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의심
이틀 뒤.
김철수차장, 성환이와 함께 리애의 기획사로 향했다.
우리끼리 가겠다는 말에도 자기도 꼭 그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한다며 꿋꿋이 버티는 바람에 데리고 간 것이었다.
기획사는 강남이긴 하지만 뒷골목 비교적 한적한 다세대 밀집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았지만, 사무실 안에서 배달도 시켜 먹고 담배도 피우는지 매캐한 냄새가 전혀 빠지지 않은 듯했다.
험궂은 인상의 대표가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해 왔다.
리애 쪽으로는 인사는커녕 눈길 하나 안 주는 게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천하제일엔터에서 나오셨죠?"
"네, 안녕하십니까.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비서가 차를 내오고 의례적인 인사 몇 마디를 건넨 후 여기 온 뜻을 전달했다.
"저희는 리애양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사이인데요. 대표님께서 데뷔하는 데 도움은 전혀 주지 않을뿐더러 각종 명목으로 금품만 갈취한다고 들었습니다."
듣고 있던 대표가 미간을 좁히고는 리애를 무섭게 노려봤다.
"뭐라고? 네가 그랬어? 이런 은혜도 모르는 게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말을 씨불여. 우리가 너한테 들인 돈이 지금까지 얼만데."
"저희는 사내 변호사를 통해서 검토해봤습니다. 리애양과의 전속계약은 이미 신뢰 관계가 훼손되었다고 판단되므로 계약해지를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어차피 계약서 들고 법정 가 봐야 노예계약이라고 무효될 게 뻔한데 그냥 좋게 마무리하시죠."
"아니 뭐라고? 노예계약? 니들이 계약서나 봤어?"
대표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뭐야? 그간 얘한테 연기 지도다 보컬 교육이다 뭐다 해서 들어간 게 얼만데. 그 돈 다 뱉어낼 수 있나? 전속계약 만료되려면 앞으로 5년도 더 남은 거는 아나? 확 그냥 그때까지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해버릴까 보다."
미리 어떤 협박이 있더라도 별거 아니니 안심하라고 수차례 얘기했었지만, 리애는 막상 이 바닥에서 매장시키겠다는 말을 들으니 덜컥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한마디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대표의 반응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결국 돈으로 해결하자는 얘기였다.
별문제 없이 빠르게 해결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럼 2억이면 되겠습니까?"
"뭐? 지금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
대표는 분이 안 풀린다는 듯 테이블을 쾅 내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이어서 익숙한 듯 병풍처럼 서 있던 두 명이 손을 허리춤에 올리더니 위협하듯 아래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협상을 주도하려고 판을 깬 척 나간 거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절심함을 이용해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을 이런 식으로 엄청나게 뜯어 먹었을 것이다.
잠시 뒤, 사무실을 나간 대표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댁들이 얘기한 대로 그 놈이 빼가겠다고 하네요."
"저놈들이 3억 부르는데 어떡할 랍니까? 난 그 정도면 그냥 받고 넘길까 하는데."
누군가 우리 일을 훼방 놓는 놈이 있는 거였다.
거기다 사기꾼 같은 대표는 그새 1억을 뻥튀기 했다.
정말 예측 가능한 전형적인 양아치다.
누구 짓인지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른 기획사 측에서 갑자기 하루아침에 리애의 스타성을 알아보고 큰돈을 주고 가로채려는 것은 아니었을 거다.
조윤경의 짓임이 틀림없다.
다만 어떻게 알았는지가 궁금할 뿐.
아무리 봐도 새 나갈 데가 없었는데.
연습실에서도 담당 엔지니어들은 음향 세팅만 해주고 나가게 했었고.
리애의 보컬 실력은 물론 우리가 영입하려 한다는 사실도 오직 우리 팀끼리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믿고 싶진 않지만, 정황상 우리 중 누군가가 흘렸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았다.
대표는 한참 동안 상대방과 금액 협상을 하는 거 같더니 최후통첩을 보냈다.
"알았수다. 그럼 3억으로 하고 천하제일로 안 넘기는 대신 댁들이 얘기하는 데로 넘기죠."
한참을 통화하고 사무실로 들어온 대표가 자신만만하게 서류뭉치를 테이블에 던졌다.
"당신이 말한 전속계약서 여깄수다."
기획사와 리애가 직접 사인을 한 계약서 원본이었다.
전속계약금은 없으며 방송 출연료나 음반 판매 등 모든 수익 활동에 대해서는 거마비 및 직접경비를 제외한 순익에서 5:5로 배분한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밖에 추가적인 비용은 양 당사자 간에 별도 협의한다는 내용이었다.
끝장까지 대략 훑어봤지만, 전형적인 표준계약서 양식 그대로였다.
계약기간도 그렇고 배분 비율도 그렇고 계약금만 없었을 뿐이지 계약서 자체로만 봐서는 아티스트측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노예계약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김철수차장도 계약서를 훑어보았지만,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조용히 내 쪽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여기서는 전속비를 아티스트가 기획사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은 없는데요? 리애양 부모님이 지급한 전속비가 오천만 원이라고 했던가요?"
"그건 전속계약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항입니다."
"방송 출연 명목으로 요구했다면서요?"
"네, 방송 출연하도록 노력했으나 얘 실력이 모자라서 결과가 안 좋은 거였지."
"보컬 레슨비는요?"
"그건 얘가 필요해서 받았을 뿐 우리가 강요한 게 아니고 전속계약과는 아무 관련 없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계약 조건상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 외 추가적인 비용은 얘가 부족하다고 부모님이 요청해서 들어간 것뿐입니다."
듣고만 있던 리애가 억지스러운 대표 주장에 불끈했다.
"그거 대표님이 요구한 거잖아요. 방송 출연하려면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학원 다녀야 한다고, 다 그렇게 한다고……."
억울했는지 말하는 도중 울음이 터져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언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건 다 네가 부족하다고 부모님이 시켜달라고 한 건데 이제 와서 누구한테 뒤집어씌워?"
정말 악질 같은 놈이었다.
게다가 흥분해야 할 때 흥분할 줄 알고 차분해야 할 때 차분할 줄도 아는 협상에도 능한 놈이었다.
소송에서 따지고 들면 반드시 이긴다고 보장할 수는 없을 듯했다.
만약 이 자리에서 계약해지 조건으로 3억을 넘게 부른다면 이 놈은 다시 조윤경 측에 전화를 걸 것이다.
결국 금액만 계속 높아질 뿐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검증도 안 된 신인가수를 영입하려고 큰돈을 쓰는 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조성환의 입김을 통해 그 돈을 쓸 수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 어떤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될지 모르니 쉽사리 결정하기 곤란했다.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환은 미련이 남았는지 계약서를 이리저리 뒤져봤다.
노래를 직접 들어봐서 머지않아 대스타가 될 게 확실한데 아무래도 눈앞에서 놓치는 거 같아 매우 안타까웠나 보다.
성환이 계약서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살피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계약 일자가 없죠?"
대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왜 꼭 필요한가? 필요하면 적으면 되지."
성환은 리애를 향해 되물었다.
"여기 사인 리애양이 직접 한 거예요?"
"네, 맞아요. 왜요?"
"이 계약서 사인은 언제 했죠?"
"네? 음…….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 달에 했으니깐 3월이요. 작년 3월."
"생일은 언제죠?"
"생일이요? 6월 14일이요. 근데 그건 왜요?"
리애의 대답에 성환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자세히 보니 걸린 게 돌이 아니라 금이었던 것마냥 표정마저 급격히 밝아졌다.
"계약 당시 나이는 스무 살이었지만, 생일 안 지났으니깐 만으로는 18세. 미성년자였네."
헐!
믿기지 않지만, 성환이 해냈다.
"아니, 어떻게?"
"뭐야? 설마 팀장님 모르는 거예요?"
"아니 내가 왜 몰라? 그냥 네가 어떻게 알았냐고 물은 거지."
"여자친구가 몇 년 전에 소속사랑 계약했잖아요. 그때 미성년자라고 부모님이 대리해서 사인하셨다는 얘기 들었죠."
미성년자는 계약할 때 법정대리인의 동의 또는 대리행위가 필요하다.
그런데 리애의 계약서에는 어디에도 동의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님이 리애를 대리해서 사인한 것도 아니고 그저 리애 사인만 기재되어 있었다.
대표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었는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리애를 쏘아붙였다.
"야! 너 스무 살이라매!"
성환이 대신 놀리듯이 대답했다.
"스무 살은 맞지. 다만 생일이 안 지났으니 만으로는 18세이지만. 미성년자. 흐흐"
대표는 씩씩거리며 계약서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러다 잠시 뒤 미세하게 광대뼈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테이블에 놓은 볼펜을 들더니 계약서 위에 재빠르게 무언가를 적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상황 끝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서였는지, 우리 측 어느 누구도 이걸 막아야겠다라고 빠르게 나선 사람이 없었다.
그저 눈 뜨고 당했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역시 대표는 계약서에 계약 일자를 기재한 것이었다.
작년 7월 14일로.
아까 리애가 얘기한 자기 생일보다 딱 한 달 뒤였다.
이로써 계약체결일에 리애는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게 되었다.
황당한 마음에 우린 모두 입만 벌리고 있으니, 대표가 놀리듯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푸하하! 이렇게 하면 성인된 거네. 이런 바보 자식들."
양아치한테 눈 뜨고 코 베인 것도 모자라 바보라고 욕까지 먹고 기분 정말 더러웠다.
"아니, 이거 아주 양아치구만!"
더러운 기분에 욕을 내뱉었으나, 대표는 승리감에 도취한 듯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기분이 더더욱 더러워졌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반격해야 했다.
"리애양, 전속비를 언제 지급한지 기억하세요?"
"네? 음……. 작년이긴 한데……."
리애는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인지 좌절감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표가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다시 놀리듯이 대꾸했다.
"전속비야 뭐 계약사항과는 별개니깐 설령 계약일보다 빨리 지급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문제될 거라도 있겠나?"
사람은 외모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다.
대표는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치밀하고 두뇌 회전까지 빠른 놈이었다.
역시 사기는 아무나 치는 게 아니다.
"그럼 리애양! 대표랑 계약 관련해서 문자나 메일 주고받은 거 있어요?"
"……아니요. 그냥 전화나 말로만."
"녹음도 안 되어 있고요?"
"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이것저것 물었으나 절망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리애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조용히 쳐다봤다.
"저기 팀장님……."
"네. 말씀하세요. 어떤 거라도 좋으니 부담 갖지 말고."
"제가 실제 생일은 6월인데요. 부모님께서 출생신고를 100일 지나고 해서요. 주민등록증에는 생일이 10월로 되어 있어요."
게임 끝났다.
9회 초 역전당했다가 9회 말 투아웃에서 연속 홈런으로 다시 역전한 것이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왔다가 다시 천국으로 갔다.
"뭐라고? 주민등록증 봐 봐."
대표가 좀전의 침착함은 잃고 흥분해서 날뛰는 듯했다.
리애가 건넨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는 이내 자기 머리를 감쌌다.
"저기 대표님. 날짜를 아예 볼펜으로 박으셨던데. 찍찍 긋고 다시 쓸 수도 없고, 아무튼 고맙습니다. 알아서 해결해 주셨네요."
"뭐라고?"
대표는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 계약서는 법정대리인 동의없이 미성년자가 사인한 거라 무효입니다. 꼼수의 끝은 자충수입니다. 앞으로라도 제대로 사시죠."
"뭐라고? 이게 어디서?"
"자! 사기죄로 고소해서 지금까지 뜯어낸 돈에 이자까지 다 토해 내게 하고 싶지만, 시끄럽지 않게 이쯤에서 그만두는 걸로 아십시오."
"그렇겐 못 하지. 내가 너네들 가만둘 거 같아?"
이런 놈들한텐 좋은 말로 해봐야 아무 소용없고 같이 세게 나가야 한다.
"가만 안 두면 어쩔건데? 우리 같은 대기업이 그룹 내 사내 변호사만 몇 명인지 알아? 너네 아주 탈탈 털어서 빈털터리 만드는 건 일도 아냐. 빨리 꺼지지 못해?"
잔뜩 흥분해서 소리 지르는데 성환이 내 바지를 댕기더니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여기 얘네 사무실인데 어디로 꺼집니까?"
잠시 뒤 우리가 꺼졌다.
들어갈 때는 돈으로 해결할지 소송으로 갈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지만 결국 돈도 소송도 필요 없이 깔끔하게 해결하고 나올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지만, 운이 따랐다.
사무실을 나서는 리애 얼굴에서는 어느새 어두운 그림자는 전부 걷히고 맑고 순수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야 Top 스타의 아우라가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은 기분좋은 웅얼거림으로만 가득했다.
일단 좋은 건 좋은 거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갈 건 짚어야 했다.
"리애양, 혹시 이번에 주변에다가 우리랑 계약할 거 같다고 얘기한 적 있어요?"
"네? 아니요. 전혀요."
역시 해결도 안 된 일을 가지고 미리 얘기할 처지는 아니였을 것이다.
성환과 김차장에게도 물었다.
"그러면 두 분 중에서 혹시 리애양이 오디션을 봤다. 우리가 영입할 거다 라고 다른 사람한테 얘기한 분 있으십니까?"
"뭐? 설마 우리가. 근데 무슨 얘기라도 있었어?"
김철수 차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느낌이 싸해서요. 아까 저 대표 만났을 때 명함도 주기 전에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 같아서요."
"에이, 그건 어제 약속 잡으려고 미리 전화해놓아서 그런 거겠죠."
성환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넘겼다.
"그렇지? 괜히 내 느낌이 그런 거겠지?"
성환이는 당연히 아닐 거다.
그리고 갑작스런 질문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던 김차장 역시 조윤경에게 흘릴 사람이 아니다.
설마 은인같은 나한테 그랬을라고.
그렇다면 이제 원모랑 건환이 두 명 남았는데?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샌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은 의심을 거두자.
하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니 앞으로 더욱 주의는 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