핌 덕분인지 다행히 엇나가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까지 구할 수 있었다.
취직 후 이제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맘고생을 심하게 해서인지 파킨슨병을 얻게 되었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면서 이제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만 손자를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건환아. 고생이 많겠다."
"고생은요. 할머니가 저 키운다고 고생하신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 할머니 잘 보살펴드리고 안정되면 그때 출근해. 그때까진 연차 쓰고. 연차 다 쓰면 병가처리 해줄게."
"에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해요. 회사 일은 어떡하고요."
건환이도 역시 대부분 직장인들이 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나 없이 과연 회사가 돌아갈 수 있나?'
뭐 이런 건데.
회사에는 오히려 없어져야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직원들도 많다.
물론 건환이가 그 정도라는 건 아니지만.
맘 같아서는 '너 없어도 회사일 아무 지장 없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게. 신경 쓰지 말고 넌 집안일부터 잘 살펴라."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다른 분들께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건환이는 할머니 수술 때문에 이후로도 일주일간 연차휴가를 더 신청했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다기에 그 전날 조용히 병원 원무과를 찾았다.
"무슨 일이시죠?"
"207호 김말숙 환자 치료비 정산하려고요."
"중간 정산하시게요?"
"네. 내일 퇴원 맞으시죠?"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창구 밑에 내려놓았다.
팀장으로서 어려운 직원을 위해 당연히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남을 돕는다는 마음에 가슴속은 뿌듯함 때문인지 살짝 뜨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네. 잠시만요."
원무과 직원은 컴퓨터 자판을 한참 뚜드리더니 명세서 한 장을 출력해서 건넸다.
"이백십삼만 원입니다. 일시불로 할까요?"
"네? 이백이요? 보험 처리된 거 맞아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이건 원래 갖고 있던 병을 수술하신 게 아니라 자기부담비율이 좀 있어서요."
원무과 직원이 카드를 집으려고 하는 찰나의 순간.
카드를 가로채서 다시 지갑에 넣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고민하는 순간 늦었다.
직원은 빠른 손놀림으로 이미 카드를 집어 올려 POS기에 긁고 있었다.
'잘하는 일이야. 왜 이래? 마음 먹었으면서'라고 왼쪽 머리에서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오른쪽 머리로는 '제발 한도 초과되어라'라고 빌고 있었다.
드르르륵!
그러나 곧이어 결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얻는 거에 비하면 이까짓 돈 몇 푼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홀로 정신 승리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쓰려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 * *
일주일이 지나고 건환이가 출근했다.
자세한 내용까지 몰랐던 팀원들은 그저 뭔 일 있었나 보지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오랜만에 봤다고 반겨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계속 눈치만 보던 건환이가 슬쩍 내 자리로 왔다.
쭈뼛거리더니 조용히 두 개의 봉투를 건넸다.
하나의 봉투 안에는 뭉칫돈이 들어있었다.
"팀장님. 지난주에 병원비 감사했습니다."
"뭘 또. 그냥 넣어둬."
"아닙니다. 병원비는 회사에서 지원되니깐 정말 괜찮습니다."
회사 규정상으로는 동거하고 있는 직계존비속 의료비를 전액 지원해준다는 거였다.
역시 대기업 계열이니 연봉이 살짝 짠 느낌은 있었지만 사내 복지 하나만큼은 괜찮았다.
"괜찮으니까 넣어둬. 할머니 편치도 않으신데 꼭 병원비 아니어도 들어갈 데 많을 거 아냐."
"아닙니다. 팀장님. 정말 괜찮습니다. 제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결연한 의지에 못이기는 척 봉투를 주머니에 쏘옥 넣었다.
두 번째 봉투를 쥐며 물었다.
"그럼 이건 뭐지?"
손에 잡히는 느낌을 볼 때 돈은 아니고 A4 한 장을 접어 넣은 것 같았다.
펼쳐보니 맨 위 제목란에 '사직서'라고 적혀 있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