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낙하산
승진을 했다고는 하나 직급만 승진일 뿐 하는 일은 똑같았다.
더군다나 승진 후 첫 번째 월급날 통장에 찍힌 금액은 아무리 봐도 지난달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앞자리라도 바뀌어야 좀 실감이 날 텐데, 그것도 그대로이니 도무지 오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승진했다고 해서 부서장이 된 것도 아니니 보직 수당도 따로 없었고 기본급 또한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김병국 부장의 태도였다.
임상무 앞에서 일부러 실적을 깎아내리려고 하며 애들 보는 데서 대놓고 갈구기 시작했다.
견제모드에 들어간 것이다.
부서원이 승진하는 것은 자기 부서의 힘과 연관되기 때문에 분명 좋긴 하다.
그러나 자기는 그대로인데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기의 대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능력도 있는 데다 상사에게 인정받고, 부하직원들이 잘 따르는 데다 직급이나 연차가 낮아 연봉마저 적다면 게임 끝이다.
바로 선수교체다.
대부분의 상사들은 자기도 그렇게 밀려날까 봐 알게 모르게 경계하면서 자기 자리를 넘보지 않도록 작업을 한다.
상사 앞에서는 업무실적으로 폄훼해 버리고 부하직원 앞에서는 인신공격을 섞어가며 갈구면서 누가 실세가 누구인지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하는지 각인시킨다.
김병국 부장은 마침 딱 그 시기가 왔다.
자기가 올해에도 임원 승진에서 누락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데다가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인력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날려 버리고 그 자리에 나를 앉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특별한 이슈 없이 반복적인 업무만 진행하고 있는 중 주간업무 보고 시간이 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원모가 초안을 쓰고 성환이 수정하고 다듬었다.
지난주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보고자료를 가지고 임상무 방으로 들어갔다.
금주 실적과 차주 계획을 보고하는데 내 발표를 듣고는 김부장이 갑자기 역성을 냈다.
"어떻게 된 게 매주 똑같은 거 같냐? 일은 하는 거냐?"
"일하죠. 그럼 놀러 옵니까? 회사에?"
말도 안 되게 갈구는 것 같아 바로 들이받았다.
김부장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말투 하고는. 할 게 없으면 적극적으로 찾아서 하란 말야."
임상무 앞에서 깔아뭉개려는 것이다.
내가 자기의 대체자로는 한참 모자라다는 걸 상사에게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것이다.
김부장의 의도를 아니까 조금은 처량해졌다.
저렇게밖에 할 수 없는 직장인의 현실이 참 고달프기만 했다.
어차피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이상 대꾸하면 지랄의 정도만 더 심해질 뿐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더욱더 귀찮아지기만 할 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드러워서 피하지.
그냥 대꾸 없이 가만있자 마치 자기가 이긴지 알고 한껏 의기양양해진 모습이었다.
김부장은 사무실에서는 애들 들으라는 듯이 크게 소리치는 횟수가 많아졌다.
"야 태평아. 그것밖에 못 해? 옆에 IR이랑 자금 애들 으쌰으쌰 하는 거 안 보여? 왜 우리 애들은 다 하나같이 너처럼 동태눈깔에 매가리가 없어. 눈치만 보고."
자기 얘기하는 줄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김부장의 모습 그대로를 나불대고 있었다.
그냥 좋게 좋게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지금 저한테 그런 겁니까?"
"그럼 너지 누구겠냐?"
확전이다.
부서원들 모두가 머리를 처박고 귀를 쫑긋 열어 구경모드로 전환했다.
걱정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싸움 구경한다고 좋아 죽을 거다.
의자라도 걷어차고 삿대질을 날릴까 하는데 김부장 전화벨이 울렸다.
종이 살렸다.
"네, 상무님."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임상무 호출이었다.
김부장이 애들 다 보는 앞에서 떡실신할 것을 임상무가 살렸다.
임상무 방에 귀를 기울이니 임원 승진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직원 승진발표가 끝났으니 이제 곧 임원 승진발표 날 때가 되었다.
지주사 재무팀 역사상 경리 부장 출신이 임원 승진을 못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김부장은 작년에도 승진대상에 포함되긴 했었다.
다른 부서에 워낙 쟁쟁한 사람들도 많았고 오랫동안 승진이 누락된 고참들이 많아서 김부장의 승진은 한해 밀렸었다.
그렇지만 올해는 무조건 되는 각이었다.
성과평가도 괜찮고 큰 사고도 없어서 특별히 까일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발표 나기 전까지는 절대 확신할 수 없으니, 요즘 굉장히 마음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테였다.
그 스트레스를 견제한답시고 나한테 풀려고 한 것이고.
"병국아, 이번에 지주사에서 최소 5명 승진할 거 같은데 네가 두 번째라고 하니깐 이번엔 확실해. 걱정하지 마."
임상무가 미리 듣고서는 귀띔해 주려는 것이었다.
"네, 상무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발표 나와봐야 아는 거죠."
작년에도 막판에 다른 사람들한테 밀려서 그런 건지 여전히 김부장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IMF 이후로 임원 승진을 안 한 적은 없었어. 최소 네다섯 명은 하니깐 걱정하지 마. 내가 인사팀에도 말해 놨으니깐."
임상무도 다 된 밥에 살포시 숟가락 하나 얹혔다.
김부장이 승진하면 자기가 말해 놓은 덕이라고 두고두고 생색내려고 밑밥 까는 거다.
"다 상무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닌지 뻔히 알면서도 역시 나와는 다르게 그냥 받아줬다.
척하면 척이었다.
"그래. 이제 얼굴 좀 펴라. 하여간 요즘 맨날 죽상이야."
"넵 상무님! 충성!"
보이진 않았지만 실제로 거수경례라도 했을 거다.
좋긴 좋은가보다.
임상무 방으로 들어갈 땐 온갖 짜증과 분노를 머금은 표정이었으나, 나올 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 일색이었다.
나를 바라보는데도 웃음기를 거두질 않았다.
뭐지 이 황당한 상황은?
심지어 사과까지 했다.
"태평아. 아까 미안. 괜히 쓸데없는 생각 좀 하느라고."
알았다. 그냥 넘어가 주겠다.
김부장이 미쳤는지 종일 실실 쪼개고 다녔다.
자랑하고 싶긴 한데 미리 소문날까 봐 간신히 참고 있는 게 보였다.
* * *
며칠 후에는 김부장에게 축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정식 발표가 나진 않아 축하 난까진 오지 않았지만, 승진은 기정사실인 듯.
여기저기서 전화가 빗발쳤다.
수많은 통화에도 하나도 안 귀찮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을 건넸다.
"아직 발표도 안 났는데요, 뭘요."
"네, 발표나면 한잔하시죠."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이미 인사발표 나서 축하 전화 받는지 알았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전개가 이어지고 있었다.
혹시 전제조건이 될만한 작은 사건들이 틀어지면서 결과가 바뀌고 있는 건가?
원래 생에서는 김부장은 임원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그러나 내가 알던 과거와 지금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분명히 다르다.
어쩌면 결과까지 달라질 수도 있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아직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김부장이 조용히 불렀다.
"태평아, 잠시만."
"네."
"오늘 번개하자. 애들 시간되는지 물어봐봐. 되는 애들끼리 하자고."
"조과장은요?"
"음. 바쁘시겠지."
평상시에는 몇 명 찍어서 시간되는지 물어봤는데 오늘은 달랐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엷은 미소.
승진에 대한 언질을 받은 게 분명했다.
통상 발표 전날 개인적으로 전화가 가는데 오늘 그 전화를 받았나 보다.
부서원 모두 불러 세워놓고 충성맹세라도 받으려는 거다.
그러니 조성환은 살짝 뺀 거고.
* * *
가성비 좋은 강남의 소고기집.
성환을 뺀 모든 부서원이 참석했다.
뻔히 임원 승진 파티 분위기인데 선약이 있었어도 빠진다고 할 순 없었을 것이다.
배부르게 1차를 마치고 통째로 빌린 카페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양주와 맥주가 깔려있었다.
대형룸 입구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풍선과 플래카드까지 걸려있었다.
'김병국이사님의 승진을 축하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노래방 기계까지 들인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김부장은 팀원들 한 명씩 불러서 꼬인 혀로 충고질을 시작했다.
한 명씩 좋은 말을 해 주는 척하면서 충성맹세를 들으려는 거다.
맨 마지막으로, 내 차례다.
김부장은 한 팔로 어깨를 둘러싸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태평아. 난 말이야 네가 좀 미웠다. 근데 지금은 좋다."
"왜요?"
"아니, 그냥 뭔가 좀 다르다고 할까? 우리랑 조금 다른 느낌이어서……."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이제 제발 좀 형이라고 불러라. 잘해 보자. 건배."
예의상이라도 그러겠다고 대답하기 곤란했다.
머뭇거리는데 다행히 김부장이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얼핏 국번을 보니 회사 전화였다.
"미안. 중요한 전화다."
조용히 룸을 나서는데 옆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랫소리가 나면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조용히 통화하려고 옮긴 것이다.
"네, 김병국입니다."
잠시 후.
"네 제가요? 갑자기 왜요? 아까랑 말씀이 다르시잖아요."
"에이 썅!"
전화기를 던져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그르친 거다.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스르륵 옆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히 카페를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사라졌다.
만취한 애들은 김부장이 있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부어라 마셔라 할 뿐.
한참 뒤 김부장이 안 보이는 걸 알았는지 원모가 찾았다.
"차장님! 부장님 어디 가셨죠?"
"아까 속이 안 좋아서 집에 간 거 같은데, 못 봤어?"
"그래요?"
더 이상 찾는 놈이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역시 김병국부장은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났어도 회사 먼저 와서 스마트미팅을 하고 나서야 병원을 가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회사를 안 나왔다.
어쩌면 김부장한테는 회사가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집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미미한 존재감을 회사에서는 크게 과시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점점 회사에 의존하게 되고 이윽고 동일시까지 하게 된 게 아닐까.
2년 연속 승진 누락되었다는 전화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김부장이 결근해서 스마트미팅 주재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스포츠신문은 놔두고 미팅을 주재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것 같은 분위기.
팀원들 역시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나보다.
스마트미팅을 끝내자 바로 사무실 곳곳에 걸려있는 티비가 켜졌다.
빠라바~빰.
음악 소리와 함께 사내 아나운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룹 임원 승진발표였다.
역시 임상무는 전무로 승진하면서 천하제일증권 경영지원실장으로 영전했다.
우리 부서뿐만 아니라 IR파트, 자금파트에서 열렬한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임상무는 방에서 잠시 나와서 TV 보고 있던 우리들을 향해 인사했다.
부서원들은 더 큰 박수 소리로 화답해주었다.
맨 마지막 신입 임원인 이사승진 발표가 나왔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김병국부장은 거명되지 않았다.
대신 재무팀에선 자금파트 부장 이름이 발표되었다.
승진한 자금부장은 환호하는 부서원들 사이로 가서는 인사를 건넸다.
우리 경리파트는 박수는 쳐 줬지만,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임상무가 증권사로 영전하는 바람에 재무팀장이 공석이 되었다.
오후가 돼서, 임상무가 찾는다는 말에 집무실로 들어갔다.
임상무는 발표 난지 몇 시간도 안 돼서 벌써 짐 싸는 중이었다.
사무실은 이미 축하 난으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상무님. 아니 전무님 영전 축하드립니다."
"그래. 다 너희들 덕분이지 뭐."
예의상 주고받는 인사는 이걸로 끝이었다.
"태평아! 김부장 아직 안 왔냐?"
"네. 어떻게 된 거죠? 어젯밤에 승진 파티까지 했는데."
"어제 오후까지는 분명 승진했다고 했어. 자금파트장은 아니었고."
"그런데요?"
"밤에 결정됐나 봐."
"누가요?"
"몰라 나도. 고위급 결정이니까 나도 듣기만 했어."
"전무님 정도면 어필 한번 할 수 있지 않아요?"
"인사팀장한테 물어봐도 통 대답을 안 해 줘. 거기다 우리 팀 다 누락시킨것도 아니고 자금부장 승진시켜줬으니 체면치레는 해 준 거니까 뭐라고 따질 수도 없고."
"재무팀장은 누가 하는 겁니까? 아직 발표 안 난 거 같은데요."
"기다려 봐. 좀 있다 보직인사 발표날 거야. 보면 알아."
몇 번을 더 물어봐도 통 대답을 안 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역시 김부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충격이 컸는지 오늘 아예 안 나올 생각인가 보다.
잠시 뒤 갑자기 TV가 켜지더니 사내 아나운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임원 보직 인사 및 신규영입 임원 발표가 흘러나왔다.
"신규영입 임원인사 발표가 있겠습니다.
재무팀장 상무이사 안치홍."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치홍!
조윤경의 남편이다.
4선 국회의원의 아들이면서 MBA를 졸업한 인재였는데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천하제일로 조인한 것이다.
일 년만 버티면 되는데 꼬였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와이프랑 똑같은 놈이다.
이쯤에서 정말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데 전화 한 통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천태평 차장님이시죠?"
"그런데요? 누구시죠?"
"네, 비서실인데요. 오후에 잠시 시간 되시나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조윤경 전무님께서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