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제안
첫 출근 날.
부문장과의 인사를 마친 후 대표이사는 물론이고 사업부 내 다른 팀장들과도 모두 인사를 나누었다.
악수를 건네며 웃고는 있었으나, 대부분은 경계심을 잔뜩 품은 속내까진 숨길 수 없었다.
'이런 어린놈의 짜식이 같은 팀장이라고 맞먹으려고 하네?'
같이 대놓고 무시하는 표정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사이좋을 필요까진 없지만, 일일이 맞서면서 굴복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다.
어차피 곧 노는 물도 달라질 터 이곳에서 자기들끼리 아등바등하든 말든 상관 말자.
난 일 년이면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조윤경을 피한다고 계열사로 왔다.
그것도 다른 눈치 안 보게 아예 없던 팀까지 신설하면서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곤 했지만, 나와 성환 그리고 원모가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팀장인 난 그저 일 년 정도만 적당히 시간을 때우면서 종잣돈이나 모아 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성환은 물론 원모까지 새롭게 출발한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꿈을 접고 근무기간을 연장할 수는 없는 법.
결국 방법은 하나다.
비단 일 년뿐이지만 마치 내 사업인 양 온 힘을 다해서 팀 실적도 키우고 이 친구들을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내 사업을 키워가는 데 도움도 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될 것이다.
성환이 그룹을 승계받아서 당장 조윤경을 밀어버리면야 좋겠지만, 혹시 밀리더라도 최소한 엔터 계열만큼은 승계받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대항마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 팀은 조직 내에서 크게 성장시켜서 원모에게 넘기고 성환이를 서포트할 수 있게 하면 된다.
마음을 고쳐잡으니 한결 편해졌다.
팀장이 되고 첫 회의를 주재했다.
팀원이라고 해봐야 아직까지는 성환이와 원모 그리고 다른 팀에서 차출된 건환이란 놈이 전부였다.
성환이가 특별히 똘똘한 놈으로 하나 보내달라고 요청까지 했지만, 역시 이 안에 아직 우리 편은 없었다.
인력을 요청하니 주긴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각 팀 붙박이 에이스를 보낼 수는 없었을 테고 개중에 가장 떨어지는 놈을 보내준 게 틀림없었다.
도무지 의욕 하나 없어 보이는 흐리멍덩한 눈깔. 그 눈깔마저 초점 없이 딴 데를 보는 것만 같았다.
꿈쩍도 안 하는 게, 설마 자고 있나 싶어 눈앞에 손을 뻗어 흔들어도 보았다.
미동 하나 없는 게 고개는 내 쪽을 향했지만, 눈은 분명 딴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건환님!"
"네!"
"어디 보고 있는 거지?"
"팀장님요."
다시 눈앞에 손을 뻗어서 흔들어보았는데, 역시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보입니다."
그랬다.
이놈은 그저 둔한 놈이었다.
웬만한 걸로는 전혀 놀라지도 않는 스타일인가 보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
팀장마다 팀 내에 하나씩 구비하고 있다는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으로 삼기에 딱이었다.
"알았다. 그냥 회의 시작하자."
"넵."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우리 팀은 업무가 있어서 만들어진 팀이 아니라 팀 자체가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업무를 해야 할지 그리고 KPI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의견 있으시면 어떠한 거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세요."
원모가 조용히 손을 들고 물었다.
"팀명은 왜 글로벌사업팀입니까?"
웬일로 원모가 질문 같은 질문을 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난관이었다.
외국물 좀 마신 티가 나는 데다 팀명에 사업이라고 떡하니 박혀 있어서 그저 있어 보였을 뿐 사실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음……. 글로벌이면 전 지구를 뜻하고 사업은 말 그대로 사업이지. 그러니깐 국내, 국외 할 거 없이 전 세계 어디에서 어떠한 사업이라도 다 한다는 의미에서 지었어."
역시 난 임기응변에 강하다.
회귀 전에 괜히 승승장구한 게 아니다.
"그러면 다른 팀 영역과 겹치면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무슨 일이든 기획하고 키워도 돼. 물론 다른 팀 영역이고 그 팀에서 우리보다 더 잘 운영할 수 있다면 거기다 주면 그만이야. 내 거 남의 거 구분 없어. 그냥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뭐든 다 가능해. 알아들어?"
조용히 끄덕이기만 하던 성환이 손을 들었다.
"팀장님. 음악 사업이면 어떤 거든 상관없다는 말씀인가요?"
"우리가 음악 사업 부문 소속이긴 하지만 꼭 음악 아니어도 상관없어. 필요하면 우리가 소속을 바꿀 수도 있어. 대표이사 직속으로도 바꿀 수 있으니깐 그런 건 고민하지 마."
계속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던 건환이가 정말 듣고 있기나 한 건지 궁금해졌다.
손을 뻗어 다시 건환이 눈앞에서 흔들어보았다.
"보인다니깐요."
그 정도로 정색할 것까지야.
"알았다. 그런데 넌 의견 없나?"
"팀장님. 꼭 음악 관련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신 겁니까?"
"그래. 말해봐."
"방송 제작 이런 것도 되나요?"
"물론 상관없지. 그렇지만 방송은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팀이 따로 있잖아. 거기보다 잘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TV 같은 기존 매체 말고요. 인터넷 방송이면요?"
"인터넷 방송?"
"네, 요즘 인터넷 개인 방송하는 플랫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당연히 괜찮지. 다른 팀과 겹치지도 않고. 관심 있는 컨텐츠라도 있어?"
"네, 요즘 재미있게 보는 건 있습니다."
"뭔데?"
"말씀드리기가 좀 그런데……."
차마 부끄러워 말 못 하는 거 같은지 성환과 원모가 옆에서 계속 말하라고 부추겼다.
할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 없게 대답했다.
"먹는 겁니다."
성환이 이해가 안 가는지 물었다.
"먹는 거? 요리 방송 말하는 거야?"
"아뇨. 먹는 거요."
"그러니까 먹는 걸로 뭐하냐고."
"그냥 먹는 거예요."
"헐, 뭐래."
놀란 건지 비웃은 건지 모르게 성환이 한마디 하자 건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팀장인 내가 달래야 했다.
"건환아, 괜찮으니까 자세히 말해봐. 그냥 먹는 거라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방송 켜놓고 먹는 거예요. 그냥 일 인 방송인데 얘기하면서 먹어요."
"푸하하!"
성환이 웃음을 못 참고 자지러지듯 하자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건환이가 제대로 봤다.
지금은 초창기이긴 하지만 머지않아 일 인 방송 그중에서도 먹방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건환아, 넌 그게 재미있냐?"
"네, 재미있습니다."
"남이 먹는 게 재미있어?"
"네, 대리만족이랄까? 아무튼 그냥 보게 돼요."
"그럼 네가 그거 기획해 봐. 제작을 하든 출연자 매니지먼트가 되었든 어떤 형태든 간에."
건환은 생각지 못한 격려에 풀린 듯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며칠간의 논의 끝에 글로벌사업팀의 업무기술서와 성과지표까지 모두 설정하였다.
이것저것 많이 기술하긴 했지만 결론은 단순했다.
뭐든지 유망한 걸 발굴하겠으며, 단기간의 성과에는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발전 방향에만 몰두하겠다는 게 요지였다.
성환이 덕분인지 부문장은 별다른 이슈를 제기하지 않았고, 원안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매일 정해진 일만 하던 재무팀과는 팀원들의 태도에서부터 확연히 달랐다.
뭐든 시도할 수 있으며 단기간에 성공 여부를 따지지 않겠다는 말에 여러 아이디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실 대부분은 쓰레기 같았지만, 단 하나만 터지기만 해도 되니 아무 상관 없었다.
오히려 시도조차 안 하면 한 개도 터질 수 없으니 차라리 이게 더 낫다.
* * *
11시 30분
점심시간이 된 듯하여 고개를 들었는데, 웬일로 원모랑 건환이는 안 보이고 성환이만이 남아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있었다.
"넌 약속도 없냐? 아님 점심값이 아까운 건가?"
"그게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럼 점심 네가 사라."
"점심값은 팀장님이 아끼나 보네. 툭하면 밥 사래. 팀원한테."
"원래 돈 많은 놈이 내는 거야."
오늘도 한 끼 굳었다.
성환은 조용히 얘기할 거라도 있는지 룸으로 된 중식당으로 안내했다.
"회장님께서 개인적으로 갖고 계신 계열사 지분을 조금 증여해주신다고 해서요."
"잘됐네. 받으면 되지 왜 고민이야?"
"누나랑 똑같이 받으라고 해서요."
자기가 표면적인 후계자이니 당연히 자기가 물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아무리 조금이지만, 어떻게 누나랑 같은 금액을 받을 수 있냐고 하소연한 것이었다.
"금액으로는 얼마나 되지?"
"각자 600억 정도요. 회장님 전체 지분에서는 얼마 안 되지만요."
이건 테스트다.
본격적인 지분승계 작업 들어가기 전에 누가 더 나은지 보겠다는 것이다.
굳건한 가부장 혈통주의를 지키고 있는 천하제일 가풍상 마음 같아서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겠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크게 일궈놓은 천하제일이 더 중요했을 거다.
조회장은 성환이 영 시원치 않으면 일생을 바친 천하제일을 망가뜨리느니 차라리 능력 있는 윤경에게 넘길 수 있다고 경고도 할 겸 테스트 해보려는 것이다.
천하제일 그룹은 냉동 및 육가공 식품을 제조 및 판매하는 식품 사업, 합성수지 및 첨단소재의 화학 사업, 도급순위 Top 5 건설사업과 증권업 및 엔터테인먼트 사업 등 총 5개의 사업군, 50여 개의 계열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매출 비중으로 볼 때 식품, 화학 및 건설사업이 주력 사업군에 해당하고 엔터사업은 국내 Top3 안에 들긴 하지만 주력사업군에는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어느 계열사 지분을 넘기신다는데?"
"그걸 저희보고 결정하래요."
"조윤경 전무는 어디 받는데?"
"누나는 식품, 화학, 건설에 각각 200억씩 생각하는 거 같아요."
"넌?"
"저도 그렇게 해야죠. 아무래도 거기가 주력이니까."
"아니야. 넌 엔터로 받아."
"네? 여긴 그냥 잠깐 매형 피해서 온 거고 지분은 그쪽으로 가져가야죠."
"어차피 주력이든 말든 계열사 지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주사 지분이지. 지주사를 지배해야 그룹을 지배하는 거 몰라?"
"그러니까 더더욱 제가 주력 계열사를 가져야죠. 누나가 비주력 계열사 주식을 갖고 있어야 나중에 계열 분리하면서 떼 주기 편하죠."
계열분리고 어쩌고 절대 이놈 입에서 나올 수준의 말이 아니다.
이미 비서실과 논의를 마쳤고 나한테는 그저 잘한 선택인지 확인받고 싶은 거다.
조윤경은 남편을 임원으로 앉혀놓고 주요 포지션 임원들도 이미 많이 포섭해 놓고 있어서 조회장을 구워삶기에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잘못하다간 지가 쪽박 찰 수도 있는데 도무지 새겨들을 생각을 안 한다.
* * *
점심시간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휴대폰이 울렸다.
이상현이었다.
"태평아. 점심 먹었어?"
"어, 방금.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겸사겸사. 안부도 물을 겸. 이제 같은 건물도 아니고 얼굴 보기 힘들잖아."
"그래. 조만간 저녁이나 한번 먹자."
"그럴까? 그럼 오늘은 어때? 마침 같이 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한데."
의례상 남긴 말이었는데 갑자기 훅 들어왔다.
* * *
약속장소에 도착해 안내받은 방문을 열자 이상현이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역시 테이블 상석에는 조윤경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자기는 조윤경 사람이라고 대놓고 커밍아웃한 거다.
"오랜만이에요. 천차장. 아니 이제 천팀장인가?"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오랜만에 친구분들 회포 푸는 자리에 불쑥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별말씀을요. 특별히 하실 말씀이라도……?"
본론만 말하라는 의도를 간파한 듯 조윤경은 자기 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지난번 우리 남편이 입사할 때 기사가 좀 많이 났잖아요. 그것도 회장님이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데 승계 구도에 변화가 어쩌고 말도 안 되는 걸로 말이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홍보실에서 잘 마무리 한 거 같은데요."
"그런데 이번에 마침 회장님께서 계열사 개인 지분을 각자 조금씩 넘겨주신다고 해서요.
제가 식품, 화학 쪽으로 받을 생각인데, 성환이도 같은 계열사 지분을 원하는 거 같아서요."
"그게 문제라도 되는지요?"
"문제는 아니죠. 그런데 계열사 지분을 똑같이 받으면 언론에 괜히 경쟁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으니까 성환이가 다른 계열사 지분 받도록 설득 한 번 부탁드려도 될지요?"
역시 교활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같은 금액이라고 해도 자기가 주력 계열사 지분을 갖고 성환이 비주력 계열사 지분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럼 언론에서 회장이 자기를 후계자로 점찍은 걸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