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47화 (47/191)

47화 역제안

어차피 그렇게 설득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 됐다.

아무 의심도 안 받고 마치 조윤경이 시켜서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됐다.

성환에게 엔터쪽을 받도록 하면 조윤경은 안도할 것이다.

하지만 엔터 쪽이 성장하면서 결국 실속은 성환이 챙길 것이다.

그렇지만 덥석 물지는 않고 우선 매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들어오기 전에 엄마한테 10분 뒤에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역시 딱 맞춰서 전화를 주었다.

"잠시만요. 여보세요 어, 엄마? 상현이랑 식사 중이야."

전화 받는 척하며 방을 나가 옆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별일 없지? 땡큐! 용돈 보내줄게."

전화를 끊고 온 신경을 옆방으로 기울이자 이상현과 조윤경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조용히 나누는 말이 들려왔다.

"천차장을 믿으십니까?"

역시 저놈은 혹시라도 내가 자기 자리를 차지할까 봐 질투하는 거다.

"내가 믿는 것처럼 보여?"

"그럼 아닌가요?"

"다행이네. 그렇게 보여서. 적은 가까이 두라는 말 몰라? 내가 신뢰하고 있다고 최대한 믿게 하는 게 나중에 도움이 될 거야."

"역시 전무님. 대단하시네요."

"테스트 몇 번 해보지 뭐. 통과하면 써먹으면 되고 아니면 버리면 그만이지."

이상현은 조윤경이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나?

아니면 알면서도 감수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테스트 통과해도 천차장이 전무님 편이 안 되면요?"

"물론 내 편이 되면 천하제일 차지하는 데 도움되겠지만, 설령 성환이 편에 선다고 하더라도 역으로 잘만 이용하면 분명히 쓸 데가 있을 거야."

역시 보통 교활한 게 아니다.

그랬으니 이전 생에서 내가 그렇게 처참하게 당했던 거다.

막 통화를 끊는 척하며 헛기침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걱정하셔서요. 상현아, 안부 전해 달라고 하신다."

"그래, 내가 조만간 어미니 꼭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 줘."

역겨운 자식의 입에서 엄마 얘기가 나오자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전무님 말씀은 제가 조성환님이 다른 계열사 지분 받도록 설득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네. 그 정도면 불필요하게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아도 되고 그룹의 안정을 위한 일도 되겠죠."

"회사는 물론 저한테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대가를 바란다는 내 말에 조윤경이 끄덕이는 게, 마치 '그러면 그렇지'라고 하는 듯했다.

"뭘 기대하든 그 이상이라고만 말씀드릴게요."

승낙의 의미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분도 그렇지만 조성환 님이 다른 기획사에 있는 여자친구를 빼 오거나 하면 더 낫지 않을까요? 기업승계보다는 개인사에 몰두하고 있다는 인식을 줄 수도 있고요."

제안을 수락함은 물론, 아예 한발 더 나아 갔다.

조윤경은 자기 입으로 차마 꺼내지 못했던 제안까지 알아서 해 주니 어지간히 좋았는지 아예 입이 귀에 걸린 듯했다.

반면 이상현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기 자리 차지하겠다고 덤벼드는지 알고 어지간히 똥줄 좀 탈 거다.

* * *

"안 된다니까요. 비서실과도 이미 얘기 끝냈어요."

천하제일엔터 지분을 받으라는 말에 성환이 펄쩍 뛰면서 온몸으로 거부했다.

"혹시 누나가 그렇게 얘기하라고 시켰나?"

이번에도 넘겨짚는 거 같긴 한데, 굳이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조전무가 그러라고 하긴 했지. 그치만 그게 너한테 나아."

"왜요?"

"식품, 화학, 건설 이런 계열사가 주력이긴 한데 이미 그쪽 산업은 성장이 멈췄어. 엔터 쪽이 비전이 좋다니깐! 그리고 이건 단순히 세금 아끼겠다고 미리미리 조금씩 증여하는 게 아냐. 회장님이 테스트하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지금 넘기는 지분은 회장님 전체 지분에서 5%도 채 안 돼. 이거 갖겠다 저거 갖겠다 해서 대세에 아무 지장 없다고. 지금 사업군 중에 주식 가치가 가장 낮은 사업군이 어디지?"

"당연히 엔터테인먼트 쪽이죠."

"600억이면 몇 %인지 알아? 자그마치 30%야. 건설이나 화학 쪽은 받아봐야 3%도 안 돼."

"그만큼 이익도 안 나고 관심 밖이니깐 주가가 낮은 거겠죠."

"지금은 네 말이 맞는 거 같겠지만 시대는 곧 바뀐다고. 엔터 업계가 한참 끓어오르다 이제 곧 끝물일 거 같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다른 엔터사들이 왜 맨땅에 죽어라 헤딩하면서 해외에 들이대겠어? 갈 만하니까 가는 거야. 한국 시장만 말고 글로벌 시장을 봐야 한다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지금 주가가 낮은 엔터사 지분을 받아서 크게 키워 보라고! 그럼 경영 능력도 인정받을 수 있고 올라간 주식 가치로 다른 계열사 지분 인수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어느 정도 설득이 먹혀든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마지 못 해 하겠다는 듯 대답했다.

"팀장님, 이번 한 번만 믿어볼게요. 대신 한발 내디뎌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계열사 지분 증여 이후에 관련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미리 손을 쓴 듯, 마치 조윤경이 주력 계열사의 후계 자리를 받는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 김칫국이나 실컷 마셔라.

조만간 체해서 모두 다 토해낼 것이다.

* * *

엔터사로 전입한 지 한 달.

팀원이 한 명 늘었다.

조회장이 기자회견 한 대로 조성환이 100% 소유한 회사가 청산되면서 꽂아줬던 김철수부장이 갈 곳을 잃게 되자 우리 팀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김차장이 조인하면서 팀 조직이 어느 정도는 갖춰진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입사하게 된 김철수차장입니다."

출근 첫날 김부장 아니 김차장이 팀원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원모 표정이 오묘했다.

이전에 같이 근무한 경험도 있어서 반가워하면서도 자기 윗사람으로 온 것에 대한 반감도 분명 있어 보였다.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김부장은 부장으로 퇴직했는데 수년이 지나고 계열사에 차장으로 재입사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다행히 직급이나 직책에 미련없이 할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한 듯 보였다.

더구나 성환을 가까이에서 직접 모실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 팀의 첫 번째 미션은 걸그룹 계열 아티스트 보강이었다.

천하제일엔터는 산하에 최강 힙합 레이블을 두고 있었고, 전통적으로 발라드 가수를 많이 양성해 왔었으나 걸그룹 쪽은 경쟁사에 비해 상당해 약한 편이었다.

대중적인 영향력도 그렇고 관련 MD상품 판매는 걸그룹 쪽이 훨씬 유리하므로, 그 쪽으로의 라인업 보강이 절실했다.

주간업무회의 시간이 되었다.

팀원일 때는 몸서리치도록 싫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팀장이 되니 이 회의가 꼭 필요하다고까지 느껴졌다.

팀원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도 있을뿐더러 일이 지연되지 않도록 팀원들을 매주 재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걸그룹 에이더 영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조과장 혹시 여자친구랑 얘기해 봤나?"

"유라한테 얘기는 해 봤는데요. 계약기간 7년인데, 연습생 2년에 데뷔한 지 2년밖에 안 돼서 아직 만료되려면 3년도 더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료까지 그냥 냅 두자는 거야?"

"아니요. 유라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행사만 엄청 뛰고 있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소속사가 엄청 굴리는 거 같은데. 살인적인 스케줄에 다른 멤버들 건강도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안쓰러워서 옆에서 더 못 지켜볼 정돈데 꼭 데려와야죠."

"계약기간이 남았다며? 방법 없을까요? 김차장님?"

김철수부장, 아니 차장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음. 글쎄 두 가지가 있겠지. 우선 돈으로 미는 거야."

"돈이요?"

"돈이면 다 되지 않나? 까짓거 계약해지에 따른 위약금 명목으로 몇 년간 예상 매출액 정도 보상해 주고 데려오는 거지."

걸그룹 덕후인 원모가 한마디 덧붙였다.

"맞아요. 업계 소문으로는 그 소속사 무리하게 연습생들 키우면서 비용만 무지하게 써 가지고 그거 메꾸려고 이미 데뷔한 그룹 엄청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기획사나 제작사들한테 돈 꾸러 다닌다는 소문도 있고요. 돈으로 제안해 봐도 될 거 같은데요?"

상대방이 절박한 상황이면 가능할 법한 얘기였다.

하지만 언론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성환이와 엮여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뭐죠?"

"노예계약으로 걸어서 계약 해지하는 거지."

"노예계약이요?"

"어. 계약서는 보긴 해야겠지만 표준계약서가 아니고 아티스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되어 있으면 계약 부존재사유가 될 수 있어."

"표준계약서에 따라 계약한 거면요?"

"그럼 아티스트와 기획사 간에 신뢰 관계가 깨진 경우에만 해지할 수 있지."

"신뢰 관계가 깨진 게 어떤 거죠?"

"정산 내역을 아티스트한테 제대로 공개해주지 않거나 정해진 비율대로 정산하지 않거나 뭐 그런 거. 사실 다 돈 문제야."

"그러면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여자친구 데려오려고 소송이라도 해서 진흙탕 싸움에 말려든다면 언론에 씹히기 딱 좋다.

"그럼 우선 그쪽 기획사 대표 먼저 만나서 얘기라도 들어봐야겠습니다. 소문대로 정말 돈이 급하다면 오히려 순순히 넘겨줄 수도 있겠네요. 물론 언론발표나 이런 거 없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 * *

며칠 뒤.

약속장소에 나타난 소속사 키썸의 오대표.

그는 다부진 체격에 위압적인 인상을 가진 전형적인 깡패 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악수를 건네는 손바닥은 수분기 하나 없이 짝짝 갈라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촉감만으로도 충분히 위압감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측에서는 나와 성환, 김철수차장이 참석했다.

상대측에서는 오대표와 함께 보디가드인지 용역 깡패인지 오대표보다 훨씬 더 험상궂은 인상의 두 명이 함께 자리했다.

"지난번 스캔들 때는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결국 좋은 기사들로 마무리되면서 오히려 저희 소속사 이미지에도 도움 많이 됐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네요."

훈훈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천하제일 측에서 갑자기 무슨 일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건지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라씨를 넘겨주시죠."

어이가 없었는지 오대표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옆자리 어깨 두 명까지 혀를 차며 눈을 부라리자 바로 공포 분위기로 바뀌었다.

"유라는 에이더 센텁니다. 그룹 센터를 어떻게 뺍니까?"

"그럼 그룹 전체를 넘기시죠."

"아니 이것들이 장난하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나?"

갑작스러운 욕설 같은 반말에 오금까지 저려 왔다.

그러나 앞에서 욕하는 건 사실 무서운 게 아니다.

앞에서 욕하는 건 그냥 겁만 주는 거지 진짜 무서운 건 웃으면서 뒤통수를 치는 거다.

"30억이면 되겠습니까?"

대답이 바로 안 나왔다.

살짝 고민 좀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대답했다.

"장난합니까? 데뷔전까지 투자한 게 얼만데. 게다가 이제 막 겨우 수익 나고 있는데 댁들 같으면 넘길 거 같습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생각할 틈을 주어선 안 된다.

"그럼 50억이면 되겠습니까?"

* * *

미팅이 끝나고 우리 쪽이 먼저 일어났다.

문을 나서면서 성환이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아니 팀장님 괜찮으시겠어요? 전결규정 같은 거 생각 안 해요?"

"도장 찍은 건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절차 같은 거 싹 다 무시하고 돈 쓰겠다는 게 말이 되냐고."

"야. 언제부터 네가 전결규정 같은 거 따지고 그랬냐? 일단 지르고 보는 거야. 선조치 후보고 몰라? 언제 일일이 보고서 써가면서 의사 결정받고 움직이나? 그새 버스 다 지나갈 텐데."

"그건 그렇지만……."

"일단 지켜봐 봐. 그리고 차장님. 차장님께선 언론사 아는 분들한테 미리 연락 한 번씩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후배들한테 전화 싹 돌려놓을게."

* * *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이 지나 신문 연예면이 들썩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터졌다.

천하제일엔터 에이더 유라 영입/그룹 해체위기

제목은 간단하지만, 내용은 단순히 연예인 한 명이 소속사를 옮긴다는 뉴스가 아니었다.

천하제일의 후계자인 조성환에 엔터테인먼트계열사로 옮겨서 한 첫 번째 일이 여자친구를 기존 소속사에서 빼 와서 자기 회사로 데려왔다는 내용이 주였다.

그룹을 지지하던 팬들은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조성환 때문에 그룹이 깨졌다며 댓글 창이 난리가 났다.

[돈이면 다 되냐?]

[재벌 2세가 자기 욕심 채운다고 연예계 바닥의 물을 흐린다.]

이 정도 댓글은 양반이었다.

이런 악플 말고도 대부분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로 댓글 창이 도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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