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한턱
다음 날 오전.
성환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바로 공적조서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신상에 대한 정보도 기재되어 있었다.
출신 지역, 학력과 경력이 도대체 공적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으나 한국 특유의 문화라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바뀌기는 힘들 것이다.
공적 요지.
즉 어떤 공을 세웠는지 기술하는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업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예측불허의 유머 감각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입니다. ~ 뭇 남성들을 압도하는 스타일 리더로서 아래로는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 위로는 상사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가 따로 없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성환은 지가 정말 잘 썼다고 생각해서 웃는 것인지 놀리려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설마 장난하려고 한 거겠지.
딴 거 써 놓은 게 있을 거다.
원모 걸 초안 보고 수정한다고 했으니깐.
'짝짝' 두 번의 박수를 보냈다.
"잘 봤으니깐, 이제 제대로 쓴 거 줘봐."
손을 휘저으며 빨리 달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성환은 입을 삐쭉거리며 으쓱했다.
"그게 단데요?"
"뭐라고?"
"그거라고요. 최종본."
장난이 아니다.
원모의 표정을 살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일단은 참았다.
"원모야 초안 줘봐."
원모는 자기가 쓴 자기 공적조서를 보여줬다.
평상시 보아오던 누가 봐도 뻔한 내용과 형식이었다.
그렇다면 내 조서는 원모가 쓴 건 깡그리 무시한 채 이놈이 그냥 휘갈긴 거다.
잠시 고민해봤다.
내가 다시 쓸까?
내가 쓴다고 나아지기는 할까?
쓰나 마나 승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어차피 이건 형식적인 절차일 뿐.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그냥 귀찮아졌다.
게다가 한마디도 나쁜 말은 없지 않은가.
"그래, 수고했어."
"끝입니까?"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르겠다.
이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음. 고마워. 승진하면 다 네 덕이야. 삼겹살뿐이냐? 백겹살이라도 사 주마."
이제야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 한번 끄덕였다.
그랬다.
기어이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 * *
"하하하, 재밌다. 웃었어."
김부장이 내가 건넨 공적조서를 읽어보더니 썩은 표정으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역시 장난이겠거니 생각한 모양이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진짜 쓴 거 줘 봐. 시간 없어. 빨리 올려야 해."
"그거에요."
"뭐라고?"
"그게 최종본입니다."
김부장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졌다.
어젯밤에 마라탕이라도 원샷했나.
급 설사라도 마려운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장난하냐?"
이게 뭐다, 왜 이렇다 설명하고 해명하기 정말 귀찮고 피곤하다.
승진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뭐가 이리도 귀찮은 게 많은지.
바로 옆자리 성환을 째려봤다.
뜬금없이 노려보니 움찔거리는 게 자기도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나.
아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화투 중이었는데 방금 또 싼 모양이었다.
그래도 잔소리 계속하니 이제는 이어폰은 끼고 친다.
내가 노려보는 걸 알았는지 이어폰을 빼고 대답했다.
"네? 부르셨나요?"
"조대리! 공적조서 네가 써 준 거 장난이냐고 물어보시는데?"
"네? 누가요?"
매우 적절한 반응이었다.
톤앤매너가 딱 기대한 그대로였다.
맞은편에서 김부장이 갑자기 두 손을 휘저으며 격렬하게 아니라고 했다.
잠시 후.
인사팀에서도 아무래도 좀 이상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김부장이 조용히 답해주었다.
"그분 작품이야. 받아들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할 수밖에 없는 치트키를 가지고 직장 생활하니 정말 편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직장생활을 연장할 수는 없는 법.
사무실 구석에서 조용히 예금, 증권계좌의 잔고를 모두 열어보았다.
일 년 가까이 안 쓰고 안 입고 안 사 먹으면서 월급을 차곡차곡 간접투자상품에 넣었으나 아직까진 별 진전이 없었다.
S 받은 덕에 성과급도 두둑이 받았으나 모두 합쳐서 사천만 원이 채 안 된다.
물론 절대적으로 큰돈이긴 해도 목표 1억이 되려면 허리띠를 더욱더 졸라매야겠다.
* * *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봤어? 떴어."
"뭔데?"
"승진발표 났데."
"어디 어디 정말? 우리 팀 누가 승진했어?"
여기저기에서 승진 결과를 두고 당연하다느니 너무한다느니 평가가 오가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하긴 한데 대놓고 들어가서 보기는 살짝 쪽팔린다.
실컷 초연한 척해 놓고 조마조마하게 결과라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승진발표 나기 전에 미리 언질이라도 줬을 텐데 이번엔 정말 아무 얘기도 없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하면서도 어쩌면 누락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귀를 쫑긋거리는데 역시 내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잠시 뒤 성환이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장님!"
대답이 없자 다시 소리가 들린다.
"천차장님!!"
날 부르는 거였다.
승진했다고 알려준 거였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봤다.
차장님 소리를.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다.
별 기대도 안 했고 어차피 오래 있을 것도 아니지만, 기분 좋은 건 좋은 거다.
이어서 성환이 원모도 불렀다.
"김과장님!"
"네. 조과장님!"
과장 승진자 명단에 원모도 올라가 있었나 보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과장님이라니?
조성환도 승진자 명단에 있었나 보다.
이놈이 우리 부서에 올 때 슬쩍 사원에서 대리로 달고 오더니 일 년만에 과장으로 승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성과평가도 C 받았는데.
어이가 없지만 이게 현실이다.
내 위가 아닌 게 어디냐
일 년 내에 무조건 탈출이다.
그때는 이놈이 부장으로까지 승진해있을지도 모르니 그 꼴 보기 전엔 나가야 한다.
"헐, 차장님은 궁금하시지도 않아요? 인사발표 공지도 안 보시는 거 같은데."
"안 궁금해."
"아니 왜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차피 승진할지 알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곧 나갈 거니까 승진은 하나 마나 관심 없다라고 할 수도 없고.
맞은편 김부장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부서원들을 불러 모았다.
"자 다들 여기로 모이죠."
웬일로 성환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김부장이 부른 곳으로 갔다.
원모양으로 빙 둘러서자 김부장이 얘기를 꺼냈다.
"이번에 우리 부서에서 승진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다들 축하 박수 한번 보내시죠."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와!'하는 함성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을 거고 누군가는 질투의 눈으로 째려봤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두들 두 가지 마음을 다 가졌을지도 모른다.
"승진하신 분들 각자 소감 한마디씩 하시죠."
김부장 또 시작이다.
조직에 대한 감사와 함께 은혜를 베푼 자신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라는 얘기다.
대리, 과장 승진자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발표했다.
진심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영혼없는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성환 차례가 왔다.
헛기침 한마디와 함께 연설이 시작되었다.
"세무조사 때 같이 고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일을 진두지휘하면서 여러분들의 고충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역시 내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과장 승진 소감 발표하라고 했더니 대표이사라도 취임한 줄.
팀원들은 듣기는 한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박수만 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소감은 별거 없고요. 제 공적조서를 읽어드리는 걸로 갈음하겠습니다."
내 자리에 있던 공적조서를 들고 와서는 그대로 읽었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업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높은……."
다들 황당했는지 박수를 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서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짝짝!
성환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저런 주옥같은 멘트를 썼는지 스스로 대견한지 몹시 흐뭇한 표정이었다.
성환이 박수를 치자 팀원들 모두가 따라서 박수치기 시작했다.
"역시 과장님……. 아니 차장님이셔."
"와!"
엎드려 절 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억지인양 영혼없는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다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성환이 붙잡았다.
"잠시만요. 자자, 잠시만요."
"뭐야? 안 들어가고?"
내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있었다.
"차장님이 이번 승진 턱으로 삼겹살 쏘기로 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되시는 분들 같이 가시죠."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나 보다.
설마 자기가 공적조서 잘 써준 덕에 내가 정말 승진한 걸로 알고 있나.
내 의사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를 잡아버렸다.
그래도 그나마 금요일이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주말이니 약속 있는 놈들이 많을 테니.
자리에 돌아와 원모를 찾았다.
"원모야!"
"네 과장님. 아니 차장님!"
헤 웃으며 바로 호칭을 정정했다.
"삼겹살 집이 있어. 회사에서 무지하게 멀어서 다들 집에 가기도 상당히 불편해. 게다가 무지하게 싸. 예약해."
"그런 데가 있습니까?"
"초록창에 없는 게 있더냐? 잘 찾아봐봐. 이왕이면 무한리필로다가."
오전 내내 전화통이 빗발쳤다.
직접 전화할 만큼 친하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화를 했고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사내 메신저나 메일을 보내왔다.
덕분에 승진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몇 통의 전화가 끝나고 한숨 돌릴 때쯤 울리는 전화벨 소리.
발신자 표시에 이상현의 이름과 번호가 떴다.
분명히 승진발표 공지를 보고 전화한 것이다.
좀 전에 확인한 차장 승진자 명단에는 이상현의 이름은 없었다.
"축하한다. 태평아. 아니 천차장님."
"그래, 고마워. 근데 뭐 차장 승진이 뭐라도 된다고."
잠시 동안 이상현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내 입에서 말이 헛나온 것이었다.
갑자기 예전 생에서의 차장 승진 발표날이 떠올랐다.
오늘처럼 이상현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승진이 부러웠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보다 앞서가는 데 대한 질투심도 폭발했을 거다.
그 당시에는 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2년 빠른 내 승진은 당연한 것처럼 말했고, 이상현에게는 내년에 꼭 승진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이 정도의 위안 같지도 않은 말을 남겼을 거다.
이상현은 물론 나에 대한 적개심만 더 키우는 꼴이었을 거다.
잠시 뒤 숨을 고른 듯 이상현의 대답이 들려왔다.
"차장이 대단한 거지. 난 언제일지 기약도 못 하겠구만."
겸손한 척해야 한다.
괜히 적개심을 더 불태우게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내 주제에 차장은 과분하지. 너라면 몰라도. 법무팀 에이스니까 과장 올해까지 2년만 채우면 너도 바로 승진할 거야. 부장은 분명 나보다 빨리 달 거고."
"에이, 말이라도 고맙다. 태평아 한잔 사야지. 금요일에 시간 돼?"
일단 다행이다.
바로 내 말을 이어받은 걸 보니 크게 신경 거슬리진 않았나 보다.
거기다 금요일을 제안하니 더 다행이었다.
"어떡하지 상현아. 이번 주 금요일에는 약속있는데."
"무슨 약속? 금요일마다 바쁘다 너?"
"이번 주에 우리 팀에 한턱 쏘기로 했어."
"승진 파티구나."
이상현이 말끝을 흐렸다.
속으로 질투심에 부글부글 끓는 걸 참는 것일 거다.
"아니 파티는 무슨. 내기에서 져 가지고 할 수 없이."
"그래? 그럼 어디서 하는데?"
"아직 안 정했어. 우린 담에 좋은 데 가서 하자."
* * *
금요일 6시가 되자 다들 바쁘게 짐을 챙겼다.
회사에서 무지하게 먼 무한리필 삼겹살집으로 가자는 나의 의견은 묵살됐다.
조성환이 미리 수를 쓴 것이었다.
명동의 제주흑돼지전문점,
회사에서 무지하게 가깝다.
게다가 팀원 누구든 대중교통으로 편하게 집에 갈 수 있는 절묘한 곳이다.
그러나 돼지고기인데도 일 인분에 무려 1만8천 원이나 하는 무시무시한 집이었다.
불금인데도 약속도 없나.
곱창집에서의 첫 회식 날이 떠올랐다.
조성환이 참석한다고 말단 사원부터 김부장까지 전출이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몇 놈은 저녁에 회식 있다고 점심마저 걸렀다.
내가 내년까지 회사에 남아있다면 그놈들 성과평가는 C, D로 깔 것이다.
"돼지고기는 핏기만 없으면 먹어도 돼."
이대리는 빽사부라도 되는 양 아는 척 거들먹거리며 익지도 않은 고기를 입에다 쑤셔 넣고 있었다.
휴지를 입에 처박아 버리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매번 간 안 좋다고 술 한잔도 마다하던 동규는 오늘도 미리 겔포스 몇 개 먹고 왔는지 연신 원샷 때리는 중이었다.
하여간 도와주는 놈들이 없다.
대충 내가 가진 돈을 계산해보니 근무 기간 한 달 연장이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포기다.
한 달 그냥 더 다니고 말지 뭐.
지금 많이 먹는 자식들 잘 봐두자.
근무 기간도 연장됐는데 천천히 두고두고 괴롭힐 거다.
성환은 직원들이 돌아가며 채워 주는 잔을 계속 받다가 뻗어 버려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를 불러내서 돌려보냈다.
1차만 산다고 하니깐 팀원들은 장소 옮길 생각을 안 하고 아예 끝장을 보려고 했다.
시간은 어느덧 12시를 넘고 원모, 해규와 함께 셋이 남았다.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이제야 만족한 듯 두 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운 마음에 조마조마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이요."
"벌써 하셨는데요?"
"네? 누가요?"
"아까 어느 분이 하고 가셨는데요. 더 시킬지 모른다고 여유있게 하고 가셨어요."
누구지?
설마 실려 나가면서 성환이 했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데…….
아무렴 어떠냐 어차피 돈 굳었는데.
술 취해서 더 생각하기도 싫다.
내일이면 알겠지.
다행히 한 달 연장 근무는 없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