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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45화 (45/191)

45화 이동

안가의 경치는 오히려 해 질 녘이 압권이었다.

뉘엿뉘엿 산마루를 넘는 빨간 해를 보고 있으니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했다.

퇴근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회사로 돌아오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어느덧 7시가 넘었고 성환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고스톱도 안 켜 놓은 게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차장님, 오래 걸리셨네요."

"얘기가 좀 길어져서."

"누구랑요?"

이 자식 흰자를 까놓고 묻는 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감춰 봐야 소용없을 듯.

"조윤경 전무."

성환은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다고 약간 안도하는 듯 흰자를 반쯤은 집어넣었다.

"얘기하지 말랬는데 어떻게 알았지?"

"거기 내 집인 거 몰라요? 아무리 누나가 섭외 끝냈다고 해도 눈 하나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워낙 들락날락 손님도 많을 텐데 나인지 어떻게 알았지?"

"남자 손님 왔다길래 그냥 한번 찔러본 건데 차장님이 답한 건데요. 하여간 이 사람 포커페이스가 안 돼. 그러니까 고스톱만 말고 포커도 가끔 치라니깐."

이 자식이 인상 쓰고 있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순순히 말했던 거다.

이생에 와서도 머슴의 버릇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뭐라고 하던가요. 누나가?"

"이미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대답은 뭐라고 하셨는데요?"

"뭘 뭐라고 해 Yes라고 했지."

성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실망,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럼 지금 뭘 해야 하죠?"

"우선 천하제일엔터로 발령 내달라고 해."

"네? 나보고 지금 구석탱이에서 찌그러져 있으라고요?"

"그럼 안치홍상무 밑에 있을 거야? 같이 있으면 시시콜콜 사소한 거까지 감시당하고 매번 이래라저래라하기만 할 텐데?"

"에이, 그래도 나보고 지금 연예인 매니저나 하라는 겁니까? 증권사 같은 데면 몰라도. 그냥 임전무 가는데 같이 가면 되겠구만."

성환은 현재 엔터사의 그룹 내 위상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증권사에서 수천억 정도 당겨서 세계 곳곳 돌아다니며 회사 인수하고 오피스빌딩에 투자하는 게 폼이 나지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영 자기 스타일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몇 년 뒤엔 천하제일엔터 주식이 그룹 내 시가총액 2위로 올라간다고 천기누설할 수도 없고.

설득할 만한 명분이 떠오르질 않았다.

"지난번 호텔 식당 앞에서 못 봤어? 다들 제조나 건설, 증권사 임원이었는데. 벌써 조전무랑 한배 탔을 텐데 거기로 들어가겠다고?"

"아무리 그래도……."

"보는 눈 없는 데로 멀리 가 있어. 그곳 지분 받아서 그걸 크게 키우라고. 혹시 알아? 그게 총알이 돼서 다른 계열사까지 차지할 수 있을지."

성환이 최소한 엔터 쪽만 차지해도 조윤경을 어느 정도는 견제할 수 있을 거다.

내 말이 그럴듯한데도 탐탁지 않은 마음은 가시지 않은 듯했다.

"더 없습니까?"

"뭐가?"

"부족해요. 설득할만한 좀 더 센 거 없어요? 거기 갈 수밖에 없는 이유 같은 거."

"양복 안 입어도 돼."

"전 원래 안 입는데요."

실패다.

"사무실에만 있지 않아도 돼. 계속 나가 있어도 될걸?"

이건 조금은 괜찮은 것 같으나 성공까진 아닌 듯했다.

"좀 더요."

"미친놈!"

"농담 아닙니다."

"네가 여자친구 천하제일엔터로 영입할 수 있잖아. 사내에서 연애할 수 있다고."

성환은 별다른 대답 없이 조용히 짐을 쌌다.

"내일 가는 거죠?"

"미친놈, 발령이 나야지. 내일 아침에 비서실에 통보해놔."

"차장님은요?"

"나도 김병국 부장 밀어내고 그 자리 차지할 생각은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뭐 땜에 거기로 가고 싶으신데요?"

"물이 좋아."

1년 정도 있을 거 이왕이면 꽃밭이 낫다.

조성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결근 삼 일만에 김부장이 사무실로 출근했다.

면도도 한 번 안 했는지 어느새 수염은 더부룩해지고 한층 더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경리부장 자리로 따로 발령이 난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 그렇다고 김부장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진 않았다.

김부장은 팀원으로 내려가고 부서장 보직을 놓게 되었다.

내가 거절하는 바람에 새로 부임할 안치홍 상무가 자기 사람을 심어놓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3미터도 안 되는 거리지만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부서장 자리에서 쫓겨나 좁디좁은 파티션, 그것도 맨 끝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원모가 짐을 옮겨주겠다고 하는데도 끝내 거절했다.

"내가 할게, 괜찮아."

그러면서도 스스로 굴욕적이었는지 웃는 얼굴인데도 전혀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임전무는 다음 주에 여의도로 옮기기로 되어있어서 오늘이 지주사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마지막 날이니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거 같아서 김부장이 출근한 거였다.

조용히 차 한잔하자는 임전무의 말에 김부장이 고개 숙인 채 집무실로 따라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문이 닫히자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병국아.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일단 그저 기다린다고 생각하고 참고 있어. 내가 자리 잡고 기회되면 부를 테니까."

"말씀은 감사합니다. 전무님. 그런데 오늘 이거 드리려고 왔습니다."

분위기로 봐서는 김부장이 사직서를 건넨 듯했다.

"아니 왜. 좀 더 생각해보지 않고 성급하게.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텐데."

"어려울 거란 거 아시잖아요."

김부장은 이미 포기한 듯했다.

다른 부서, 가장 말단 부서라고 해도 부서장으로 보직 변경된 것도 아니고, 같은 부서 내 부서장에서 팀원으로 강등 발령이 난 거면 나가라는 뜻이다.

김부장은 회사 생활하면서 너무나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임전무가 그저 힘내라는 차원에서 예의상 한 말이란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제 자리는 태평이가 오는 거겠죠?"

역시 내가 자기 자리를 꿰찰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아니. 싫다고 했다던데?"

"네? 왜요?"

"몰라 소문이 그래. 다음 주에 천하제일엔터로 발령 날 거야. 조성환님하고."

"아니 왜요?"

저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변방으로 간다는 사실이.

임전무 방을 나온 김부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고갯짓으로 회의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얘기 들었어. 난 네가 내 자리로 올 줄 알았는데……."

어쩐지 그래서인지 아침에 인사를 건네도 좋게 받아 주지 않았었나 보다.

"그래서 사표 내신 거예요? 내 밑에서는 일 못 하겠다고?"

뜨끔했는지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뻔하죠. 봉투 들고 임전무방 들어가는데. 설마 그게 돈 봉투였겠어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아니 근데 넌 왜? 이 자리가 안 좋냐 너한텐?"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걸 내가 거부하니 자존감에 상처라도 입은 모양이었다.

"아니요. 그저 너무 오래 있어서 재무팀 떠나려고요."

"여기서 승부를 보는 게 낫지 않아? 승승장구 할 일만 남았는데."

"부장님에게 회사는 어떤 의미입니까?"

생뚱맞은 표정을 보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나 보다.

"글쎄 뭐랄까, 잘 모르겠어. 내 젊음이랄까? 분명 입사했을 때는 스물일곱이었는데.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대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회사생활이?"

"글쎄……. 근데 가치 있는 것만 필요한가 인생에? 그저 쭉 앞만 보고 사는 거지. 남들도 다 그런데."

"마음을 고쳐 드세요. 그럼 이제부터. 회사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요."

"그럼 뭔데 넌 회사가?"

"밥벌이 도구죠."

"뭐라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다녀야 하는 그 정도? 뭐 달리 있겠습니까?"

김부장은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인생이 부정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도저히 인정을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겨우 밥벌이를 가지고 뭔가 숭고의 영역에 올려놓고 우러르면서 찬양하는 그런 건 기득권들이 심어놓은 환상이에요. 밥벌이로 생각하지 말고 뭔가 자아 실현하는 도구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라. 그저 작은 월급에 만족하고 열심히 구르면서 자기들 돈 많이 벌어주라고 하는 거라고요."

자기의 처지를 생각했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인상 쓰던 표정이 사뭇 누그러졌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자존심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밥벌이는 해야 하니깐 사표 내지 말고 다니세요."

"나보고 얘들 눈치나 보면서 여기 끝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아무 일도 안 하면서?"

"가족들 생각도 하셔야죠. 한직으로 발령 내달라고 하세요. 부담 없고 얼마나 좋아요."

"몇 년 전에 경영관리팀 송부장 밀려나면서 총무팀 간 거 몰라? 차량 배차하고 잡일하면서도 묵묵히 참고 일하다가 결국 일 년 만에 쫒겨 났잖아. 어차피 연명해 봐야 일이 년이야."

"답답하네요. 그 일이 년으로 준비하면 되잖아요. 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돈 벌면서 준비할 시간도 버는 건데 그보다 나은 게 어딨다고."

김부장이 한참을 말없이 쳐다만 보다가 조용히 사직서를 가방에 넣었다.

* * *

"음악사업부문이요."

"네? 경영지원본부가 아니고요?"

어디를 가고 싶은지 질문에 대한 내 답변에 인사팀장이 흠칫 놀란 모양이었다.

줄곧 재무팀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경영지원본부 내 재무팀 아니면 기껏해 봐야 전략기획팀이나 사업관리팀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듯했다.

내 입에서 생뚱맞게 음악사업부문이 나와서 당황한 것이었다.

옆에 조성환을 힐끔 보며 눈치를 보는 게, 합의된 거냐고 묻는 듯했다.

성환은 대답 없이 조용히 고개 한번 끄덕일 뿐이었다.

"당연히 지원본부로 생각했었는데 그쪽 T.O나 이런 것들도 참고해야 해서요. 그쪽 인사팀장과 통화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인사팀장은 회의실을 나가더니 조용한 곳으로 옮겨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전무님. 인사팀장입니다. 조성환님께서 음악사업부문을 얘기했습니다."

역시나 전화한 곳은 천하제일엔터 쪽이 아닌 조윤경 전무였다.

몇 번의 대화를 나누더니 통화를 끊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네, 마침 음악사업부문에 자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어떤 부서 쪽을 원하시는지요?"

성환이 나서서 대답했다.

"글로벌사업팀이요."

한참을 조직도를 살펴보던 인사팀장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조성환님 죄송하지만 그런 팀은 없습니다. 조직도 살펴보시고 알려 주심이……."

성환이 짜증 나는 듯 대답했다.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네?"

"못 만드시냐고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 말씀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조직도 업데이트해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지주사 인사팀장 아무리 좋은 보직에 조윤경 전무라는 든든한 동아줄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막상 회장 아들이 세게 나오니 쫄리긴 했나 보다.

언제든지 손바닥 뒤집듯 뒤집힐 수 있는 게 사내 권력이고 든든한 줄인 줄 알았던 줄이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음을 숱하게 많이 경험해 봤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이어리에 성환의 말을 받아 적었다.

"글로벌사업팀 팀장은 천태평 차장, 팀원은 저와 김원모 과장 그리고 사원급으로 엔터사에서 제일 뛰어난 인재 한 명 배치 부탁드립니다."

재무팀에서 한 명 더 차출하겠다는 말에 반발이 심할지 알았으나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원모가 그 정도로 뛰어나진 않을뿐더러 아무래도 새로 부임할 안치홍 상무 입장에서는 기존에 있던 사람들보다는 자기 사람을 채울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 * *

월요일 아침 7시도 안 되어서 눈이 저절로 떠졌다.

북경 주재원 파견을 제외하고는 첫 번째 이동이었다.

부서 이동도 아닌 계열사 전출로서 앞으로 일 년 안에 그만두긴 할 테지만 그래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할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어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물론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더 크긴 했다.

7호선을 이용한 청담동 첫 출근은 지난주 출근과는 많이 달랐다.

좀비 떼를 헤치며 4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던 것과는 밀집도나 승객 구성 등등에서 천양지차였다.

왜 그렇게 강남강남 하는지 알겠다.

객차 내의 대부분은 비교적 잘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타고 있었다.

인사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사무실은 제법 쾌적해 보였다.

급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조성환이 온다는 소식에 자리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였다.

전망도 좋고 파티션도 깔끔한데다 사무용품도 잘 구비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음악사업부문장 최호태 이사입니다."

직속상관과의 첫 대면이었다.

차마 자기 방으로 부를 수는 없었는지 출근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자리로 와서 성환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능력도 있을뿐더러 운까지 좋아 엔터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향후 대표이사까지 오르게 될 인물이다.

성환과의 인사를 끝내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위아래로 한 번 훑더니 노려보며 악수를 건넸다.

"자네가 천태평팀장인가? 난 부문장 최호태라고 하네. 자네 팀명이 뭐라고 했지? 내가 정한 게 아니라 금세 또 까먹었네."

기선제압이었다.

비록 팀명이나 팀원은 자기가 정하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자기 부문 소속으로서 자기가 직속상관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다.

"네 글로벌사업팀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이사는 악수하며 마주 잡은 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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