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48화 (48/191)

48화 서막

아침에 기사가 뜨자마자 이상현에게 전화가 왔다.

역시 이 기사들은 조윤경 측에서 미리 손을 쓴 모양이었다.

"태평아. 기사 봤지?"

"그래. 지금 보고 있어. 아주 난리 났네."

"전무님이 뭐 필요한 거 없냐고 여쭤보시는데?"

내가 첫 번째 미션을 수행한 것에 대한 치하 뭐 그런 거라도 내리려는 것일까.

그런데 전달하는 이상현의 목소리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 즉 자기를 빼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 모양이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저 내 업무에 충실한 거뿐인데."

아무리 댓글을 보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눈이 가는 지 주구장창 노트북 화면만 노려보던 성환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날 째려봤다.

"아니, 뭐야 이게? 이건 아니지 않아요? 이렇게까지는 안 된다면서. 나 지금 아주 잘근잘근 씹히는 거 안 보이세요? 나만 아니라 유라도 지금 엄청 씹혀서 아주 미안해서 연락도 못 하겠어요."

"기다려 봐. 왜 그래, 성급하게. 골이 깊어야 산도 높은 거야. 김차장님 열심히 뛰어다니시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

기사가 난 이후로 하루종일 사이버 댓글 폭격에 만신창이가 되었는지 다음날 성환이 출근 시간이 지나도록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전 10시를 지나가자 드디어 인터넷 방송매체에서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엔터에서는 더 이상 신인 발굴로 인한 수익 창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몸집 불리기를 선택, 걸그룹 에이더, YST 등을 매니지먼트하는 연예기획사 키썸을 인수한다는 소식입니다.

천하제일엔터는 실력파 걸그룹 아티스트들을 보유한 키썸을 인수함으로써 별도 걸그룹 레이블을 운영하고……. 사업다각화를 통해 매니지먼트 사업뿐만 아니라 콘텐츠 제작 및 마케팅 사업을…….

역시 김철수 차장 작품이다.

결국 유라를 데려온 것은 맞긴 하나 단순히 유라 한 명만 빼 온 게 아니라 아예 소속사 전체를 인수한다는 것으로서 어제 뉴스를 단숨에 그저 허접한 찌라시로 만들어버렸다.

댓글 창은 찌라시를 퍼트린 기자들의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에이더의 팬들은 대기업의 케어를 받으며 큰물에서 놀 수 있게 되었다고 찬양 일색으로 댓글 창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 * *

어제 키섬 오대표 미팅.

"그럼 50억이면 되겠습니까?"

"장난하십니까? 제가 지금 돈 좀 챙겨 보겠다고 이러는 거 같습니까?"

"아니라면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렇다면 대표님 비전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No.1 엔터테인먼트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소속사와는 다른 개념인가요?"

"단순히 매니지먼트뿐만 아니라 음반 제작, 유통 판매, 공연, 출판 및 관련 상품 판매 등 아티스트와 음원을 활용하여 가치 창출하는 시장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험상궂은 첫인상과는 다르게 샤프함이 묻어나왔다.

시장환경과 앞으로의 산업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혹시 소속 연예인들 프로필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지 오대표는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사진첩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데뷔한 팀은 세 팀밖에 안 되고, 이건 연습생들까지 모두 포함한 프로필 사진입니다."

세 장, 네 장째를 넘기자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4인조 걸그룹으로 데뷔하여 음원 공개시마다 차트 줄 세우기를 하는 최강 걸그룹 멤버들 몇 명의 사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대박 사건! 여기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이 그룹은 조만간 데뷔하여 대한민국 걸그룹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10억 뷰를 넘을 메가 히트작을 발표할 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를 쓰더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한다.

"100억을 투자하겠습니다."

금액을 듣고 잠시 놀란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오대표는 냉정을 되찾고는 다시 정색했다.

"돈 받고 안 판다니깐!"

"회사를 넘기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희랑 손잡고 회사를 키우자는 말씀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저희가 100억을 투자하여 50대 50 지분구조로 함께하자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 키썸의 자산규모나 실적을 봤을 때 결코 적지 않은 규모일 겁니다."

"내가 지금 돈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100억을 대표님께 드린다는 게 아니라 회사자금으로 활용해서 그걸로 회사를 크게 키우자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자금력과 시장지배력, 그리고 대표님의 기획력을 시너지 삼아 아시아 넘버원 엔터테인먼트사를 함께 만들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오대표 한참을 심사숙고하는 것 같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악수를 청해왔다.

첫 번째 인수건이 성사된 것이다.

물론 내부 의사결정이나 재원 마련 등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오대표님 혹시 직원들 통해서 아는 기자분들한테 유라를 우리 쪽에서 빼간다고 살짝 흘릴 수 있을까요?"

* * *

김철수 차장과 마주앉아 커피 한 잔 홀짝이며 흐뭇하게 뉴스 반응을 넘겨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현이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인사말 같은 거 없이 바로 따지듯이 물어왔다.

"방금 뉴스 뭐야?"

"그 뉴스? 나도 방금 봤어. 극비로 추진하고 있었는데 새어 나갔나 보네."

"뭐라고? 어제 얘기랑 다르잖아."

말투가 사나운 게 살기까지 느껴졌다.

"어제 무슨 얘기?"

"유라 천하제일엔터로 빼 온다는 기사."

"그거 맞잖아. 우리가 키썸 인수하면 유라도 우리 소속이 되는 거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어제 기사는 분명 유라 혼자……."

"그 기사 우리 팀에서 흘린 거 아니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니깐 나서지 않은 거뿐이고. 어제 어떤 놈들이 흘린 건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X신 짓 한 거지."

이상현이 한 짓인 거 뻔히 다 아는 마당에 돌려 까기로 한 방 먹였다.

"전무님께도 네가 분명히……."

"전무님한테도 말했지, 유라 빼 오겠다고. 그래서 빼 오려고 지금 작업하는 중이잖아. 우리 음악사업부문에서 걸그룹 서브레이블도 갖출 겸."

"음……."

듣고 보니 내 말에 틀린 게 없으니 이상현이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화를 꾹꾹 누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수화기를 넘어서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설마 전무님이 가만히 계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선전포고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텐데 괜히 같은 편인 척, 수하로 들어간 척할 필요없다.

이상현이 한숨을 푹 쉬더니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태평아, 너 조전무님과 다른 배 탄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때도 얘기했지만 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거뿐이야. 배는 조전무가 다른 걸 탄 거지.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현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조용히 되뇌었다.

"알았어. 잘 전해드릴게. 고생해라."

"그래 너도."

뚜뚜뚜뚜.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더 이상 적이 아닌 척, 같은 편인 척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놓고 적이 되었다.

이제 정면승부만 남았다.

사실 살짝 겁나는 것도 있으나 그래도 나에겐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몇 년 후의 미래, 즉 다음에 어떤 패가 나올지를 알고 있으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진 않을 것이다.

승산은 나에게 있다.

* * *

점심시간이 끝나가자 성환이 헐레벌떡 사무실로 뛰어들어 왔다. 성환은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팀장님. 벌써 얘기 끝난 거예요?"

"얘기라니?"

"뉴스요. 우리 내부는커녕 아직 지주사랑 합의도 안 한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아직이지."

"아, 그럼 어떡해요."

"뭘 어떻게 해? 이제 네가 하면 되지."

"네? 이제요?"

"어제 뉴스는 우리나 키썸 측에서 공식 발표한 게 아니잖아. 양사 실무자간 협의 도중에 어디선가 새어 나와서 터진 것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듣고 보니 내 말이 맞는 거 같고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성환은 그저 얼버무렸다.

아직 경험이 없어서 정석대로만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환아. 만약 뉴스라도 안 터졌으면 이런 일을 제때 추진할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말씀이죠?"

"그룹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사항도 아니고 그저 중소기획사 하나 인수하는 건데 의사결정 단계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부서 저 부서 돌아다니면서 합의받아야 하고 또 중간에 이슈 제기하는 데가 얼마나 많을 텐데. 그거 다 방어해서 막는다고 해도 이미 시간 다 가버려. 대기업의 단점이 바로 이런 거야."

"그건 그렇지만 의사결정이 명확해야 책임 소재도 분명한 거 아닌가?"

역시 이놈한테는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성과를 명확히 해서 상벌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우리는 빨라야 해.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유행이나 변화 바람이 얼마나 빠른데. 거기 적응 못 하면 끝이야. 지금까지 천하제일엔터는 대기업계열이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이 컸어. 의사결정 구조가 매우 느리고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해서 새로운 도전을 안 했지."

"그래서 견고하게 유지할 순 있었잖아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 덕분에 노쇠한 이미지가 씌워져서 젊음, 청춘과는 거리를 두게 된 거고."

"언제 이 바닥까지 파악한 거예요?"

전입 이후 관련 업계에 대해 공부한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전에 지주사 재무팀장을 하면서 계열사 전체 사업에 관해 여기저기 주워들은 게 있었다.

뭐, 이 정도는 기본이다.

* * *

그날 오후.

갑자기 음악사업 부문장 최호태이사가 나와 성환을 자기 집무실로 불러내었다.

최이사는 생각보다 강골이었다.

인사하고 들어간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하더니 성환에게 상석을 양보하지 않고 자기가 앉아버렸다.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권위에 대해 인식시켜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직속상관인 자기를 패싱했다고 생각한 듯했다.

조성환이 있다고 해서 마냥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는 않을 분위기였다.

"글로벌사업팀은 보고절차는 싹 다 무시하고 일하는 건가?"

"아닙니다. 걸그룹 아티스트 보강은 그전에 보고드린 대로 우리 팀 첫 번째 미션이었고, 키썸을 통해 별도 레이블을 운영하여 브랜드화하고 키우는 걸 고려했을 뿐입니다."

"인수 건은 사전에 합의된 사항이 아니지 않나? 규정 무시하고 권한도 없이 팀 내에서 이래라저래라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인가?"

"아직 저희 팀 내부적으로도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흡수합병이 되었든 지분인수가 되었던 그건 인수구조에 관한 것뿐이고 여러 가지 협력방안에 대한 장단점 파악해서 막 보고하려던 참이었는데, 어디로 새 나갔는지 언론에서 먼저 터진 것뿐입니다."

왼손이 짠 걸 오른손이 터뜨린 거였다.

김철수 차장은 역시 능력자다.

어찌나 은폐 엄폐를 확실히 했는지 최호태이사는 인수 기사를 흘린 게 우리 작품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알았어. 이번 일은 그렇게 이해하도록 할게. 빠르게 몇 가지 방안을 짜서 가져 와. 대표님도 뉴스 보고 알았다고 매우 심기 불편하신 거 같으니깐."

윗사람 핑계 대면서 에둘러 한마디하고, 그러면서도 시킬 건 시킬 줄 아는 스타일이다.

앞으로의 일 년이 녹록지만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역시 나중에 대표이사까지 할 정도면 보통이 아닌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키썸의 인수 건에 대해서 역시나 지주사사업팀에서 태클을 걸어왔다.

이미 조윤경의 손아귀에 들어간 팀장의 입김 덕에 뒤가 든든한지 담당자가 어지간히 꼬장 부리는 게 아니었다.

"아니, 사업 타당성 분석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거 같고, 100억이 적정한지 검토한 것도 이게 답니까? 이걸로 결재 통과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까?"

"뭐가 더 필요하죠? 그럼 말씀을 해주시죠."

"아니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부족하다는 거죠."

"그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보고서 쓴 담당자랑 통화 한번 해보시죠. 제가 전화드리라고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그 담당자보고 똑바로 좀 쓰라고 전해주세요. 발로 쓴 것도 아니고 참 나."

"잠시만요. 옆에 담당자 있는데 바로 전해드릴게요. 조성환과장! 지주사 사업팀 권차장이 너보고 똑바로 하란다. 제대로 좀 하래. 보고서가 뭐 이따위냐고. 발로 썼냐는데?"

"저…… 잠시만요. 팀장님 잠시만요. 누구라고 하셨죠?"

"조성환 과장이요. 그 허섭스레기 같은 보고서 쓴 사람이요."

"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팀장 백 믿고 거들먹거렸다가 제대로 현타가 온 듯했다.

"바꿔드릴게요. 아니 지금은 안 되겠네요. 조과장이 지금 욕하고 있어서요. 흥분 좀 가라앉히면 권차장님께 즉각 전화드리라고 전해놓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 그런 줄이라뇨. 우리 담당자가 허접한 게 죄송한 일이죠."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팀장님이랑 지주사쪽 설득해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권차장 매우 당황한 듯 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웬만해선 치트키를 쓰지 않고 정석대로 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내가 봐도 크게 무리 없는 보고서를 가지고 되도 않는 시비를 거는 것까지 정석대로 뚫고 가기에는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게다가 천하제일엔터는 조성환 개인 지분이 30%나 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표결로 한다고 해도 질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니다.

설령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본다고 해도 가장 많이 피해 보는 사람 역시 조성환이었다.

이렇게 세게 밀고 나가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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