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53화 (53/191)

53화 나쁜 예감

금요일 오후 주간업무회의 시간이 되었다.

천하제일엔터에 합류한 이후 두 번째 프로젝트 기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팀 팀명이 글로벌사업팀입니다. 이번엔 좀 이름에 걸맞는 해외프로젝트를 계획할까 하는데요. 좋은 아이디어 있으실까요? 섹시한 걸로다가."

원모가 손을 들고 따지듯이 물었다.

"팀장님. 지난번에 팀명 설명해주실 때 해외는 물론 국내도 글로벌에 포함되니까 어떤 기획이든 국경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진 하지만. 너무 국내 업무만……. 아, 이 자식 거 되게 따지네."

말하다가 갑자기 화가 솟구쳐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올라갔다.

"어어? 이거 봐. 이거. 팀장이 욕하면서 팀 원을 때리려고 하십니까?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까지. 조성환님 방금 팀장님 손 올리신 거 보셨죠?"

성환이 조용히 핸드폰을 쥐고 들어 올렸다.

"제가 찍겠습니다. 한마디 더 하시죠. 아직 좀 약한데 조금만 더."

"이 자식들이 쌍으로……. 알았어. 내가 참는다. 그냥 아이디어나 내놔 봐."

성환이 살짝 손을 들었다.

"해외 아티스트 내한 공연은 어떨까요?"

"뭐, 그런 건 딴 데서도 다 하는 거잖아. 요즘은 웬만한 해외스타들 내한 공연은 매달 하는 거 같은데."

사실 이 당시 해외 팝스타들의 경우 한국은 일본 공연 도중에 잠시 들렀다 가는 아시아의 작은 음악시장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K-pop의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해외 팝스타와 K-pop 스타 간의 협업도 늘기 시작했고 한국 내 공연시장 자체도 매우 커지고 있는 추세였다.

더군다나 국내 팬들의 열광적인 무대 매너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이 이어지자 월드투어의 첫 스테이지로 서울을 선택하는 팝스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까진 내한 공연을 오는 팝스타 수준은 약간 전성기가 지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누가 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죠."

"누구라니?"

"현재 톱스타요."

"톱스타 누구? 백스트리트보이즈라도 부르려고?"

"장난하십니까? 조선 시대도 아니고."

"아니 톱스타라면 대체 어느 정도 급을 말하는 거야?"

"스노우 정도면 할 만합니까?"

"네? 설마 그 스노우요?"

팝음악에 대해 잘 아는 건환이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딴 스노우가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스노우 맞을걸?"

발표하기만 하면 무조건 빌보드 1위로 직행하는 팝스타를 말한 것이었다.

최근에도 신곡을 발표하자마자 첫 주에 빌보드 1위를 찍고 미국 투어를 시작했다고 했다.

미국 투어를 마치면 글로벌 투어를 시작할 테니 지금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냥 뱉어본 말이겠거니 싶어 그저 시큰둥하게 대답해 줬다.

"그래. 섭외해 봐."

"네?"

"섭외해 보라고."

"아니 분위기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건조한 거지?"

이 자식은 손뼉이라도 치면서 호응해 주고 굉장하다고 엄지 한 번 들어주고 이런 거라도 바란 것이었다.

눈치 빠른 원모는 바로 딸랑딸랑을 시전했다.

"와! 조성환님 스노우 아시는 거예요? 장난 아니네. 혹시 설마 정말 진짜로 스노우 섭외하실 수 있는 건가요?"

"네. 막 그렇게 엄청 친한 건 아니고 학교 동기하고 친구라고 하더라고요."

"뭐야! 그럼 모르는 사람이라는 얘기잖아."

빈정대는 내 말이 거슬렀는지 가르치듯 한마디를 더했다.

"친구의 친구면 친구라고 하는 겁니다. 미국에선."

"친구의 친구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국에선. 그냥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하여간 엄청 말 많아."

"안 해! 나 섭외 안 해. 참나 아이디어 내라고 해서 나서서 의견도 내고 일도 직접 하겠다는데 뭐야 이게, 시작부터 초치기나 하고."

이놈 말이 맞다.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나선다는 데 굳이 말릴 필요까진 없었다.

"아니야. 농담이야. 정말 친한 친구네. 부럽다. 섭외해 봐. 아니 꼭 섭외해 줘."

"섭외하는 데 성공하면 제가 얻는 게 뭐죠?"

이 자식은 역시 결이 다르다.

회사 일을 하는데도 뭔가 반대급부를 바라는 놈이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예전부터 선배들로부터 듣던 말을 해 주었다.

"성취감? 일종의 자기만족이라고 할까? 거기다 더불어 실적달성에 따른 성과급까지 뭐 이런 거 아니겠어?"

"안 해! 정말 안 해. 뭐야 그게."

그래,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더구나 이놈한텐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다른 당근이라도 던져줄 필요가 있었다.

"한 장이면 될까?"

"한 장이면 얼마요? 만 원짜리 한 장 주는 거 아냐?"

두 손을 들어 절레절레 저었다.

"돈은 아니고 까임방지권 하나 줄게. 부루마블에서 우대권 같은 거야.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확실히 깨져야 할 타이밍에 그거 내면 아무 말 없이 그냥 넘어가 줄게. 딱 한 번."

"정말요? 그럼 약속하는 겁니다."

이 자식 정말 이상한 놈이다.

겨우 그런 거에 만족하다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 * *

성환은 일주일간 미국 출장을 떠났다.

전화로 해도 될 걸 굳이 끝끝내 직접 만나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며칠 뒤 오랜만에 키썸 오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팀장님. 우리 유라 언제 오는 거예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아무리 활동기간 아니라고 해도 센터를 이렇게 오래 비우게 하면 어떡합니까?"

"네? 유라씨 어디 갔나요?"

"네? 모르셨어요? 조성환님하고 같이 미국 간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사진 안 찍히게 조심해 달라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역시 이놈 자식. 출장은 핑계였다.

오대표도 모회사 대주주라 차마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일주일 내내 전화는 물론이고 메일까지 모두 씹었다.

아주 그냥 작정하고 신혼여행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일주일 만에 사무실에 나타난 성환은 위풍당당함 그 자체였다.

섭외라도 못했으면 아주 아작을 낼 작정을 하고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성환아 미국 측하고는 얘기 끝난 거지? 섭외했어?"

"에이, 제 앞마당인데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고요."

당연하다는 듯 자신 있게 말하고는 회의실 탁자 위로 뭔가를 툭 던졌다.

"드세요. 오다가 생각나서 몇 개 집어왔습니다."

하와이안 초콜릿이었다.

"와! 이거 초콜릿이에요?"

원모가 달려들며 하나를 집어 들었다.

50년대 미군 부대 앞 풍경도 아니고 두 놈이 죽이 잘 맞았다.

"하와이? 너 하와이 갔다 온 거야?"

"네."

"미국 간다며?"

"하와이가 미국 아닌가? 설마 하와이가 한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어이가 없어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난다며?"

"직접 만났죠. 내 친구요. 내가 언제 스노우 직접 만난다고 했나?"

당했다.

이 자식이 집에다가 차마 여자친구랑 휴가 간다고 할 수 없으니 출장 핑계 대고 다녀온 거다.

속이 부글거렸지만, 어찌 되었든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천하제일엔터의 위상만으로는 힘에 겨웠지만 성환이의 미국 내 인맥을 활용한 덕에 다행히 섭외를 할 수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 최상류층 사립학교와 아이비리그를 다닌 덕도 있었겠지만, 문화계 인사들과 계속 교류함으로써 해외 인맥을 유지한 효과도 어느 정도는 보고 있는 것이었다.

"신혼여행이라도 간 줄 알았더니 놀다 오기만 한 건 아닌가 보네."

"그럴 리가요. 이게 누구 회산데요."

말로만 듣던 진짜 주인의식이다.

***

스노우의 경우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곡이 하필 여자가수랑 불렀던 듀엣곡이었다.

그 한 곡을 위해 월드투어마다 원곡 가수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어서 해외 공연마다 해당 국가의 톱스타 한 명을 섭외해 듀엣 무대를 선보이고 있었다.

이번 내한 공연을 위해서도 듀엣곡을 부를 여성 솔로 가수 섭외가 필요했으나 우리 회사의 경우 인기 있는 아티스트가 걸그룹 아니면 남성 힙합 가수뿐이었다.

걸그룹 멤버는 실력은 좋다고 해도 컨셉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른 기획사 가수를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원모야! 솔로 가수는 섭외됐냐?"

"아직이요. 급에도 맞고 컨셉도 맞는 아티스트가 다들 D사나 Y사 소속이라 좀 그렇습니다."

"D사나 Y사면 뭐가 어떤데?"

"걔네들이 남의 잔치에 도와주려고 하겠습니까? 와서 깽판만 안 치면 다행이죠."

아무래도 경쟁사에서 섭외하는 건 좀 곤란한 모양이었다.

현재 빌보드 1위 가수를 섭외하는 남의 집 큰 잔치에 들러리만 선다는 게 영 자존심 상하는 게 아닐 테니.

"중소기획사에도 탑 티어 한두 명은 있잖아."

"네. 그렇지 않아도 공룡엔터에서 지유 섭외할 수 있는지 얘기 중이긴 합니다."

지유는 발라드 가수긴 하지만 힙합 피처링은 물론 여러 장르 가수들과의 듀엣 공연 경험도 많은 스타다.

스노우 옆에 서기에 실력이나 인기 면에서 꿀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오! 괜찮아 그 정도면. 무조건 잡아."

"그런데 많이 세게 부르는데요?"

"무조건 잡아 얼마든지 간에. 알았지?"

"네!"

원모와의 대화를 들었는지 뜬금없이 성환이 끼어들었다.

"팀장님 기억 안 나요?"

"뭐가?"

"지난번 그 장어집."

"그게 왜?"

"정말 몰라요? 그때 지유가 껍데기 엎었다고 리애씨 따귀 때린 거 제가 사과받아 주게 했잖아요. 그 선글라스 끼던 그 여자가 지유였잖아요."

원모도 놀랐는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걔가 지유였다고요?"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성환을 알아보고 장어집을 급히 빠져나가면서 매니저들한테 천하제일에 찍히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도 했지만 그땐 그렇게까지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할 때였고 매니저가 본명으로 불러서였는지 그녀가 지유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TV에 비치던 모습은 청순 그 자체였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

지유 카드를 버리자니 마땅히 대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 개인적인 원한은 잠시 덮어두자고. 혹시 알아? 이번에 가까이해서 배로 갚아줄 기회가 생길지?"

"오. 공사 구분 확실하네."

"원모야. 가서 무조건 섭외해. 시간이 없어. 그리고 공연 때 게스트 형식으로 나와야 하니깐 보안 철저히 유지하고."

"네. 다녀오겠습니다."

* * *

기획은 우리가 했지만, 실제 운영은 경험과 실력있는 공연행사팀이 주관해서 모든 게 큰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공연 당일 오전 리허설.

스노우는 이틀 전 공항에 입국하면서 열광적인 환영인파에 완전히 뻑이 갔는지 매번하는 공연이지만 한층 더 준비에 열을 올리면서 리허설을 실제 공연 못지않게 빡세게 준비했다.

공룡엔터의 지유는 성격은 뭐 같지만 그래도 실력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세계적인 스타와의 듀엣이 충분히 긴장될 법도 한데, 아주 능숙하게 화음을 넣으며 오히려 곡을 리드하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스노우의 표정 또한 굉장히 밝아 오늘 공연은 정말 성황리에 마무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석 매진된 공연장은 두 시간 전부터 스탠딩석 입장을 시작했고, 이후 공연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점점 관객석이 차면서 흥분의 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팀은 가장 좋은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티켓오픈 하자마자 1등으로 클릭해도 얻기 어려운 자리다.

판매하지 않고 VIP 접대용으로 빼놓는 자리인데 이번 공연을 기획했으니 네 자리를 따로 빼주었다.

소속 가수들 역시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공연을 직접 보기 위해 대부분이 자리했다.

리애는 스노우의 광팬이라서 그런지 리허설 때부터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번 자기 뺨 때린 상대가 지유란 걸 모르는 듯 별다른 동요 없이 곡에 심취해 있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자 흥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미친 세상으로 변했다.

왜 해외 아티스트들이 한국에서 한번 공연한 이후로는 줄기차게 다시 찾는지 완전히 이해되었다.

관객들의 떼창에 감명받은 듯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이크를 넘기는 스노우의 표정은 아무리 돈을 많이 받더라도 광고 촬영할 때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그것이었다.

1부 공연이 중반을 치닫고 있는데 공연행사팀 김대리가 관객석 쪽으로 뛰쳐나오더니 급하게 우리를 찾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저런 표정을 짓고 급하게 찾는 건 절대 좋은 뉴스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헉헉! 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빨리 말해!!"

"지유가……."

"걔가 왜?"

"지유가……. 지금 앰뷸런스 타고 실려 갔습니다."

나쁜 예감은 어째 한번을 틀린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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