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스토리
Jay는 오디션 프로에 출연하면서 일 회부터 빵하고 뜰지 알았는데.
이건 그냥 내가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마신 거나 같았다.
첫 방송 반응은 기대에 못 미쳐도 한참이나 못 미쳤다.
실력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주관 방송사가 엔터 업계에서 나름대로 경쟁력 있는 D사인 게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Jay의 카메라 노출 빈도가 다른 출연자에 비해 현저히 낮았던 것이었다.
계약 해지하고 출연했다고 해도 이 바닥이 워낙 좁아서 다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카메라를 덜 받으면 그만큼 대중의 주목도 덜 받게 된다.
인기가 올라가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실력이야 월등히 좋아 예선을 통과할 순 있었지만 3~4주가 되도록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김철수차장이 외근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를 찾았다.
"천팀장. 오디션 프로 알아보라고 한 거 여기저기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천팀장 얘기가 맞는 거 같아. D사 놈들이 편집권으로 갑질한다는 소문이야. 우리 소속사 애들 올라가 봐야 자기네들이 써먹을 것도 없고 하니깐 일부러 구미에 맞는 애들만 띄운다는 얘기가 있어."
자기들 프로에서 뜬 애들은 일정기간 동안은 자기들이 써먹겠다는 얘기였다.
아무래도 우리 소속이면 그게 힘들 테니까 일부러 주목 못 받게 해서 떨어뜨리려는 거다.
"그거 부당행위로 이슈화해서 흔들면 되지 않을까요?"
"조작을 한 것도 아니고 편집권은 방송사 고유 권한이라 뭐라 하기 힘들어. 우선은 개네들을 흔들 생각은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이미 방향성을 잡은 거 같으니깐."
"그럼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성환이 불쑥 끼어들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큰 기대는 안 들었지만, 들어나 보자는 식으로 물어나 봤다.
"두 가지? 그게 뭔데?"
"실력하고 이슈요."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개……. 아니,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어? 실력이야 너도 알고 있다시피 이미 검증됐잖아. 그리고 차장님이 지금 그놈들 짓거리 이슈화하는 건 전혀 도움 안 될 거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아, 답답하시네. 두 분 그런 쪽으로 전문가 아니셨어요?"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해 봐."
"언젠 또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면서요. 지난번에 제가 여자친구랑 스캔들 났을 때도 팀장님하고 김차장님이 러브스토리로 포장해서 언론에 퍼트려 가지고 싹 묻힌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럼 언론 기사를 이용하자는 말이야?"
"아니, 아직 데뷔도 안 한 출연자 히스토리를 어떻게 기사에다 써요? 그럼 대놓고 광고하는 거지."
"그럼 어쩌자는 건데."
"본인 입으로 해야죠. 방송에서. 티저처럼 살짝 띄우고 궁금하게 만들면 아무리 자기들이 편집권 있다고 해도 시청자들이 궁금할 텐데 안 보여 주고 날리겠어요?"
"그것까지 통편집해서 날리면?"
"녹화 방송만 있습니까? 5주 차 때 생방송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다.
생방송은 편집이 불가능하다.
공연에 주어진 시간도 그렇고 감회를 밝히는 시간도 참가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건 이슈일 테고 그럼 실력이라는 건 무슨 말이야?"
"꼭 노래를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곡도 실력입니다. 스토리텔링에 걸맞는 노래를 골라서 터트리는 거죠."
성환은 날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지난 오랜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이건 뭔가 어떤 종류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칭찬이나 감탄이나 뭐 이런 것들을.
역시 주님에 대한 충성심 충만한 김철수차장은 눈치까지 백 단이었다.
짝짝짝!
박수와 함께 닭살스런 멘트를 날렸다.
"역시 주님이십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까지 하실 수가 있죠? 역시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성환이 내 쪽을 지긋이 돌아봤다.
마치 '넌 한마디 안 거드냐'고 하는 듯.
솔직히 지난번 양양을 투입하자는 것도 그렇고 이번 건도 그렇고 번뜩인 아이디어 낸 것까지 부정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차마 김차장처럼 딸랑거리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긴 힘들었다.
"조과장."
"네, 팀장님."
눈망울이 더욱 동글동글해졌다.
"잘했어. 굿샷."
내가 뱉을 수 있는 말 중에 최대한의 극찬이었다.
"참나. 영어 수준 이거 어떡하지? 굿샷이 뭐야 굿샷이. 골프 치나. 굿잡이요. 굿잡."
말은 툴툴거렸어도 이놈도 이제 내 스타일을 어느 정도 꿰뚫었는지 그 정도면 만족한다는 표정이었다.
* * *
오랜만에 김차장의 취재본능이 깨어났다.
정말 뭐 이런 거까지 캐물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출생부터 지금까지 일생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Jay가 여간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니었다.
"차장님. 자서전 써주시게요? 릴렉스."
"아니. 포인트를 찾아야지. 그러려면 히스토리를 꿰고 있어야 해."
적당히 하라는 만류에도 김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Jay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변두리 출신 토박이에 굴곡 있는 인생을 산 듯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역사가 있기 마련이야. 누가 어떻게 포장하냐에 따라 그저 소소한 일기장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블록버스터 대서사시가 될 수도 있지."
김철수차장의 지론이었으며 곱씹어 봐도 맞는 말이었다.
"그럼 이번 장르는요?"
"음……. 이번엔 신파극이야."
"네? 그렇게 식상한 게 먹힐까요?"
"아니야. 티비 매체에선 아직까지 넘버 원이야. 하다못해 전문직 장르 드라마까지도 신파코드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이번에도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걱정 마. 내가 누구야."
결의에 찬 표정을 보니 걱정이 사라지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 *
다행히 본선 진출 후 몇 번의 경연을 통과한 Jay는 Top 10 안에 들면서 생방송에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선 때부터 카메라는 주로 훌륭한 비주얼을 가진 다른 참가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Jay는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무대에 오른 MC는 몇 마디 제대로 하지도 않고는 Jay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께 한마디 남기신다면 누구에게 어떤 말을 가장 하고 싶으신가요?"
다행히 예상 질문 몇 가지에 포함되어 있던 질문이었다.
사무실에 남아 생방송을 지켜보던 나와 김철수 부장은 '됐다. 성공이다!'라며 조용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머니한테 한마디 해드리고 싶습니다."
"네, 어머니께 말씀하신다고요. 알겠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MC가 왼손을 뻗으며 청했다.
Jay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입술을 떼었다.
"엄마! 애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고 와서 혼자 울고 있을 때 해주셨던 말 감사합니다. 넌 충분히 사랑받아야 마땅할 아이야라고 해주시던 그……."
어느덧 울음 섞인 목소리가 떨리더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비록 미리 준비한 멘트이긴 했지만,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과 지금 무대에서의 울음은 진심이었다.
지난 시절의 억울했던 일과 어머니의 따뜻한 위로가 떠올라 주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베테랑인 MC마저 울컥했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간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Jay가 부른 노래는 가족 이야기를 담은 곡이었다.
노래를 마치자 감격에 겨운 듯 모든 심사위원들의 눈시울은 빨개져 있었다.
몇몇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까지 전파를 탔다.
당연히 심사위원들로부터 만장일치 통과 판정을 받았다.
감동적이라는 시청자들의 호평까지 이어지며 Jay는 대중의 엄청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 주 방송에서는 Jay가 예전부터 살던 동네를 찾아가 어머니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까지 땄다.
타고난 음악 천재라기보다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엇나가지 않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자수성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후 계속 경선을 통과하며 우승까진 못했지만, Top 3에 들면서 대중들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오디션이 끝나고 낸 첫 번째 음반 역시 대박 행진을 이어 갔다.
그렇게 Jay 데뷔 프로젝트도 성공적이었다.
* * *
키썸에 100억을 투자한 이후 그 효과는 따따블 이상이었다.
성환이 증여를 받은 지 반년 만에 주당 6천 원이던 천하제일엔터의 주가가 2만 원까지 세 배 이상 뛰었다.
지분가치도 600억 원에서 단숨에 2,000억 원이 된 것이다.
K-pop의 세계화, 폭발적 성장이라는 기류를 타게 됨으로써 천하제일엔터는 주가뿐만 아니라 업계에서의 영향력까지 더욱더 넓어졌다.
이전 생에서보다 천하제일엔터의 성장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몇몇 소속 아티스트들의 대박으로 주가까지 세 배 이상으로 뛸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달 전에 갖고 있던 예금, 증권 다 처분하고 여기에 몰빵할 걸.
주식 4천만 원어치 샀으면 오늘 종가기준 목표 종잣돈 1억을 마련할 수 있었을 거다.
그랬다면 오늘 퇴사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으니 기회는 있다.
앞으로도 천하제일엔터는 계속 성장할 것이니 지금이라도 모두 정리해서 여기에 몰빵해야겠다.
예금, 증권계좌를 모두 정리해 보니 모두 합쳐 5천만 원이 살짝 넘었다.
그 새 몇 달 치 월급도 들어왔고 가입했던 금융상품들도 수익이 났기 때문이다.
몰빵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증권 사이트에 접속하여 금액과 수량을 다 기재하고 이제 클릭만 하면 되는데 멈칫멈칫 손가락이 도통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를 게 확실하긴 하지만 여기에 몰빵하면 다른 좋은 기회를 다 날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주저했었나 보다.
이 주식이 뜬다는 걸 아는 나도 이 정도로 떨리는데 미래를 모르는 사람은 불안해서 어떻게 하는 걸까.
굳은 다짐과 함께 2,500주 매수 주문을 누르려는 찰나 뒤통수가 싸해졌다.
조성환이 고개를 빤히 쭉 내밀고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팀장님 주식 사시게요? 어? 뭐야. 우리 회사 아냐?"
대답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얼버무렸다.
"어? 어어……. 그냥."
"에이. 팀장님 좀 더 쓰시지 딸랑 2,500주가 뭐에요. 2,500주가. 팀장이나 돼 가지고는 쪼잔하게. 그냥 재미 삼아 하시려고요?"
개시끼.
내 전재산이다.
재미는 무슨, 인생을 건 클릭인데.
부모한테 아직 본격적으로 물려받지도 않았는데 이미 천만 주나 있는 놈이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이해는 가지만, 기분은 상당히 더러웠다.
갑자기 딸랑 2,500주밖에 살 수 없는 현실에 짜증이 올라와서인지 검지가 떨려서 더블 클릭을 하지 못했다.
"이 자식이! 내가 재미 삼아 하든 인생을 걸든 말든 신경 끄고 네 일이나 하라고!"
성환은 뭐 땜에 욕 먹은지 모르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창을 열어서 클릭했는데 주문입력이 안 들어갔다.
그 사이에 주가가 200원 올라서 2,500주를 살 수가 없었던 거였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새끼.
나도 모르게 성환 쪽을 쳐다보고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자식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만 멀뚱거리면서 대답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화는 냈는데 화낸 이유를 말할 수도 없고 난처했다.
"너 요즘 사고 한 번 안 치냐?"
"네? 사고요?"
사고 한번 제대로 치면 잠깐이라도 주가가 곤두박질쳐서 싸게 살 수 있을 텐데 이놈 자식 요즘 너무 고요했다.
"아니다. 신경 꺼."
할 수 없이 2,475주로 변경해서 매수 주문을 넣었다.
주문과 동시에 띠링띠링 울리며 바로 체결되었다고 깜빡였다.
이제 전 재산을 이 회사에 몰빵했다.
근무 시간뿐만이 아니라 퇴근 이후의 시간까지 온 종일을 천하제일이란 배에 탄 것이다.
* * *
손대는 곳마다 대박을 친 우리 팀은 더 이상 어떤 챌린지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기대를 모았던 준비된 스타 리애가 문제였다.
수개월의 연습과 다이어트를 거쳐 드디어 데뷔했으나 뜻밖에도 음원 성적과 대중성 기준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일부 전문가층 사이에서 가창력도 뛰어나고 곡 해석력이 좋은 만만찮은 신인이 나타났다는 인상을 주었음에 만족해야 했다.
인기와 성공 여부는 반드시 실력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대중적으로 가다듬으면 반드시 크게 터질 것이라고 리애에게 위로를 건넸다.
리애는 예상밖에 크게 실망한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소속사를 만나 케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목소리는 한결 더 여유로워졌고, 더욱더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