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54화 (54/191)

54화 재회

리허설 때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 보였던 지유가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더니 이내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관객석에 앉아서 공연을 볼 수가 없었다.

본 공연의 하이라이트이자 시작 전부터 가장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이슈는 과연 어떤 여가수가 듀엣으로 나설지였다.

연예 신문마다 익명의 내부관계자 말을 인용하며 누가 나온다더라는 등 추측성 기사까지 쏟아질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같이 부를 가수가 없다고 이 곡을 패싱한다면 역풍을 맞을 게 뻔했다.

서프라이즈로 나타나게 할 생각에 보안 유지까지 철저하게 한 마당이니, 지유가 갑자기 쓰러져 실려 갔다고 해도 전혀 양해되지 않을 분위기였다.

뭐 같지도 않은 핑계만 댄다며 오히려 관객들의 화만 더 돋우게 될 것이다.

플랜B도 마련해놓지 못해놓은 상태에서 일이 꼬여 버렸다.

"원모야! D사나 Y사 어디라도 당장 섭외되는 사람 있어?"

"섭외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떻게 한 번도 안 맞춰 보고 불러요? 말이 안 되죠."

"영어 잘하는 애들 많잖아. 빨리 찾아봐 봐. 지금 당장."

"네!"

마지못한 듯 조용히 대답했다.

"건환아! 우리 회사 걸그룹 레이블에서도 당장 세울 만한 얘가 있을까?"

"급에 맞고 실력 있는 친구가 없을 텐데요."

"지금 그런 게 급해? 아무나 세울 만한 애 없을까?"

"글세……."

건환이가 얼버무리며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 팀은 물론이고 공연행사팀을 비롯한 모든 관계자가 수화기를 붙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도저히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매달린 것이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스케줄이 비는 유명 가수는 없는 게 당연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에 함부로 섰다가 행여 실수라도 하면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을 게 뻔하니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듀엣 공연은 2부 공연 후반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룡엔터 쪽에도 계속 연락을 취했으나 지유는 여전히 응급실에 누워있다는 답변뿐이었다.

아파서 쓰러졌다는데 쌍욕을 할 수도 없고 그저 쾌유를 빈다는 말만 남겼다.

해결할 기미는 안 보이는데 시간만 자꾸 가고 공연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사실대로 말해되 읍소하듯이 최대한 예의를 갖춰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모두 안타까움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성환이 적막을 깨듯이 한마디 던졌다.

"리애는요?"

"리애가 뭐?"

"리애가 부르는 게 어떻냐고요. 팀장님 리애 실력 알잖아요."

"실력은 알지만 지금 그 분위기가 아니잖아. 톱 클래스도 아닐뿐더러 상황도 그렇잖아. 베테랑도 합 맞추기 힘든 상황인데 이제 막 신인가수가 어떻게 연습도 없이 화음을 넣어."

"팀장님.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땝니까? 아까 리허설 때부터 옆에서 보니깐 리애가 계속 따라 부르던데요? 완전 팬이라면서."

그렇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찐팬이라고 하니 노래 정도는 충분히 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인지도만 약할 뿐이지 데뷔까지 한 가수이기도 하니 급이 밀린다고 해도 아예 막가자는 정도까지는 아닐 거다.

밑져야 본전이다.

빵꾸 내는 것보단 백만 배 나을 수 있었다.

"그러자. 한번 해 보자. 지금 리애 데리고 와 봐."

"네."

몇 분도 안 되어서 리애가 영문도 모른 채 헐레벌떡 달려왔다.

"팀장님 찾으셨어요?"

"리애씨 그……. 듀엣 노래 혹시 부를 수 있어요?"

"네? 리허설 때 지유가 하던 곡이요?"

리애에게 자초지종과 함께 꼭 노래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대답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답했다.

"할 수 있어요. 아니, 하고 싶어요!"

두려움이나 걱정보다는 오히려 설렘이 차오른 듯 두 눈이 일렁였다.

단순히 장어집 사건과 소속사 사기에 대한 보답이라고만 할 순 없을 듯.

그저 팬으로서 순수한 마음에 동경하는 스타와 함께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 설렘은 콘서트장에서의 관객들 반응으로 이어졌다.

리애는 역시 리애.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는 관객들의 표정은 '웬 듣보잡이지?'라고 하는 듯했다.

열광적으로 응원하던 박수와 함성이 일제히 갑작스럽게 멈추었고 관객석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그러나 분위기가 확 바뀌는 데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첫 소절을 떼자 목 뒤쪽에서 찌릿찌릿 소름이 끼치듯 전율이 올라왔고 네 소절이 넘어서자 함성에 노래가 파묻힐 정도까지 되었다.

우리 팀과 함께 연습실에서 오디션을 보던 그때 그 감동이 지금 이 콘서트 현장에서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됐을 것이다.

스노우 역시 프로였다.

쪽지로 초대 가수가 바뀌었다고 미리 알려주긴 했으나 실제 전주가 시작되고 생전 처음 보는 리애가 올라왔는데도 리허설 때보다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화음을 넣으며 리드했다.

공연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듀엣곡을 마치고 무대 뒤로 리애가 내려오고 있었다.

눈물이 차오르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지는 못했다.

관객들의 호응에 힘을 얻어 원 없이 풀어 버렸는지 표정은 오히려 홀가분해진 듯 보였다.

무대가 끝나고 곧이어 몇 명이 외치는 거 같더니 잠시 후 전체 관객석에서 박수와 함께 '앵콜'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상 게스트에게는 앵콜을 외치지 않으므로 레퍼토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노우 또한 관객들의 호응에 감격했는지 뒤돌아서 리애에게 오라며 손짓했다.

리애가 무대 위로 다시 뛰어 올라가자 함성은 더욱더 커져 갔다.

연주자들과 몇 마디 나누고는 앵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라이오넬리치와 다이애나로스의 Endless Love'

워낙 유명한 올드팝이라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리애까지 아는 곡이었다.

무리 없이, 아니 원곡보다 더 뛰어날 정도로 소화할 수 있었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리애는 아까 첫 곡을 마치고 들어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흥분되었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공연 스탭들과 무대감독이 잘했다며 박수와 함께 엄지를 치켜올려 주었다.

이제 듀엣곡이 끝났고 다시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VIP석으로 들어가려고 공연장 문을 여는데 마침 나오는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죄송합니……. 어?"

이상현이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범인은 분명 이 자식이다!

공연 당일 리허설도 마쳤는데 본 공연에서 빵구를 낸다는 게, 그것도 이름도 크게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획사가 대기업계열 천하제일엔터의 뒤통수를 친다는 건 대단한 걸 받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광고 계약 한두 개 정도는 되었을 거다.

갑자기 쓰러져서 앰뷸런스를 타고 갔으니 공룡엔터에서도 우리한테 일부러 빵구냈다는 오해도 안 받을 수 있어 충분히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거다.

조윤경.

이 상황에서 그만한 걸 던져 줄 수 있는 건 조윤경밖에 없다.

그래도 설마 계열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까?

조윤경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룹에 아무리 큰 피해가 간다고 하더라도 동생이 잘나가는 꼴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상현의 팔을 붙잡으며 돌려세웠다.

"너였구나!"

"……뭔 소리야?"

미처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는지 반응이 느렸다.

"왜 그랬냐?"

"……."

대답 없이 살기를 잔뜩 머금은 얼굴의 표정은 예전 동작대교 위에서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왜 그랬냐고?"

이상현은 살기를 살짝 거두고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유가 그렇게 중요하냐?"

"뭐라고?"

"넌 왜 맨날 이유를 물어보냐고? 알면서."

이놈이 이제는 부정하지도 않는다.

"알았다. 넌 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라."

"언제까지 운이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하냐?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공연 잘 봤다. 중요한 통화 중이라 먼저 간다."

이상현이 팔을 뿌리치고는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함성에 묻혀 통화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으나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계획대로 하긴 했는데 변수가……."

* * *

다음 날.

주요 스포츠신문과 연예계 방송에서는 초특급 신인 출연이라는 헤드라인의 뉴스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대중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리애의 1집마저 역주행을 통해 차트 순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다.

뜰 사람은 뜬다.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간 그 실력을 알아주게 마련이다.

빌보드 1위 가수의 내한 공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 팀의 두 번째 프로젝트도 그렇게 성공으로 이끌면서 회사 내부적으로도 목소리를 더욱더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세계적인 가수의 내한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와 더불어 K-pop 스타들 또한 전 세계로 진출하여 우리 문화의 흥을 널리 알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문화산업 최전방의 첨병 역할을 할 것이고 회사의 성장과 더불어 나의 재산도 그만큼 더 불어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종잣돈이 마련되면 퇴사할 테지만, 퇴사하더라도 언젠간 다시 주식을 매입해서 이 회사의 단물을 쪽쪽 빨아줄 것이다.

* * *

콘서트 이후 리애의 데뷔곡이 역주행하듯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케이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방송 프로에도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매니지먼트 담당 팀 소관이긴 하나, 기획 발굴했던 입장에서 첫 음악방송 데뷔를 축하해 주기 위해 나와 성환이 방송국까지 동행했다.

리애는 첫 출연에 설렜는지 리허설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대기실에 도착해보니 톱가수는 아니어서 그런지 다른 가수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그래도 신인 대부분은 대기실 배정도 못 받고 주차장 각자 차 안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이 정도면 꽤나 만족스러운 대접이었다.

대기실에 붙어있는 종이에는 리애의 이름 위에 지유 이름이 같이 적혀 있었다.

하필 지유와 같은 대기실을 쓰는 것이었다.

리애는 놓여 있는 차와 간식들엔 손도 안 대고 대기실 구석구석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간식도 좀 드세요. 차 한 잔 타드릴까요?"

긴장 좀 풀라는 의미에서 리애에게 권했으나 담당 매니저가 당황한 듯 제지했다.

"팀장님. 그건 좀 곤란……."

"곤란하다고? 왜요?"

"같이 방 쓰는 선배가 들기 전에 하나라도 쓰면 안 돼요. 이 바닥 생리가 좀……."

아직 연예계에 이런 똥군기가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딱히 말릴 수 없었다.

이런 문화는 점점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다.

리허설 시간 10분 전.

멀리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나더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 대기실 앞에 멈추더니 누군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질렀다.

"오빠. 뭐야 이거? 내가 왜 대기실을 같이 써?"

"그러게. 잠깐……. 오늘 그룹이 많아서 대기실 여유가 없었나 봐. 오다 보니깐 수진이도 다른 애랑 같이 쓰던데. 한 번만 참자. 응?"

"에이 씨, 뭐야 이게. 그리고 얜 누구야? 그때 내 빵구 떼운 얘 아냐?"

"어? 맞네. 리애."

"쌍판이나 한 번 봐야지."

이어서 문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유와 매니저가 씩씩거리듯 들어왔다.

리애가 배운 듯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리애입니다."

인사는 받아주지 않고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듯하다가 성환이를 보더니 멈칫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라고 놀란 듯했다.

성환이 지유에게 반갑다는 듯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이게 얼마 만이죠?"

"네?"

지유는 물론 리애도 영문을 모른 채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기억 안 나세요? 우리 다들 구면인데."

지유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면이라뇨? 처음 뵌 거 같은데……."

"왜? 또 병이라도 들고 덤벼보시지. 리애양? 기억 안 나요? 이 여자랑 저 덩어리?"

"네?"

"리애양, 예전에 알바하던 데서 껍데기 기름 옷에 튀었다고 이 여자한테 봉변당했잖아요. 그날 알바도 잘렸는데 정말 기억 안 나요?"

"네? 그럼 그때 그 선글라스?"

성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유는 물론이고 리애도 그때 그 상대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는지 매우 놀란 듯했다.

리애는 그때의 억울함이 떠올랐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지유와 매니저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지유씨 누구 사주를 받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빵구내 주신 덕분에 우리 리애가 한 방에 훅 떠서 이 방송에도 출연하게 됐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땜빵 한 번에 동급돼서 지유씨랑 같은 대기실도 쓰고. 이거 참,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내가 놀린 걸 알았는지 지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래도 천하제일 후계자가 있어서인지 차마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씩씩대기만 했다.

그러더니 이내 매니저와 함께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귀를 기울이자 복도를 걸어 나가면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저년인지 알았어?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그거 빵구낸 거야! 그게 어떤 공연인데!"

"어? 미안……. 사장님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어. 대신 3억짜리 CF 받았잖아."

"오빠. 3억짜리 CF가 문제야 지금? 저년이 그걸로 얼마나 떴는데!"

대기실에 혼자 앉아 있던 리애는 다행히 금세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리허설과 함께 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관객 반응은 두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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