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49화 (49/191)

49화 리애

한 주가 마무리되면서 주간 업무보고 시간이 되었다.

어차피 인원도 몇 명 안 되는 거 보고 만을 위한 보고서는 비효율적이어서 과감히 버리고 그저 구두로 하기로 하였다.

"원모는 무슨 일하고 있지?"

"네, 전 밴드 쪽 레이블 보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

"진행 상황이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묵묵부답.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원모를 제대로 키워야 한결 마음이 놓일 텐데.

아직은 갈피를 못 잡는 모양이었다.

"원모야!"

"네."

"발로 뛰어라."

"네?"

"이제껏 계속 책상에만 앉아서 숫자만 봐 와서 그게 익숙하겠지만 이제는 아니야. 있는 걸 정리하는 게 아니라 없는 걸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 직접 뛰고 부딪쳐 봐. 자리 안 지킨다고 뭐라고 안 할 테니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성환이는 뭐 하지?"

"전 발라드 담당이잖아요. 여성 솔로 섭외 중입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장어집에서 알바하다 잘린 그녀!

리애였다.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곧 여성 솔로 Top이 될 인물인데.

그나저나 어디에서 찾지?

알바라도 안 잘렸으면 찾아가면 그만일 텐데 잘린 마당에 어디 가서 찾을지 막막했다.

"그때 장어집 알바생 기억나? 따귀 맞고 알바도 잘린. 네가 그 선글라스 여자한테 사과받게 해줬잖아"

"아 네. 그럼요 기억나죠. 팀장님이 어디서 많이 봤다고 한 분이요. 갑자기 그분은 왜요?"

"찾아. 무조건 찾아!"

"네? 왜요? 이제 와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받으려고?"

"아니. 기타 들고 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어."

"예사롭지 않다니 뭔 말이지?"

"가수가 될 상이었어."

내가 말해 놓고도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헐, 뭐래. 또 저래. 아예 대학로에 돗자리라도 피든지 아님 작두라도 타지 그냥."

"뭐라고?"

"아니 납득이 안 되잖아요. 납득이. 가수가 될 상이라니. 아예 관상가 나셨구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길거리에서 버스킹하는 거 우연히 들었는데 장난 아니더라고."

"그럼, 거기 찾아가면 되죠."

"이제 안 하는거 같아서 그러지. 그때 거기 장어집 근처에서 다른 알바할 수도 있으니깐 퇴근 조금씩 일찍하고 근처 돌아다니면서 찾아봐 봐."

"아니,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찾아요? 그리고 내가 왜 찾아요?"

"네가 얼굴 아니깐 그러지. 그럼 내가 가리? 오늘부터 건환이랑 돌아다녀."

멍 때리고 있다가 뜬금없이 자기 이름이 불리자 건환이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손을 들었다.

"저……. 팀장님. 질문 있습니다. 그럼 팀 경비로 저녁 먹어도 되겠습니까?"

예측 불가한 놈이다.

"그래, 매일 저녁 세 끼든 네 끼든 맘대로 먹고 청구해. 사인해 줄 테니깐."

"네. 감사합니다."

헐, 야근시켜서 미안했는데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까지 듣고 아무튼 희한했다.

이 당시는 퇴근 후까지 할 일을 주는 문화가 어느 정도는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김차장님은 필요할 때 우호 기사 쓸 만한 곳들 섭외 부탁드립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원모는 짐 챙겨라. 지금 나랑 같이 갈 데가 있다."

"네 지금요? 어디요?"

"청계천!"

* * *

혹시나 해서 와본 청계광장 초입.

다행히 Jay가 있었다.

오늘도 역시 선글라스를 낀 채 발밑에 기타 케이스를 열어 놓고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기타 케이스 안에는 신사임당이나 배춧잎은 찾아볼 수 없었고, 동전들 사이로 천 원짜리 몇 장이 삐져나와 있을 뿐이었다.

노래 몇 곡을 연이어서 부르는데 귀 호강을 하는 듯했다.

이런 곳에서 썩힐 인물이 아니다.

이 장르 저 장르 범람하는 오디션의 홍수 속에서 곧 원석으로 발견될 인물이니 우리가 먼저 선점해야 한다.

마지막 노래가 끝나고 기타 줄을 정리하는 도중 오늘은 5만 원짜리 지폐가 아닌 종이 한 장을 기타 케이스 안으로 던져넣었다.

흰색이라 수표인지 알고 잠시 흠칫했던 Jay가 종이를 펼쳐보더니 실망하듯 물었다.

"이게 뭐죠?"

"전속계약서입니다."

"네? 계약서요?"

제대로 보지 않았는지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저 기억 하시겠습니까? 한 달 정도 전에 뵙긴 했었는데."

선글라스를 올리며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때 그 5만 원? 팬이라고 해주신 거 감사합니다. 성공할 거라고 덕담해 주신 것도요."

"네. 물론 팬이죠. 그런데 이제 팬과 동시에 매니지먼트까지 하고 싶은데 저희랑 함께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어디신데요……? 분위기가 이쪽 계통이 전혀 아니신 거 같은데……."

가만히 듣고 있던 원모가 명함을 꺼내서 Jay에게 건넸다.

"저희는 천하제일엔터에서 나왔습니다."

"네? 천하제일엔터요? 아니, 그런 데서 왜 저한테……."

"버스킹하는 거 몇 번 보면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저희와 함께 해 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이때의 Jay는 찬밥 더운밥 가리는 시절이 아니었다.

전속계약서인데 대강 한 번 훑어보지도 않고 대답부터 했다.

"네, 하겠습니다."

"아직 계약서도 안 보신 거 같은데요?"

"나중에 천천히 보죠, 뭐."

"저희가 이상해 보이거나 사기꾼 같지 않으세요?"

"전혀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쉽게."

"지난번에 마지막 버스킹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려고 했는데 그날부터 팬이라는 말씀 덕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단 한 명의 팬이라도 있다면 충분히 노래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성환이 퇴근 후 건환이를 데리고 지주사 주변 고깃집 등을 뒤진 지 삼 일 만에 리애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팀장님, 그때 그 알바생 찾았습니다."

"정말? 벌써?"

소식을 듣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주 앉은 성환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뭔가가 있는 것이다.

"뭐지? 찾았다며, 왜 이리 심각하지? 빨리 말해 봐."

"그게 저희 명함 주고 정중하게 오디션 한번 보자고 했는데요. 그분이 이미 다른 기획사랑 전속계약 체결했다고 하더라고요."

"뭐? 언제까지?"

"7년 계약이고 아직 5년 넘게 남았데요."

"아니, 근데 왜 알바를 하지? 데뷔 준비는 안 하고?"

"그게……."

성환이 살짝 머뭇거리며 옆으로 눈짓을 보내자 김차장이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조성환님께 어젯밤에 그 얘기를 듣고 계약했다는 기획사를 좀 알아봤는데. 아주 질이 나쁜 덴가 봐. 아주 양아치 같은 놈들한테 걸렸어."

"네? 양아치라뇨?"

"데뷔 명목으로 돈 갈취하고 뜯어먹고 그런 데 있잖아."

분명히 리애는 곧 탑스타가 될 텐데? 그것도 이름있는 메이저 기획사를 통해서.

아무래도 데뷔 전에 알려지지 않은 무슨 우여곡절이라도 있었나 보다.

성환이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물었다.

"팀장님, 그런데 그 친구는 데뷔도 안 하고 실력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영입하려고 하는 거죠? 어제 물어보니깐 버스킹은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하던데."

지난번 내가 버스킹하는 걸 봤다고 왜 거짓말했냐며 따지는 것이었다.

"음, 맞아. 그냥 내 예감이야. 그냥 예감이라고 했으면 안 믿었을 거 아냐?"

"예감이요? 무슨 확 들어오는 느낌 뭐 그런 거?"

성환은 기가 차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대스타가 될 거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담았다.

"참나. 정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 내일이라도 알바하기 전에 연습실로 잠깐 들르라고 해 봐. 전속계약 문제도 상의할 겸."

성환이처럼 차마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김차장, 원모, 건환까지 모두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 하는 표정이었다.

* * *

약속 시간이 되자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 리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평범하다는 애들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게 생겼지만, 다르게 얘기하면 아직 촌스러운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기타가 아니라 봇짐이라도 하나 들고 있었으면 딱 서울에 막 상경한 시골 소녀로 봤을 거였다.

"안녕하십니까. 권리애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천태평입니다. 지난번에 장어집에서 뵀었죠? 기억하실는지."

"기억납니다. 그때 명함도 주셨죠. 천하제일엔터는 아니였던 거 같은데."

"네, 최근에 옮겼습니다."

"근데 어떤 오디션인가요?"

"자세한 건 좀 있다 천천히 얘기 나누고요. 우선은 실력을 한번 보고 싶어서 모셨습니다."

녹음실로 들어간 리애가 소리를 내며 목을 풀기 시작했다.

뭐 시간 많으니 한 번 들어는 보겠다 라는 표정으로 성환을 비롯한 팀원들이 모두 커피 한 잔씩 손에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무료한 듯 노래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뒤 목을 다 풀었는지 리애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선곡은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MR 없는 생 라이브였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댄스음악을 발라드 분위기로 바꾸었지만, 원곡의 느낌은 그대로 살리면서 자기 색깔까지 덧붙였다.

역시 노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편곡까지 대박이었다.

몇 마디 부르지 않았는데 성환은 커피를 내려놓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모는 이미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 시작한 지 일 분도 안 돼서 오디션장이 아닌 콘서트장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평가를 위해서는 그 한 곡으로도 충분했지만,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노래가 계속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몇 곡의 노래를 마치고 "한 곡 더 할까요?" 라는 리애에게 모두 "네!!" 라고 외쳐댔다.

연달아 다섯 곡이나 부른 리애는 우리 반응이 궁금했는지 녹음실을 나왔다.

우리는 이미 모두 황홀함에 쓰러져 있었다.

이런 가수의 노래를 바로 눈앞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니.

이건 정말 축복 그 자체였다.

성환을 비롯한 팀원들 전부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 이전과 달라졌다.

의심이 믿음으로, 불신이 확신으로 바뀐 듯한 그런 표정.

나의 예감, 안목에 말없이 찬사를 보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전속계약을 체결하셨다고요?"

"네, 소속사에서 곧 데뷔시켜 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안 봐도 뻔한 그림이다. 그저 희망 고문을 당하는 중일 것이다.

데뷔 명목으로 이것저것 뜯어먹으려고만 하고 제대로 연습조차 시키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데뷔는 아마 계획조차 없을 것이다.

돈으로 빼 온다면 얼마가 필요할지 대강이라도 맞춰 볼 필요가 있었다.

"혹시 계약금으로 얼마를 받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계약금이요?"

"네, 얼마 받으셨어요?"

"받은 거 없는데요? 방송 출연시켜주겠다고 해서 전속비 지급한 건 있어요. 오천만 원이요."

"아니, 전속계약금을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전속비를 냈다고요?"

"네. 나중에 방송 출연료로 다 뽑을 수 있다고 하던데……."

몇 마디 나누면서 자기가 뭔가 크게 당한 걸 인지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를 가지고 아주 제대로 후려친 모양이다.

정말 듣던 대로 악질 양아치였다.

"계약서라도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계약서는 중요한 문서니깐 회사에서 갖고 있겠다고 해서 매니저가 가져갔어요."

"보기는 했고요?"

"제가 그런 거 잘 몰라서…….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계약사항이 있는지 한 번 펼쳐보지도 않고 사인했나 보다.

부모 입장에서는 딸이 그토록 원하는 데뷔가 우선이지 계약 내용은 뒷전이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본다고 한들 철저한 을의 입장이므로 불공정한 계약 조항을 수정하도록 요구할 수도 없었을 터.

여러 가지 더 물어봤으나 정말 가관이었다.

방송 출연 명목으로 전속비 뜯어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데뷔곡 작곡비라고 삼천만 원도 선급했다.

보컬학원 다녀야 한다고 해서 매달 이백만 원씩 학원비로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리애의 부모님은 딸의 앞날을 위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가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었다.

최근에는 프로필 사진 촬영비까지 요구하는 바람에 리애는 더이상 부모님께 부담 지우는 게 싫어서 알바도 뛰기 시작했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연예기획사 사기를 직접 처음으로 지켜보게 되니 당사자도 아닌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옆에 있던 팀원들도 마찬가지인 듯, 다들 잔뜩 흥분한 채 그저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차장님, 이 정도면 사기가 맞는 거죠?"

"그렇지. 신뢰 관계가 훼손되었다고 입증만 한다면 충분히 계약해지 사유가 될 수 있어."

리애는 우리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이제껏 자기가 얼마나 크게 당해 왔는지를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눈이 보이진 않았으나,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리애양! 이제부터는 저희와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존 소속사 문제는 저희가 찾아가서 해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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