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스파이
신규영입 임원 발표가 나고 얼마 안 되어서 모두가 알게 되었다.
조윤경 남편 안치홍이 천하제일 그룹 임원으로 영입되었다는 소식이 포털 뉴스에 떴기 때문이다.
천하제일 후계 구도에 변화가 감지되었다는 분석 기사까지 연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같이 근무해보기는커녕 이름까지 처음 들어본 사람이 보스로 온다는 소식에 팀원들은 불안했는지 이것저것 물어봤다.
"차장님은 새로 오시는 상무님 아세요?"
"아니. 한 번도 못 봤어."
예전 생에서 안치홍은 경영지원실장으로 재무팀장인 나의 직속 상사였다.
좋은 집안과 학벌에다가 외국계 투자은행에 한참을 몸담아서였는지 기본적으로 젠틀함이 몸에 배어있었다.
합리적인 사고에 자신감까지 넘치는 스타일이었다.
나름대로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깜빡 속았던 거였다.
조윤경과 함께 그룹을 통째로 차지하려는 속셈에 나를 이용하려고만 했을 뿐이었다.
원모도 급격한 변화가 불안한지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차장님, 그분 어떤지 소문이라도 들어보셨어요?"
"음 글쎄……."
지금은 아는 사이도 아니니 조심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적당히 얼버무리는데 옆자리 성환이 대신 답해주었다.
"우리 매형 괜찮은 사람이에요."
"아, 그럽니까? 다행이네요. 괜히 걱정했네요."
안도하는 원모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까진 괜찮았다는 거지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건 아니고요."
성환의 표정에서 씁쓸함과 함께 비장함 마저 얼핏 스쳐 갔다.
조윤경의 실체를 파악한 이후로는 자기 매형도 이제껏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에 배신감이 들었을 것이다.
* * *
오후 3시가 되자 수화기가 울렸다.
"비서실입니다. 로비에 차량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갈게요."
조윤경이 보낸 차량이 준비되었다는 말이었다.
비서실을 통해 만나자는 말에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행여 이상한 제안이라도 해오면 어차피 오래 다니지도 않을 테니 거절하면 그만이다.
일부러 피해가면서 내가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굳이 알려줄 필요 없다.
"어디 가시나 봐요?"
통화하는 걸 들었는지 성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
"약속 있어서 먼저 가볼게."
"무슨 약속이요?"
"그런 거까지 보고하리 내가?"
"아니. 그냥 평소랑 달라서."
비서실 직원은 성환한테 회동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먼저 얘기하면 꼬치꼬치 물어보기만 할 테니 우선 조윤경의 말을 들어보고 나서 얘기할지 말지 결정해도 늦지 않다.
로비에는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세워져 있었다.
내 얼굴은 어떻게 알았는지 로비를 걸어 나오자 기사가 뛰쳐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도심을 빠져나와 십여 분 동안 꼬불꼬불한 산자락을 넘어 저택에 도착했다.
임원일 때도 회장 보고로 몇 번밖에 와보지 못한 성북동 안가였다.
이런 산꼭대기에 집을 지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가파른 고개를 계속 넘어서야 다다를 수 있었다.
강남 고급 아파트들을 그저 닭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규모와 풍경.
부촌은 바로 여기다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몇 년 뒤 갑자기 조인철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면 더 이상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여기에서 집무를 보게 된다.
이 집을 차지하는 사람이 천하제일 그룹을 차지한다는 상징적인 곳이다.
그런데 대청마루엔 이미 조윤경이 제집인 양 들어와 앉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성환이 부모님과 살고 있긴 하지만 조윤경이 조만간 이 집에서, 즉 천하제일에서 성환을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길가 쪽의 벽과 문은 성처럼 매우 높고 견고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마루 앞은 그저 야트막한 담으로만 되어있었다.
산 너머 경치 구경하기에 딱이었다.
마치 얕은 담이 액자 역할을 하고 그 안에 산과 구름, 하늘을 그려놓은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듯했다.
처마에 앉아만 있어도 미술관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작품은 계절은 물론이고 하루하루가 다 다르다.
돈 벌어서 가장 먼저 사야 할 게 생겼다.
이런 집을 살 것이다.
매일매일 경치 감상하면서 일상에 부대끼며 아등바등하는 시름을 잠시나마 잊도록.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조윤경과 눈이 마주치자 최대한 적개심을 감추고 인사를 건넸다.
조윤경은 마루에 걸터앉은 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앉으라는 얘기가 없다.
항상 이런 식이다.
벌 받는 것도 아니고 세워 놓은 채 자기 할 말을 하는.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라는걸 꼭 이런 식으로 각인시켜 준다.
그래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난번에 레스토랑 앞에서 봤죠?"
"네, 기억하시네요."
"성환이가 회사 사람들하고 다니는 걸 처음 봐서요."
"네. 가끔 식사 같이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성환이 많이 의지하고 있다던데."
"별말씀을요."
어색한 몇 마디를 나누는데 가사도우미가 작은 차 테이블을 들고 오자 이제야 앉으라고 권했다.
"이상현과장하고도 친하다고요?"
"네, 대학교 동기입니다."
"이과장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굉장히 능력 있고 강단 있다고."
이미 이상현은 자기 사람이다라고 알려준 것이다.
"별말씀을요."
처음 몇 마디로 대강 느낌이 왔다.
사무실이 아닌 안가에서 보자고 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뭔가 제안을 할 건데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완전히 자기 사람이 되는 거다라고 넌지시 알려주려는 것이다.
게다가 천하제일의 상징적인 곳인 이곳의 사실상 주인이 바로 자기임을 은연중에 주지시키는 효과도 있고.
단순히 회사 집무실에서 부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
"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만 맡겨놓고는 인사 한번을 제대로 못 한 거 같아서요. 식사는 부담스러우실 거 같아서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었어요."
차도 부담스럽다.
분노가 치밀어 얼굴 마주하고 앉아있기도 상당히 불편하다.
"아닙니다. 조성환님도 성인인데요. 게다가 직급도 과장이고."
"아니에요. 그 녀석 이제 막 졸업하고 사회생활도 얼마 안 해서 아직 많이 서툴러요.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서 충고라도 할라치면 이래라저래라한다고 못 하게 하고."
"배우고 있으니까 점점 나아지겠죠."
"나아지긴. 매번 사고나 치는데. 지난번 그 여가수 누구야. 이름도 기억 안 나네. 하여간 근본도 없는 이상한 애랑 사귄다고 기사까지 나서 그룹 이미지에 먹칠이나 하고. 회장님께서 아주 노하셨던 거 제가 간신히 말렸어요."
자기가 터트린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아무튼 조윤경은 회장을 자기가 어느 정도는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넌지시 흘린 거였다.
"재무팀에서 오래 계셨다고 했죠?"
"입사 후 파견 기간 빼고 계속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최연소 차장이라던데."
"네. 로열패밀리 빼고는요."
빈정이라도 상했는지 한쪽 눈을 치켜뜨고 째려봤다.
"하하! 말에 뼈가 있으시네요."
"아뇨. 그냥 팩트를 말씀드렸습니다."
"네 듣던 대론데요. 성환이도 부하직원 다루듯이 한다는데 맞나 보네요."
"부하직원이 맞으니깐요."
조윤경은 억지웃음 한 번 짓더니 앉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금고지기 오래 하셨으니깐 이것저것 우여곡절도 많으셨겠어요. 원칙이 중요하지만, 워낙 융통성도 필요한 부서라."
융통성 부리려고 이것저것 묻고 숨긴 거 다 안다며 조용히 협박한 거다.
채찍이다.
"회사 일 한다고 손이 좀 지저분해지긴 했습니다."
채찍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성환이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요. 요즘 들어서 걱정되는 마음에 이것저것 조언이라도 하려면 무슨 상관이냐 웬 참견이냐며 들이받으려고만 하네요. 그런데 마침 김차장이랑 의견도 아주 잘 맞고 또 의지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하실 말씀이……?"
"혹시 성환이를 바른길로 안내할 수 있도록 저와 함께 이끌어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전형적인 재벌 스타일의 멘트였다.
예를 들어 칼을 들어야 할 때도 휘두르라고 직접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없으면 편할 거 같다고 운만 띄울 뿐.
설령 상대방이 녹음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킨 적 없었다고 발뺌할 수 있다.
재벌교육 과정에 '발뺌'이라는 과목이라도 있는지 지난 생을 통해 겪어본 바로는 하나같이 다 저런 식이었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서 몸에 자연스럽게 배었을 것이다.
조윤경의 말은 내용만 보면 그저 바른길로 안내하도록 도와달라는 거지만 사실은 자기가 의견을 내면 내 의견인 것처럼 해서 성환을 설득하라는 거다.
말이 좋아 설득이지 자기가 명령하면 그대로 성환을 조종하라는 건데.
못 알아듣는 척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이번에 제 남편이 천하제일에 조인해서 재무팀장 맡기로 한 거 아시나요?"
"네, 인사발표도 났고 기사로도 봤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마침 바로 밑에 부장 자리가 공석이라고 들었어요. 우선 천차장이 그 자리를 맡아서 해 주는 게 어떨지. 직급은 내년에 맞추면 될 거 같고. 내후년엔 임원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번엔 당근이다.
지금 당장 김병국부장 자리로 보내주겠다는 말이었다.
내년엔 부장으로, 내후년에는 임원까지 달게 해준다는 말과 함께.
"참, 지난번 승진 파티는 잘하셨죠?"
"네?"
"좋은 거 드시지 왜 고작 그런 거 드셨어요?"
명동 흑돼지 집에서 승진 턱 낸 걸 말하는 것이었다.
돼지고기긴 해도 일 인분에 2만 원에 육박하는 걸 고작 그런 거라니.
"제가 좋은 걸로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좀 아쉽더라고요. 다음번에 팀원들이나 주변분들 모두 데리고 좋은 데로 가세요. 예산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요."
지난번 흑돼지 집 회식을 자기가 계산했다는 건데.
이상현한테 승진 파티 간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조윤경은 자기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위력을 과시한 것이다.
게다가 한도 없는 법인카드도 쥐여줘서 신경 안 써도 되게 알아서 잘 케어해 주겠다고 제안까지 할 겸.
초고속 승진과 함께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예산.
천하제일에 남아있겠다고 생각했다면 무조건 콜 할 정도로 괜찮은 제안이다.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바로 아웃이다.
우선 내부감사로 털릴 거다.
아무리 떳떳하다고 한들 항상 누구한테나 생각지도 않은 뭔가가 나온다.
하물며 난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겪어왔던 온갖 추잡한 것들, 갖은 수로 덮고 넘어간 것들을 국세청이나 공정위에 까발리겠다고 하면 잠시는 대적할 수 있겠지만, 대기업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다.
시민단체나 다른 경쟁업체의 지원이 있어야지만 가능할 텐데.
지금 내 처지에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투사가 될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은 물론이고 이유도 없다.
별 탈 없이 천하제일을 나간다고 해도 지금 분위기면 좀 더 빠른 시기에 조윤경이 성환을 내치고 천하제일을 차지할 거다.
조윤경이 그 정도로 커버리면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복수는 정말 어려워질 수 있다.
가능하면 성환을 강력한 대항마로 키워 견제하게 하고 나중에 복수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렇다면 제안을 받아야 하나?
일 년만 버티고 나가면 그만인데 그때까지 조윤경의 끄나풀 짓까지 해야 하나?
성환이한테 얘기하고 이중 스파이 노릇이라도 할까?
잠시간의 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다 회사를 위한 일인데 뭐 좀 걸리시는 거라도 있나요?"
제안을 받을지 말지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했다.
방법이 없었다.
제안을 받되 조건 몇 개라도 걸 수밖에.
한 부서에서 성환과 함께 조윤경 남편 밑에서 근무한다면 결국엔 작업당할 것이다.
뭔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단."
말을 할 듯하면서 거두니 조윤경이 짜증 난다는 듯 답했다.
"네, 어떤 거라도 말씀해 보세요."
"무작정 말씀을 따른다기보다는 회사의 발전을 위하는 방향에서 협력할 것은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로열티가 생겼다기보단 그저 시간을 좀 벌기 위함이었다.
일단 제안을 받되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된다.
"다른 건 또 없나요?"
"네, 조성환님은 지금 일 년 만에 결산은 물론이고 주주총회와 세무조사까지 재무팀에서 할 만한 건 다 해 봤습니다."
"그래서요?"
"경험 차원에서 순환보직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처남과 매형이 한 부서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같이 근무하는 건 트러블이 생길 여지도 많고 밖에서 보기에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 어디로 가겠다는 건지?"
"엔터테인먼트 쪽이 어떨까 싶은데요?"
엔터테인먼트 사업.
한창 뜨고 있지만, 아직까진 비중이 크지 않아 그룹 내 핵심 사업군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여러 회사를 인수 합병하면서 몸집도 키우고 K-pop의 세계적인 유행과 함께 크게 성장하여 곧 그룹의 주축 사업군이 될 것이다.
조윤경은 식품, 화학이나 건설 같은 주요 계열사도 아니고 변방으로 보내자는 말에 뜻밖이었는지 놀라는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그래도 성환이한텐 내가 말하기보단 천차장이 제안해 보시죠."
감시망에서는 벗어나긴 하지만 핵심 계열사도 아니고 그 정도면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서 대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겸사겸사 나한테 첫 번째 미션까지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