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승진
좋은 기분은 잠시일 뿐 이내 걱정이 밀려왔다.
내가 S고 원모가 B면, 결국 다른 누군가가 C를 받았다는 건데.
괜히 다른 친구한테 피해가 돌아갔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대평가, 제로섬 같은 룰은 구성원들로 갈등을 야기한다.
서로를 협업해야 할 상대라기보다는 밟고 일어서야 할 경쟁자로만 여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려서부터 늘 이런 상대평가 틀 속에서 경쟁에 내몰려왔다.
그래서 어느 조직에 속해 있든지 서로를 깎아내리는 데만 집중한다.
이런 경쟁이 정작 조직에는 피해만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고 귀를 기울여도 대체 누가 C를 받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결과를 보고 혼잣말로 욕을 내뱉은 동규도 그때만 잠시였을 뿐 이내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A를 기대했는데 B를 받아서 잠시 그랬었나 보다.
다른 얘들 중에서도 머리를 쥐어짜거나 한숨만 푹푹 쉬거나 한참 동안 밖을 배회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는 얘들은 안 보였다.
그러나 먼 곳이 아닌 바로 옆에 조성환만이 희한한 행동을 했다.
노트북을 보란 듯이 내 쪽으로 활짝 열어놓 고는 연신 중얼거렸다.
"비타민 C 먹으니 엄청 쓰네."
"답답한데 오란씨나 먹을까."
"이 사과는 왜 이렇게 씨가 많아."
이 자식이 온몸으로 어필하는 중이었다.
노트북 화면엔 성과평가 결과가 열려 있었고 C라고 적혀 있었다.
자기가 대신 C 받았다고 봐 달라는 거였다.
원모에게 턱짓으로 성환이 노트북 한 번 보라고 넌지시 알렸다.
화면을 슬쩍 한번 보더니 금세 표정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짜장에 곁들이는 단무지하고는 차원이 다른 감격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치 추가시간에 골든골로 군면제라도 받은 축구선수 같았다.
조성환은 이렇게 한 명을 완전한 수하로 거두게 된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기분 좋게 넘어가 주자.
성환은 C를 받든 말든 무슨 불이익이 있겠냐 만은, 자기가 마치 큰 희생이라도 한 것마냥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이놈 덕에 나도 S를 받은 꼴이 되었으니 빚진 기분이 드는 거 같아 찜찜했다.
"너도 성과 평가받냐?"
"직원이니깐요."
"직원은 개뿔, 일도 안 하는 게."
"제가 왜 안 합니까. 세무조사도 진두지휘했고."
"그래서 C 받았나 보지."
"헐? 누가 희생했는데."
"알았다. 하여간 생색내기는."
둘의 대화에 원모가 들어왔다.
"아이, 과장님도. 조성환님이 언제 생색내셨다고. 조성환님께서 얼마나 담대하신데요."
그새 완전히 넘어갔다.
"과장님, 점심이나 드시러 가시죠."
"싫어. 니들이나 먹어. 둘이 복숭아밭 가서 뭔 맹세라도 하든지 암튼 꼴 보기 싫어."
이놈들 두 번은 권하지 않았다.
헛헛한 마음에 홀로 조용히 회사 문을 나섰다.
청계광장을 통해 산책로로 내려오니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아서인지 양복 입은 사람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운동 삼아 나온 동네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팔을 앞뒤로 직각이 되게 휘저으며 열심히 걷고 있었다.
특별히 갈 데도 없어 무작정 좇아 걷기 시작했다.
구두를 신어 불편하긴 했어도 젊은 몸이니 숨이 헐떡이거나 못 견딜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일이십 분을 그렇게 걷다 보니 머릿속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점심 먹고 오침한다고 했어도 책상에 엎드리거나 의자에 구부정하게 걸터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쉬면 오히려 더 피곤한 느낌마저 들었었다.
차라리 점심시간 일찍 나와서 이렇게 걷는 게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몸도 건강해질 거다.
운동 안 하고 살다가는 조용히 내 몸은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뒤 동작대교 번지는 피할 수 있어도 이듬해에 어이없이 병실에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막상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평상시 건강을 챙기지 못한다면 그 기업이 더욱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
청계광장을 출발한 지 30분 정도 만에 광장시장에 도착해 예전에 종종 들르던 칼국수 집 의자에 걸터앉았다.
임원 달고는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먹어보니 괜찮았다.
만두도 두 알 들어가 있었고 오천 원에 이 정도면 아주 훌륭했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걸어서 청계광장 쪽으로 돌아오니 길거리에서 한 가수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 몇 명 없어도 꿋꿋이 노래하고 있는 그 가수는 선글라스 낀 채 모자를 깊게 눌러썼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단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길거리 버스킹을 주로 하다가 오디션 프로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르게 될 Jay였다.
동굴을 뚫고 들어갈 듯한 저음부터 맑고 청아한 고음까지 정말 넓은 음역대를 가졌다.
노래가 끝나자 구경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박수를 열심히 치면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오기만 했다.
막상 지갑은 몇 명 열지 않았다.
얼핏 보니 바닥에 열어놓은 기타 케이스에는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만 간간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 지갑을 꺼내자 Jay가 악기를 챙기는 와중에도 줄곧 내 지갑에 눈길을 보내는 게 보였다.
호탕하게 지갑을 꺼내 들고 쫙 열어보는데 제기랄.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뿐이었다.
아까 칼국수 먹고 오천 원 내면서 분명히 초록색 한 장 남은 걸로 봤는데 노란색을 초록색으로 잘못 봤나 보다.
Jay가 기타 줄을 정리하는 척하며 슬쩍 지켜보고 있는 바람에 차마 활짝 연 지갑을 그냥 닫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기타 케이스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배춧잎이 안 보여서 거슬러 받을 수도 없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기분이라도 좋게 내야겠다.
지금은 몰라도 몇 년 후면 한 곡에 천만 원도 넘게 받을 가수다.
오만 원짜리 한 장이 대수냐.
성과를 S 받아서 성과급도 많이 나올 테니 이 정도는 충분히 플렉스 할 만하다.
"잘 들었습니다. 팬입니다."
무심한 듯 오만원권 한 장을 꺼내 잘 보이도록 기타 케이스 한가운데에 얹혀 놓았다.
버스킹하면서 신사임당은 처음 봤는지 선글라스 너머로도 동공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팬이요? 저를 아시나요?"
자길 어떻게 아냐는 건데 그럴 만도 하겠다.
음반을 낸 것도, 고정된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계속 버스킹을 하는 것도 아닐 테니.
"네, 오늘부터 팬입니다. 곧 유명한 가수 되실 거니까 힘내세요."
몇 마디 안되는 격려의 말에 큰 감동이라도 받은 듯 Jay는 손을 가슴에 얹고 인사했다.
"네,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산책을 마치고 회사로 향하는데 마침 점심시간 마치고 들어가는 수진이가 보였다.
"과장님!"
들리지만 듣지 않았다.
경험상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에서 아는 척해 봐야 득이 될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못 들은 척 무시하며 로비로 들어가는데 뒤따라오는지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과장님 쫌!!"
이 정도 거리에 그 정도 성량이면 못 들었다고 하기엔 무리다.
"깜짝이야! 왜 무슨 일이야?"
"커피 사세요."
부탁도 아니고 맡긴 거 받으러 온양 쏘아붙였다.
최근에 빚지거나 덕본 게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봤으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왜?"
"헐, 왜라뇨? 꼭 선배가 후배 일 있어야만 사주는 게 커피인가요?"
"아니, 꼭 선배가 사야 하는 게 커피인가 해서."
"아……, 됐어요. 갈게요."
마치 흥칫뿡이라도 날리는 듯하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홱 돌아서 가버리려 했다.
"어이구, 농담이야. 잠깐 기다려봐 카드 줄게. 마시고 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넹."
그래, 법카라도 주면 되지 뭘 또 커피 한잔 가지고 쪼잔하게 그럴 필요까지야.
지갑을 열었는데 법카가 보이질 않는다.
오전에 해규한테 심부름시키면서 들려 보낸 게 생각났다.
버스킹 공연에 오만 원짜리도 털리고 지폐 하나도 없이 개인카드만 한 장 꽂혀 있었다.
거참……, 지갑 오늘 되게 안 도와준다.
그래 겨우 커피 한 잔인데 개카면 또 어떠냐
어쩔 수 없어서였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호탕하게 뽑아서 건네주었다.
"맛있는 거 먹어라. 개카다."
"네! 과장님."
사무실로 돌아오자 김병국 부장이 한참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자마자 불러 세웠다.
"태평아. 나 좀 보자."
보고받는 테이블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만족하나?"
말은 직접적으로 안 했지만 자기가 힘써서 S를 받은 거라고 공치사라도 하려는 거였다.
자기가 임상무한테 나 A 주겠다고 한 거 뻔히 다 아는데.
아무튼 상대방이 모른다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 있을 땐 무조건 자기 덕이고 자기가 힘써서 그런 거라고 하려는 게 사람의 심리이다.
감사하다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애썼다 정도의 뉘앙스를 풍길 만한 적당한 대답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에서 알람 문자가 울렸다.
수진이한테 건넨 카드사용 문자였다.
금액 쓱 한번 보고 덮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생각했던 단위가 아니다.
커피 한잔하랬더니 아예 커피머신이라도 샀는지 십만 원도 넘게 찍혔다.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씨!"
감사 인사라도 받을 줄 알고 기다리던 김부장이 갑작스런 내 욕설에 노발대발했다.
"뭐라고?"
"아닙니다. 이상한 문자가 와서요."
"아닌 거 아닌데. 너 지금 분명 나한테 욕한 게 맞는데?"
"지금은 아니였다니까요!"
평상시는 욕 많이 했지만, 방금은 정말 아니다.
"성과평가 건은 만족합니다."
"뭐라고?"
"기분 좋다고요. S 받아서."
감사하다고는 안 했다.
뻔히 이자의 작품이 아닌 걸 아는데 거기다 감사 인사를 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부장도 내 입에서 고맙다는 말은 못 듣겠구나라고 포기한 듯했다.
"아무튼 이번 승진대상에 포함시키려고 하니까 공적조서 써서 줘봐."
"공적조서요? 제가요?"
"그럼 네가 쓰지 누가 써? 내가 쓰랴?"
"그건 아니지만 원래 부서장이 쓰는 거라."
"내가 써서 떨어지면 나중에 뭐라 하려고?"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저도 딱히 쓸 게 없어서."
김병국 부장은 말없이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의미다.
공적조서란 승진대상자의 인적사항과 공적을 작성하는 문서이다.
해당 인물이 어떤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업무상으로 어떤 실적을 보여줬는지를 나열하는 등 부서장이 승진대상자로 추천할 때 제출하는 서류이다.
원칙은 부서장이 작성하지만 사실상 승진대상자에게 초안 작성하게 하고 부서장이 약간만 수정해서 인사팀에 올리는 게 관례다.
부서장 입장에서는 덜 귀찮기도 할뿐더러 게다가 승진대상자 본인이 직접 쓴 내용을 가지고 승진 여부가 결정되므로 부서장은 그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핑계 대기 좋은 구실인 셈이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연속 2번 S를 받아 과장 연한 4년 중에 2년 만에 승진대상자로 올라가는 거니 더 신경을 써야 해서 그냥 나보고 쓰라고 한 거였다.
"이번에 과장 승진하는 애들은요? 걔네들도 쓰라고 하실 거죠?"
"쓰라고 했어. 그걸 어떻게 내가 일일이 다 써."
그럼 됐다.
다른 애들 쓴 거 대강 베끼면 되겠다.
어차피 일 년 정도만 더 구르면 목표 종잣돈을 모을 수 있다.
다음 달에 차장 승진하면 연봉은 좀 오르겠지만, 그래도 근무 월수를 줄일 정도는 아닐 거다.
그러니 이번 승진에 사활을 걸 필요는 없다.
잠시 후.
수진이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내 자리로 왔다.
"과장님 잘 마시겠습니다."라며 아까 준 카드를 건넸다.
"뭐지? 그게 말로만 듣던 십만 원짜리 커피냐?"
그냥 한턱 쏜 걸로 만족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수진이는 곤란한 듯 옆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조성환님께서……."
수진이 옆에는 성환이 커피 한잔을 들며 웃고 있었다.
"S 받았다는 소문도 있던데 한턱 쏘셔야죠."
"성과평가를 네가 줬냐?"
"그럴지도."
이제 슬슬 회사 주인행세라도 하려는지.
일 년만 꾹 참는다.
더한 꼴 보기 전에 내가 나가고 말 거다.
뒷자리 원모도 돌아보더니 한마디 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도 다들 자리에 커피 한 잔씩이 놓여있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팀원들 모두에게 한턱 쏜 것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커피 한 잔으로 막을 수 있어서.
"그래. 잘 마셔 이게 다 너희 덕분이야."
내 의도라도 간파한 듯 성환이 끼어들었다.
"혹시 이걸로 퉁 치시려는 건 아니겠죠?"
"뭐가?"
"성과평가요."
"성과평가가 대수냐? 승진이면 몰라도."
하나 걸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원모님 들으셨죠? 승진하면 쏜다고 한 거."
"내가 언제?"
"방금이요."
내 입에서 쏜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물고 늘어질 놈이다.
"알았어. 쏘면 되잖아. 과장 2년찬데 승진이 되겠냐만은."
"왜요? 특별승진 케이스라는 소문 있던데."
어딘가 스파이가 있다.
아니면 이놈들 중에 나 말고도 소머즈 능력이 있는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적조서 쓰라는데 쓸 말이 없어서 그렇지."
"공적조서? 그게 뭐죠? 경찰조사 받는 건 아닐 테고."
성환이 처음 들어본 듯한 모습에 원모가 천천히 알려줬다.
그리고 자기도 과장 승진대상이어서 김부장한테 쓰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잘됐네요. 그럼 우선 원모님 거 쓰시면 그거 바탕으로 제가 좀 수정해서 과장님 거 써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승진은 물 건너간 거다.
이 자식들 보고서 쓰는 수준 내가 제일 잘 안다.
주간업무 보고에 넣을 한 줄도 끙끙거리는 놈들이 말만 잘도 한다.
그래도 막상 내가 쓸 생각을 하니 귀찮기 그지없다.
공적조서 잘 썼다고 승진 못 할 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못 썼다고 해서 승진할 게 누락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형식은 그저 구색 맞추기일 뿐이다.
그저 결과가 안 좋은 사람에게 핑계 대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알았어. 써 봐 그럼."
"그럼 승진하시면 뭐 쏘시는 거죠?"
"원하는 대로."
"그때 그 투뿔 한우로 할까요?"
"미친놈. 거기 쏘라고 하면 승진 안 할란다."
"농담입니다. 그럼 삼겹살은 어떠십니까?"
"그 정도면 뭐."
몇 명 되지도 않는 거 많이 먹어봐야 사이즈 뻔하다.
퇴사한 아람이까지 부르지만 않는다면.